‘따뜻한 말 한마디’ 환상이 깨진 어른들의 성장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의 월화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는 불륜과 불륜 이후의 파장을 그린 드라마지만 생각보다 자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보는 이들이 브라운관을 관조하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어쩌면 <사랑과 전쟁>을 오랫동안 집필한 경력을 보유한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사랑과 전쟁 너머의 평화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갑작스러워 오히려 코웃음이 나는 일일드라마식 화해의 모습을 연출하는 건 아니다. 전쟁이 지나가고 고요한 평화에 이르기까지가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지 <따말>은 그 과정을 섬세하게 하지만 따박따박 서술한다.

그러니 <따말>의 진짜 이야기는 불륜담이 아닌 셈이다. 불륜은 이 드라마에서 일상이란 세계를 무너뜨리는 폭탄의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 드라마의 진짜 이야기는 겉보기에만 완벽한 미성숙한 어른들이 일상이 무너진 뒤 스스로를 수습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어른스럽다고 혹은 남들이 보기에 제법 괜찮은 이들이라고 자부하던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던 혹은 숨기려던 망가진 얼굴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개인의 얼굴이기도하고 혹은 그 개인이 속해 있던 가정의 진짜 얼굴이기도하다.

<따말>에는 세 가정이 등장한다. 먼저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그려진 나은진(한혜진)의 친정집이 있다. 1남2녀를 둔 나은진의 부모는 이 드라마에서 내내 자녀들과 친구처럼 가까우면서도 지혜로운 혜안을 지닌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집에서 자란 맏딸 나은진은 모범적인 모습 그대로다. 그런 나은진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시련은 대학시절에 만나 결혼한 남편 김성수(이상우)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스스로 올곧은 이라 믿는 나은진의 가치관을 휘청대게 만든다.



그 반대편에 잘 나가는 기업의 대표인 유재학(지진희)의 가정이 있다. 유재학의 아내 송미경(김지수)과 그의 어머니 추여사 혹은 망고처트니(박정수)로 구성된 이 가정은 겉보기에는 부유하고 완벽한 집안이다. 심지어 자녀들을 조기유학 보냈다는 설정 역시 지금의 가정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모든 평화가 모두 송미경의 희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미경이 만든 행복한 인형의 집과 같은 유재학의 집은 나은진의 친정집과 같은 화기애애한 소란스러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유재학의 아내 송미경과 송미경의 배다른 동생 송민수(박서준)의 가정이 있다. 송미경의 부모는 늘 사이가 나빴고 결국 아버지의 외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송민수라는 그녀의 동생이 태어난다. 송미경과 송민수의 가정은 드라마 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완벽하지 못하고 불우한 가정은 드라마 내에 늘 두 인물을 따라다닌다. 완벽한 가정이 아닌 곳에서 자랐다는 콤플렉스와 불안감이 두 남매를 늘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남보다 더 착실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나은진의 친정집과 같은 따뜻하고 화기애애하게 보이는 가정을 동경한다. 물론 두 남매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송미경이 화초처럼 가꿔온 행복은 남편과 나은진의 불륜 때문에 쉽게 무너진다. 그 불륜의 여파는 이후 동생 송민수가 나은진의 여동생인 나은영과 엮어가는 순수한 사랑까지 뒤흔든다.

하지만 드라마의 네 주인공 송미경, 나은진, 유재학, 김성수는 불륜 폭탄이 떨어진 이 무너진 일상의 잔해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씩 성장한다.

나은진의 남편이자 지극히 평범한 수컷의 감수성을 지닌 김성수는 자신이 가벼운 일탈로만 치부했던 불륜이 실은 배우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직접 체험한다. 그는 마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내를 위로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방법까지 배워간다. 한편 나은진은 유재학과의 불륜을 남편 성수의 행동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성적 일탈이 없는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후에 그것은 그녀의 오만이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나은진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나은진은 자신이 모범적인 어른이 아니라 그저 모범적인 가정에서 자라 인생의 아름다운 단면밖에 볼 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는 걸 깨달아간다.



지극히 건조한 성격의 유재학의 경우 오히려 송미경의 부재를 통해 아내의 빈자리를 깨닫는다.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옷과 음식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는 유재학은 자신이 어머니와 아내가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퍼즐로서 존재하는 남편이었다는 걸 아내의 부재 후에야 체감한다. 하지만 그 무너짐을 통해 유재학은 처음으로 남편이란 퍼즐이 아닌 진짜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아마도 송미경일 것이다. 송미경은 남편의 불륜으로 그녀가 만들려고 했던 행복한 가정을 잃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차피 자신이 꿈꿔왔던 행복한 가정이란 그 전에도 존재하지 않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편은 언제나 그녀에게 냉담했고, 시어머니는 그녀를 고급스러운 손맛을 갖춘 식모로 대했다.



그런데 송미경이 이 모두를 내려놓자 오히려 그녀는 삶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남편은 처음으로 아내를 위해 고민하며, 며느리의 손맛에 길들여진 시어머니는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다. 더 나아가 남동생이 결혼을 꿈꾸던 여자친구의 행복한 가정이 실은 자신의 남편의 불륜녀의 친정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묘한 감정의 체험에 이른다.

“아무튼 좋다. 좋은 환경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에 대한 환상을 깨게 해줘서.”

송미경은 남편의 불륜이란 불행을 통해 자신을 짓눌렀던 그리고 옥죄어왔던 환상에서 깰 수 있던 셈이었다. 그리고 환상이 깨어진 이후에도 살아가기 위해 뒷수습을 해나가는 것이 어른이라는 걸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배워나간다. 어린이가 아닌 어른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친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다독이며 잠을 재워줄 어른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어른과 어른 사이에는 이 힘겨운 삶을 버텨나가기 위한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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