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 <에쿠우스> 배우 전박찬

[엔터미디어=공연전문기자 정다훈] 오는 14일부터 이해랑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극단 실험극장의 대표작 <에쿠우스>는 사각의 링 무대에서 정신과의사 다이사트가 알런이라는 소년이 말 여덟 마리의 눈을 찌르게 된 경위를 분석해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975년 국내 초연된 피터 쉐퍼의 연극 <에쿠우스>는 국내 연극 사상 최초 관객 10,000명을 돌파했으며, 강태기,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 등 알런 역의 배우마다 최고의 스타를 탄생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2014년 새로운 알런으로 발탁된 배우 전박찬을 만났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전박찬 배우가 보여 줄 알런의 순수성과 열정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었다. 즐겁게 작업하는 좋은 배우의 에너지를 함께 나눠 갖는 시간이기도 했다.

■ <에쿠우스> 오디션까지 긴박했던 서른여섯시간

-<에쿠우스> 공연은 언제 처음 봤나?
“2001년 스무살 때 한태숙 연출님이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린 공연을 봤어요. 최광일 선배가 알런 역으로 박정자 선생님이 다이사트 역으로 나왔어요. 재수생일 때 친척 누나랑 2층에서 봤던 기억이 나요. 공연을 보면서는 ‘너무 재미있다’ 그런 것 보다는 ‘무대에서 주는 에너지가 대단하구나’ 이렇게 반응했어요. 다이사트와 알런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에 매료됐던 것 같아요. 당시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경험이 좋은 밑바탕이 됐던 것 같아요.”

-공연을 보고 ‘알런’ 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건가
“막연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입시를 준비 중이었는데,‘ 나중에 내가 배우가 되면 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요. 그 때도 지금 당장 해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내 나이 30대 중반이 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현재 제 나이가 서른 세살이니 조금 이른 감도 있는 것 같아요.”

-<에쿠우스> 오디션에는 처음 도전해본 건가?
“극단 코끼리만보 작업을 하고 있었기도 했고, 원서 내는 시기도 거의 지나가버렸어요. 아마 원서를 냈다고 해도 안 됐을 것 같아요.”

-200:1의 오디션에서 선발되어 원작에서 나온듯한 ‘알런’이란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오디션 과정을 이야기 하자면?
“연극 <천국으로 가는 길> 작업을 할 때 오디션을 봤어요. 그런데 사실 지원 자격이 20대 남성, 키 170이하로 적혀 있었어요. 그걸 보고 키는 되는데 20대 남성 요건 그 부분에서 안 되겠다고 생각해 지원을 안 했어요. 그러다 여러 루트로 지원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홍부 분이 한마디 하셨다. “알런 역에 20대란 조건이 붙으니 경력이 짧은 친구들이 지원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표님이 주변에 추천 받은 배우들에게 지원서를 받으라고 지시했어요”) 누가 추천해준 건 맞지만 공개 오디션 현장에서 똑같은 환경에서 오디션을 보게 됐어요.”

-오디션 당일엔 잘 했나?
“오디션 때 너무 긴장 했어요. 오디션 준비 그 기간에 약간 살이 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공연을 할 수 있는 필수 에너지만 먹고 밤낮으로 연습했어요. 대본에 보면 ‘알런은 볼이 움푹 들어간 가냘픈 소년’으로 나와 있거든요. 연습실을 빌려서 연습하고 새벽에도 빈 연습실에서 연습하면서 서른여섯시간 만에 오디션을 보러 갔어요. 오디션 보는 그 날도 오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오디션을 보고 저녁에는 공연을 하는 날이었어요. 아침부터 빡빡한 날이었죠.

새벽 여섯시부터 연습을 했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양해를 구하고 오디션을 보러 갔어요. 제가 동사무소 지역주민 문화 강좌 출석체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평소보다 조금 늦게 가게 됐어요. 오디션 때문에 불안한 마음에 출석표를 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나봐요. 주차장에서 선생님과 딱 마주쳤는데 절 보자마자, ‘전박찬씨 그거 주고 가세요. 괜찮아요.’ 말 하셨는데,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놀라서 ‘사실 오늘 중요한 오디션이 있는데 시간을 못 미뤘어요.’ 라고 답했어요. 선생님은 ‘오디션 보세요’라고 한 마디 하셨어요. 정말 감사한 분이시죠.

현장에 가서는 막연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와야지’라고 마음 먹었어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갔는데 굉장히 떨리면서도 좋았어요. 현장에서 대본을 보고 해도 된다고 했는데, 외웠다면서 안 보고 했어요. 그런데 대사도 중간에 까먹고 부끄러운 순간도 있었는데, 다 끝나고 나니 오디션에 실패해도 되고 알런 역은 더 나이 들어도 열정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디션 후 합격했다는 소식은 언제 들었나?
“오디션을 보고 바로 하자는 연락이 온 건 아니고, 긴 시간을 거친 후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오디션 본 후 전화로 개인적 이야기나 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를 주고 받았어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연출님이랑 정서적인 소통이 있었다고 할까요? 그 과정을 거친 뒤 알런을 하게 된 거죠.

평생 잊을 수 없는 오디션입니다. 오디션에서 된 게 처음이거든요. 대학 다닐 때부터 오디션을 봤는데 매번 안 됐어요. 국립극단 오디션도 본 적이 많아요. 서류는 언제나 되는데 항상 안 됐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안 되나보다’란 생각이 들 쯤 연락이 온 거죠. 오디션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막 소리를 질렀어요. 이렇게 소리 지른 게 평생에 2번 있어요. 재수해서 연극원 들어갔을 때랑, 이번 <에쿠우스> 오디션 합격 통보 때요. 연극원 합격은 100프로 좋아서 ‘우와!’ 이렇게 소리 질렀다면, 이번엔 좋은 거 반 두려운 거 반인 심정으로 ‘으윽’ 소리를 냈어요. 내가 정말 배짱 좋게 덤비고 있는데 이게 과연 맞아? 진짜 내가 하게 된거야? 그런 생각들이 강력하게 들었거든요. 초반에 연습 하면서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작품에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란 생각도 함께 들어요. 워낙 소극장 작품을 많이 했고,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대작을 그것도 2시간을 무대 위에 있어야 하는 배역은 처음이라 부담이 되더라구요. 초반 보름 간은 잠을 설칠 정도로요.”

-<에쿠우스>란 연극이 배우 전박찬 인생에 대단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이 더 깊어진 건가
“굉장히 험난한 경험이 될 수도 있고 큰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지금까지 제가 했던 작품에 큰 애정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 작품이나 하지 않았어요. 배우로서 쉬지 않기 위해서 들어오는 족족 작품을 했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했다는 게 아니라, 매력을 느껴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주는 작품을 했어요. 물론 너무 힘들어서 실패한 작품도 있고요. 그런 시간들을 겪고 차츰 차츰 내 자신이 깨지고 확신이 생겼어요.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하루하루의 고통이 저에게 양분이 됐던 것 같아요. <에쿠우스>란 작품도 ‘이걸로 내가 좋은 이야기를 들을지 또 한 번 실패를 맛볼 지 모르겠지만 배우로서보다 제 인생에 있어서 큰 축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게 했어요. 배우로서 축은 극단 코끼리 만보에서 하는 작업들입니다.”



■ 알런은 순수한 소년에서 출발

-지현준 배우가 인터뷰에서 우스갯소리로 ‘정상적인 알런과 말 한 명을 캐스팅 했다’고 말했다.
“그 인터뷰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보통은 등치가 조그마한 배우들이 알런을 해서 본인의 이미지는 그와는 다르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현준선배가 표현하는 알런과 제가 표현하는 알런이 조금 다를 거예요. 제가 누구를 따라하려고 해도 같아질 수 없듯이요. 워낙 분위기가 달라 같은 생각을 해도 다른 그림이 나와요. 제가 배우가 아닌 관객이라면, 지현준 전박찬 두 배우를 놓고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또 배우가 역할의 2배 나이를 살아야 할 수 있다는 말도 맞는 것 같아요. 명작일수록 그런 것 같아요. <밤으로의 긴 여로> 에드먼드 역이 20대 초반인데 30대 후반 배우가 해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아들 비플 역을 40대 배우가 해요. 어렸을 땐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 있어요. 알런은 17세 소년인데 전 그 역 보다 두 배 나이에 가깝고 현준 선배는 두 배가 넘어요. 전 아직도 덜 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대표님이 ‘찬이도 인터뷰를 한 번 해’란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 때 전 동아연극상 받은 지현준 선배, 다이사트 안석환 김태훈 선생님들은 인터뷰 할 내용들이 있겠지만 ‘나를 왜 인터뷰 하라고 하지?’란 생각을 했어요. 막상 인터뷰를 해 보니 <에쿠우스> 알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현준 배우의 알런을 옆에서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현준 배우는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강한 이미지 그 안에서 부드러운 순간을 느낄 수 있어요. 워낙 몸을 부드럽게 잘 쓰는 배우이죠. 옆에서 보다보면, 17세 소년으로 보이는 그런 순간이 있어요. 강함 속에서 순수함이 묻어나오는 건데 같은 역 배우로서 그 점이 부러워요. 저는 그런 강한 면이 약하기 때문에 그걸 표현하려고 하다보면 긴장되고 이상해 보일 수 있어요. 저는 저만의 알런을 만들어가야죠.”

-알런 역이 젊은 연극인의 로망이란 말이 있다. 배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나?
“굉장히 매력적이죠. 실험극장에서 이 작품을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겠어요. 알런과 다이사트만 매력적이냐? 말 너제트랑 질 메이슨 등 각각 인물이 매력적이죠. 성, 종교 비판 등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작품은 아니지만,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들도 들어있어요. 어려우면서도 재미있어요. 연습실에서 조차 웃을 수 없는 분위기일거라 생각했는데 웃다가 연습을 쉬기도 할 정도로 재미있어요. 옛날부터 공연을 재미있게 연습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작품의 밀도에 있어서는 무겁지만 중간 중간 재미있는 장면이 많아요. 종교에 집착하는 어머니 캐릭터는 이한승 연출님이 광신도적인 모습으로 많이 풀어보려 한다고 들었어요.”

-알런은 어떤 인간인가?
“일단 굉장히 예민하고 순수한 소년이라 생각해요. 기성세대, 사회적인 것들, 환경적인 것들과 부딪히면서 뭔가 다르게 뻗어나가는 게 있어요. 이게 예민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보통의 소년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알런의 가장 강한 모습은 순수함이죠. 그 안에 그 나이에서 가질 수 있는 강한 욕망이 들어있어요. 자칫 공연 보면서 혼동되기 쉬운 건 알런이 정말 정신 이상을 갖고 있거나, 광적인 사이코 패스로 인지 할 수도 있다는 점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알런은 순수한 소년에서 출발하는 게 맞아요. 말을 타는 행위 자체, 광적인 에쿠우스 신을 섬기는 것 또한 광적인 종교처럼 보일 수 있는데 어떤 순수성의 신, 아닐까요.”

-알런을 정상적인 인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인가
“다이사트 대사 중에 ‘정상적인 게 좋은 것이냐’란 대사가 있는데, 무대 후면 신전공간에서 다이사트 대사를 듣고 있으면 묘하게 정서적인 자극이 되고 공감이 돼요. 가장 많이 들어오는 질문이죠.”

-알런의 신앙은 말, ‘에쿠우스’였다. 그것이 알런을 ‘비정상적인 인간’ 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만든다.
“알런이 정상적이지 못한 면을 보이긴 해요. 말의 눈을 찌른다거나 학교도 가지 않고 친구도 사귀지 않아요. 그러다 사귀게 되는 친구가 질 메이슨이란 누나에요. 알런은 질메이슨 과 인간으로서의 회기를 꿈꿔요. 회기를 꿈꿨으나 안 돼 말의 눈을 찌르고 혼돈을 겪는 상황을 겪어요. 그렇다고 알런을 비정상적 자폐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어요. 일반 소년들 또한 조금 더 내성적이냐 외향적이냐 차이가 있잖아요. 알런은 조금 더 많이 내향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연출님도 ‘알런이 정신이상자로 보여선 안 된다’란 말씀을 하셨어요. ‘알런은 실제로 정신이 돌아버린 미치광이가 아니다’고. 물론 그런 척 하는 순간이 있긴 해요. 본질적으로 볼 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 모든 걸 무대에서 제대로 보여줘야 할텐데요...”

-<에쿠우스>의 주인공이 알런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고, 다이사트라 보는 입장도 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나
“주인공은 다이사트죠. 어렸을 때 이 작품을 보면서는 알런 밖에 안 보였어요. 주인공 최광일 배우가 뿜었던 에너지가 컸던 이유도 있었죠. 어찌됐든 남자배우고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때라 그 역 밖에 안 보였어요. 그런데 오디션을 보기위해 대본을 읽어보고 자료를 찾아보면서는 다이사트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런에게 공감할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대사들은 대부분 다이사이트 대사들입니다. 다이사트에게 더 큰 공감을 하는거죠. 또 작품 이름이 <에쿠우스>인데 라틴어로 말이란 뜻인데, 거기에 중점을 두면 가장 매력적인 너제트란 말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죠. 관람연령이 19세로 나오긴 했지만 고등학생이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다이사트는 ‘내 인생 어느 한 순간에도 느껴보지 못한 격렬한 정열을 그 애는 가졌어’라고 말한다. 알런이 가지고 있는 열정이 부러운 순간이 있나
“물론 제가 스무살 땐 열정이 충분이 있었어요. 그게 어떤 과정으로 바뀌었는지...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가고, 사회에 던져지면서, 옛날에 갖고 있던 그런 열정들이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부러운 순간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관객들도 그런 부러움을 알런을 통해 볼 수 있겠죠.”



■ 잊을 수 없는 <에쿠우스>와의 인연, 그리고 떨림

-초연 알런 역 강태기 배우는 <에쿠우스>란 작품을 만나, ‘연극을 평생 버릴 수 없게 됐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강태기 선생님은 이 작품으로 굉장히 주목을 받으셨고, 마음을 움직여주는 무대와 객석에서 서로 오고가는 그런 경험들을 강태기 선생님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작품이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을 움직여주는 작품이요. <에쿠우스>는 창단 54주년 된 극단 실험극장의 대표작입니다. 네임 밸류가 크죠. 몇 년에 한 번씩 공연 할 때마다 관객들이 열광하는 게 있어요.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에쿠우스> 오디션 때 아르바이트 양해를 구했던 분이 마포 문화강좌 동화수업을 하는 이인수 선생님이세요.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를 하셔서 “그 때 봤던 오디션이 <에쿠우스> 맞냐? 이화여대 75학번인데 강태기 선생님이 나온 초연을 봤었다”란 말씀을 하셨어요. 40년이 지나 거의 아들 같은 나이 뻘이지만 인연이 있는 배우가 좋아했던 연극에 나온다고 하니 작은 떨림을 느끼신 것 같았어요. 선생님 때문에 감사하게 오디션도 봤는데...오디션에 떨어졌다면 미안했을 것 같아요.

70~80년 대 그 시절엔 <에쿠우스>를 보지 않고 이야기가 안 될 정도라고 했어요. 이대생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이 작품을 볼 정도로 인기가 좋은 작품이었다고 하니까요. 초연을 봤던 분이 전화를 한 건데, 정말 감동이었어요. 처음엔 아르바이트 인연이었지만, 배우로서 저와 관객으로서 선생님은 계속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 깊게 다가왔어요. 선생님께서 연극 <천국으로 가는 길>도 스스로 표를 사서 몰래 보러오셨어요. 정말 감사하게 도시락도 싸 주셨는데 든든한 지원군이죠. 연극은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달나라를 여행해도 계속 될 텐데. 먼 훗날 2014년 <에쿠우스> 때 전박찬 배우가 나왔다는 걸 한명이라도 기억하는 분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알런은 알몸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노출에 대한 부담은 없나?
“이 질문은 오디션 때부터 받았어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배우인지 모르겠지만 원작에서 요구하는 장면이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면 배우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무대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타당성 있게 한다면, 다 벗고 말을 타는 인물의 감정에 관객들이 공감 하지 않을까요. 배우가 그렇지 않다면, ‘저 배우가 왜 벗지? 왜 저렇게 하지?’ 하면서 놀라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랑 가까운 사람 혹은 나와의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7열 이후에 앉아라’고 농담식으로 이야기 했어요. 생전 보러 오지 않았던 숙모, 이모, 친척 누나, 대학 선후배, 여자 동기들이 ‘공연 꼭 보러갈게’ 란 말을 했거든요. 전라로 나올거란 생각을 안 하는 분도 분명 있겠죠. 하지만 흉하지 않을 것 같아요. 굉장히 아름답게 그려지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고 있어요. 17세 소년이 되게 몸이 좋고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 하지만 제 몸이 아기 몸이라 빈약해 보일 수도 있겠죠. 알런이 가냘프게 보여야 하는 건 맞지만 힘이 없어 보일까봐 다시 살을 찌우고 있어요. 그런데 연습량이 많아 살이 안 찌네요.”

-인상적인 장면은?
“주변에 말들이 뛰어다니고 있고, 전 너제트의 몸 위에 올라타는 그 장면이 압권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실제론 제주도 조랑말 밖에 안 타봤지만 그 장면은 진짜 멋진 말을 타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말들의 움직임은 트러스트 무용단 김윤수 선생님이 도움을 주고 계세요. 1막 마지막 장면은 보는 쾌감이 있어요. <에쿠우스>는 장면 템포를 긴장감 있게 조절하면서 2시간을 목표로 달리고 있어요. 맛깔스런 대사를 살리고 불필요한 시간을 갖지 말고 관객들이 쭉 따라올 수 있게 템포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연습 중 해결이 안 된 부분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는 편인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고민 하는 시간을 먼저 갖는 편이긴 한데 주변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좋은 말들을 많이 들을 수 있어요. 연출님에게도 질문 하고 더블 캐스트인 현준 선배에게도 ‘어떻게 생각하세요?’란 질문을 해요. 과거에 이 작품을 하셨던 선생님들에게도 ‘이건 뭔가요’라면서 물어봐요. 이번에 다이사트로 나오시는 안석환 김태훈 선생님께서도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세요. 연출님이 75년부터 작업을 하셨던 분이라 제가 질문을 하면 풀려나가는 지점들이 좋아요. 연출님이 말 했던 게 처음엔 이해가 안 가다가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또 답이 되고 그러더라고요.”

■ 즐겁게 작업하는 좋은 배우 전박찬

-2010년 연극 <우리 말고 또 누가 우리와 같을 말을 했을까?>란 작품에서 '전가람'이란 다소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이름에서 '전박찬'이란 강한 기운을 내뿜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말 했다. 개명한 후 실제로도 좀 더 기운이 달라졌나
“중학생 때부터 이름을 바꾸고 싶어서 대학 졸업하면서 이름을 바꿔 활동 하게 됐어요. 아예 개명해서 법적으로도 이 이름을 쓰고 있어요. 네. 현재 이름에 만족하고 있어요.”

-김동현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코끼리 만보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군대를 갔다 와서 심하게 부딪친 게 공연계가 뮤지컬 일색으로 변해있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연극은 학교에서조차도 뒤로 밀려나있었어요. 그때 만난 공연 이 극단 코끼리만보의 창단 공연 <착한 사람 조양규>였어요. 그 공연이 저에게 어떤 해답을 줬다고 할까요. 어떻게 보면 무대라는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게 됐다고 할까요. 나도 저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코끼리 만보 워크샵에 참가하고 그 뒤 극단 작업을 하게 됐어요.”

-코끼리 만보 극단 배우들이 그 곳에서 뭔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뭔가가 분명 있는 것 같았다.
“ ‘코끼리 만보’ 배우들이 연극하는 동지 의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코끼리 만보’ 란 극단 이름도 묵직하고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가 결국 귀를 펴고 훨훨 날아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코끼리 만보가 지향하고 있는 공동창작은 흔히 공동으로 소품 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내고 그런 건 아닙니다. 서로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는 시간을 거쳐요. 그렇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적응하고 나면 좋아요. 물론 많은 관객들이 볼 수 있는 환경,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제공하지 못해요. 그것 보다는 생각할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전 한편의 공연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재미있어. 좋았어’ 이것보다는 공연 보고 그 다음날에도 생각나는 공연이냐. 아니냐입니다. 코끼리 만보 공연이 그 점에서 좋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연극 보는 걸 좋아했었나?
“어렸을 때 제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친한 사람 아니면 말도 잘 안하고 속도 안 털어놨어요. 그런데 중 고등학교 시절 연극을 보고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뭔가 자유스러움을 느꼈어요. 처음에 끌렸던 건 그거 인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 두 편 씩 보러다닐 정도로 연극 팬이었어요. 지금도 연극 보는 걸 좋아해서 많이 보고 싶은데, 요즘엔 <에쿠우스>연습 때문에 보기가 쉽지 않아요. 지인들 작품만 해도 보고 싶은 게 많아요. 연극 <모래의 여자> 작가 겸 연출 구자혜는 <먼지섬>까지 두 작품이 동시에 올라가고 있는데 보지 못하고 있어요. <먼지섬>엔 같은 극단 식구 강명주 배우가 나와요. 백익남, 이은정 배우가 나오는 <소년 B가 사는 집>도 그렇고요.”

-연극을 좋아하던 소년은 연극배우가 됐다. 배우로서 본인의 재능을 발견한건가
“능력을 믿고 작업을 했다기 보단,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좋아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 같아요. 배우가 매력적이다고 느꼈어요. 배우로서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대학로에서 잘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거나 집요한 그런 욕심이 없어요. 배우 자식을 둔 많은 부모들은 대하사극에서 자식을 보길 원해요. 꿈이죠. 그런데 전 기본적으로 그런 성향이 없어요. 부모가 보기엔 ‘이 자식이 연극만 해?’ 답답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전 계속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연극을 했으면 해요. 그게 가장 큰 욕심입니다. 연극으로 먹고사는 것은 늘 고민이지만, 그러다보면 먹고 살 수 있는 길도 열리지 않을까요?“

-배우라면 재능에 대한 고민, 좋은 배우에 대한 고민이 분명 있을 것 같다.
“전 크게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험난한 배우의 길을 가야 해요. 재능에 대한 고민은 평생 가져가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부터 ‘난 이걸 잘해서 배우를 할거야’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연극이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달려가고 달려갔어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열심히 하는 것만 보여줄 순 없지만 항상 살아있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고민들을 하다보면...그것도 즐겁게 작업 한다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재능에 대한 질문을 돌려막기 한 격이 됐어요. 그런데 그 표현 좋네요. 꼭 써주세요(웃음)

‘좋은 배우’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어요. ‘잘 생기면 좋은 배우인가? 딕션이 좋으면 좋은 배우인가. 어떤 순간엔 난 좋은 배우가 아닌가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러다 즐겁게 작업을 하다보면 좋은 배우가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연습을 해도 즐거워서 싸우고 즐거워서 술을 먹는 건 좋은 배우로 가는 원동력이 돼요. 너무 힘들어 죽어버릴 것 같이 가슴이 쪼여오는데,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배우는 달라요. 선배가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좃까라 마이싱’을 하나 먹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것 만으로 갈 순 없지만, 그 순간에 누가 뭐라해도 그걸로 즐거워질 수 있다면 그런 약도 필요한 것 같아요. 작업을 즐겁게 하는 것. 서로 즐거우면 그 연출에게 좋은 배우 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배우랑 작업할 때 즐거웠고요. “

전박찬 배우는 “즐겁게 작업하는 배우, 좋은 배우가 되어 가는 중에 <에쿠우스>란 작품을 만났다”고 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연극하는 사람들과 같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즐겁게 고민하고 작업 하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해방 이후 자행된 양민학살에 대한 증언을 담아 낸 연극 <말들의 무덤>도 그 축에 있었던 것 같아요. <말들의 무덤>은 스스로 너무 너무 하고 싶어서 월미도를 찾아간 거 였어요. 그리고 <에쿠우스>란 작품을 만나게 됐어요. 뭐가를 했을 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즐겁게 작업하는 좋은 배우가 많지 않아요. 전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100 프로 만족할만한 연습과 공연은 없겠지만, 연습실과 본 무대에서 최선을 다 하는 태도, 관객과 같이 소통하는 에너지가 뒷받침된다면 100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 아닐까요”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허영옥, 코르코르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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