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 <관객모독> 연출가 기국서

[엔터미디어=공연전문기자 정다훈] 극단76단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피터 한트케(Peter Handke)의 <관객모독>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단단하고 견고한 작품으로 성장해왔다. 일반적인 서사극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이 작품은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해 욕, 고백, 진술, 질문, 외침, 예언 등을 언어의 해체와 분절로 보여준다. 이 모든 게 관객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연극에 대한 이야기’이자 소통이란 점이 매 공연 때마다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오게 했다. 특히 지난 2004년 연극열전 공연 당시 참여 작품 중 최다 관객점유율인 97.9%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바 있다.

2004년 <관객모독> 공연 이후, 10년 만에 다시 76단의 수장 기국서 연출가를 만났다. ‘이번 인터뷰 테마는 뭔가요?’로 말문을 열었던 기국서 연출가는 인터뷰 후 바로 헤어지는 인터뷰이들과 달리 대학로 주변을 함께 산책할 것을 권했다. 젊음의 설렘이 묻어나는 대학로의 공기를 마시며 연극과 관련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었던 인터뷰, 그리고 산책 시간이었다.

■ “<관객모독>에서 배우들이 욕을 하고 모욕을 주는 게 결국은 소통”

-5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들고 왔다.
“제일 처음에는 박근형 연출이 ‘이 작품 한번 하면 어떠냐?’라는 제안을 해서 ‘좋다.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게 뜻을 모아 이다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작업하게 됐죠.”

-1979년 초연시, ‘<관객모독> 이 작품의 대본을 처음 접했을 때 한 일주일 가슴이 뛰었다’는 말을 했다.
“<관객모독> 대본을 발견하고 일주일간 대본을 끼고 살 정도로 좋았어요.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는데, 여러가지 매력이 있겠지만 우선 내용이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국문학 전공을 했고, 국문학과에서도 언어학을 전공했어요. 문학보다 어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관객모독>이 언어에 대한 게 많이 들어있어요. 언어의 해체와 분절 등 언어 연극으로 표방을 했죠. 그 때가 철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비트게슈타인, 소쉬르 등에 대한 책을 많이 봤던 시기죠.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때였어요. 입으로 하면 언어인데, 글로 하면 말이라고 해요. 그 쪽으로 생각이 모아지니 관련 책도 읽게 되고, 거기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떠올랐던 때였어요.

젊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보며 왜 저런 말이 형성 됐을까? 관심을 갖게 돼요. 시대마다 말투가 달라요. 한동안 서비스업계에서 ‘가실게요’란 말투가 생겼어요. 그건 그 전에 없던 말투죠. 한 때는 인터넷에서 ‘아햏햏’ 그런 조어들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런 것들에 호기심이 생기고 신기했어요. 누구나 어렸을 때 말장난을 하면서 논 경험이 있잖아요. KBS <개그 콘서트> 프로그램에서도 말 가지고 하는 장난이 재미있어요. 말이라는 게 어떤 기능이 있죠. 이 작품도 그런 관점이 반영 됐어요. 그 형식이 약간의 변화만 두고 유지됐죠”

-처음 이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무대 위 배우들이 욕을 하는 것에 놀라기도 하지만 즐거워한다. 욕으로 소통을 한 걸로 볼 수 있나
“‘배우들이 욕을 하고 모욕을 주는 게 결국은 소통이죠. 작가 피터 한트케의 독특하고 탁월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어요. 무대 위 배우가 관객을 울릴 수도 있고 웃게 할 수도 있어요. 지적인 쾌락을 줄 수도 있죠. 이 모든 게 다양한 감정을 갖게 하기 때문에 가능해요. 욕을 하는 것도 일종의 감정인데, 사람들의 여러 정서 중에 불쾌감도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욕을 먹고 화가 나지 않아요, 그러니 소통이죠. 크게 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욕을 하면 그냥 넘어가진 않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빤히 쳐다보면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관객모독>은 우리는 마음 놓고 너희를 모독 하겠다며 욕을 해요. 작품이 그렇게 소통을 하고 있죠.”

-수천 번 대본을 읽었겠다. 2014년 <관객모독>을 올리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장면이 있다면?
“공연이 올라가는 그 시기의 사회적인 이슈가 반영돼야 해서 매번 조금씩 수정을 해요. 이번에도 하나 있어서 반영했어요. 북한 뉴스가 나오는 장면 중에 ‘예술에 정치를 개입하지 맙시다’는 무대 감독의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표현의 자유 아닌가’로 답하는 장면, 축구 중계 아나운서가 나오는 장면에서 ‘따귀한대 맞고 예술과 정치를 알았다’고 하는 대사가 수정됐어요. 시대가 그렇지만 관객들은 다 알잖아요. 풍자죠. 지극히 정치적인데다, 할 말 다 해놓고 하지 말라고 하니 또 하나의 풍자죠.”

-30년이 넘게 이 작품을 함께 하면서 애정이 많이 생겼을 것 같다.
“애정이 있긴 하죠. 반반인 것 같긴 해요. 한편으론 징그럽고, 또 한편으론 그래도 재미있고. 희한한 노릇이죠. ‘또 한다는 말인가?’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어요. 막상 하게 되면 의미가 더 부여가 되고 재미가 있어요. 익숙한 것을 또 다룰 때랑 잘 아는 것을 다룰 때 생기는 재미는 달라요. 새로운 작품을 다룰 때도 재미가 달라요. 새로운 것을 할 땐 탐색 때문에 긴장이 돼요. 연습 과정도 창조적이고. <관객모독>은 이미 머리속에 들어 가 있는 것을 다루잖아요. 그런데 할 때마다 배우들과 감각을 이야기하는 재미가 달라요.”



■ “연기 앙상블이 어떤가가 <관객모독> 성공의 관건”

-<관객모독>은 극장과 연극을 분석한 작품이다. 한 문장 혹은 한 단어로 작품을 설명한다면?
“연극 전체에 대한 작품입니다. <관객모독> 말고 다른 제목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적절한 제목이죠. ‘연극논문’ 그것도 맞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 이야기, 관객에 대한 이야기니까 연극에 관한 논문인거죠. 그런데 연극 제목이 <연극논문>이라고 하면 아무도 안 오겠죠. 논문 이라고 하니 제목을 이렇게 정할 수 있을까. ‘관객에 대한 고찰’-관객은 누구인가? (관객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관객은 우리죠. 그리고 나죠. 연출가를 일컬어서 첫 번째 관객이라고 하고 나는 연출이니까 첫 번째 관객인거죠.”

-중견 팀과 젊은 팀 이렇게 두 팀으로 배우진이 구성됐다. 두 팀의 분위기가 다르게 진행되나?
“팀이 섞이긴 할 건데, 팀 이름을 클래식 팀(기주봉, 정재진, 주진모, 전수환, 김낙형, 고수민), 뉴 팀(김형석, 김동박, 안창환, 윤 박, 성아름, 이주희)으로 나눠 부르고 있어요. 클래식 팀은 예전에 함께 했던 배우들이고, 뉴 팀은 나이대가 30대 전후 젊은 배우들이 들어가 있어요. 형식은 비슷한데 분위기가 달라요. 클래식 팀은 안정감이 있어 말에 설득력이 있어요. 그게 관객들에게 믿음을 줘요. 젊은 팀은 에너지가 느껴지죠.”

-연극 <농담>,<민들레 바람되어>,<토란-극>,<멕베스>, <웃음의 대학> 등 연출가로 더 잘 알려진 김낙형씨가 배우로 출연한다.
“무대감독 역을 맡았어요. 배우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역할이죠. 배우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역이거든요. 김낙형이 초창기에 연극 <리어왕>에 출연 했는데, 잘 했어요. 한상철 평론가가 ‘저 배우 누구냐’고 할 정도로 눈에 확 들어오는 배우죠. 여자들이 (김낙형을 보고) 눈빛이 흔들려요. 굉장히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어요. 언젠가 재일 교포가 ‘한국에 저런 청년들이 아직 많아요?’라고 물어 본 적이 있어요. 일본에 저런 눈빛 가진 청년이 없나봐요. 한국 사람들 눈빛이 강렬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연출로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뭔가?
“연출의 중점은 연기 앙상블을 맞추는거죠. 작품의 테마나 주제는 변함이 없는데 연기 앙상블이 어떤가가 성공의 관건이 될 것 같아요. 이 작품은 특히 더 그래요. 다른 리얼리즘 연극이라면 자기 것만 잘 하면 되잖아요. 이건 옆 배우와 마인드를 나누며 공감하면서 가야 하는 작품이라 그것이 어려워요. 배우들의 친밀성이 우선시 되겠죠. 존중하고 나누는 것, 네가 이렇게 가면 나는 이렇게 도와주는 거요.

연기력이라는 게 4인조 밴드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여기서 연기력은 각 연주자의 기량을 말하는 거잖아요. 두 번째는 앙상블의 호흡이죠. 재즈 음악만 봐도 호흡이 서로 맞아야 굉장히 아름답거나 충격적으로 다가와요. 대규모의 오케스트라와 달라 4인조 연주 혹은 사물놀이만 봐도 서로 도와주고 어느 순간엔 자기가 빠져주기도 해요. 그게 앙상블이라고 치면 그 기운이 관객들에게 전달 돼요. 관객들이 만족하면 기립박수가 나오겠죠. <관객모독>이 스토리 자체로 좋다기 보다는 배우들의 그런 모습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들에게도 앙상블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한 극단에서 오랫동안 같이 작업을 한 배우들이라면, 친밀한 호흡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오디션을 통해 뽑았거나, 서로 각자 다른 사람들이 와서 한 팀으로 이뤄지면 앙상블 그것이 우선 해결돼야 해요. 그건 논리적으론 해결이 안 돼요. 억지로 안 되는 거니 서로 서로 도와줘야 하죠. 머리로는 되는 데 저절로 안 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선 별별 방법을 다해 볼 때가 있어요. 그것만 되면 그 때부터 더 좋아져요.”

-2005년도에는 배우 양동근이 <관객모독>을 연출했다. 양동근표 관객모독은 어떻게 봤나?
“실험이죠. 제가 ‘네 감각으로 만들어봐라’고 했어요. 전부다 랩으로는 하지 않았지만 꽤 많은 부분 랩을 적용해 실험적인 무대를 만들었어요. 래퍼가 연기를 하기도 했어요.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관객의 호응도 면에선 성공하진 않았다고 볼 수 있겠죠.”

-기국서의 <관객모독>으로 확실히 대중에게 굳어진 점도 있는 것 같다. 혹, 또 다른 새로운 형식으로 <관객모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나
“다른 경우엔 거의 없는데 <관객모독>은 트레이드 마크 처럼 돼 있어서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렵죠. 저에게 다른 제의가 들어온다면? 글쎄요. ‘네가 완전히 바꿔서 새롭게 해봐라’ 란 제의가 온다면 별로 안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30여년간 별별 테스트를 다 해봤는데... 새로울 게 없을 것 같거든요.”

-이번이 기국서의 마지막 <관객모독>이라 생각하나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사실은 매번 할 때마다 ‘그만해야지’ 그런 생각을 해요. ‘나이를 먹고, 사회에서 요구되는 것들로 보나 이젠 기록으로만 남겨야지’ 그런 생각이요. <관객모독>은 언제든지 해도 괜찮은 형식이자 테마지만...자체 극장이 없다보니까 못해요. 하루에 100편의 연극이 대학로에서 올라간다고 치면, 한켠에서 쉬지 않고 몇 십년 같은 작품을 올리는 극단도 있어야 하죠. 그럴 수도 있잖아요. 프랑스도 그런 극장이 있으니까. 상상을 해봐요. 음식점이 많은 데 그 중에도 독특한 음식점이 하나는 있어야 하죠. 관객에게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극장 하나만 있으면 1년이든 10년이든 붙박이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 “배우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벗고 내 던지는 혁명적인 존재”

-젊은 관객들은 기국서 연출을 영화 <도둑들>의 웨이홍 역 영화배우로 기억한다. 영화배우 경험을 했는데, 연극배우로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은 없나
“훈련이 안 돼 있어서 못해요. 영화 작업은 순간순간 집중해서 카메라로 뽑아내는 게 있어서 가능했어요. 연극배우는 성격이 달라요. 연극은 긴 시간 동안 무대에 있어야 하고 어떤 역할로 있어야 하는데, 그런 훈련이 안 돼 있는 사람은 할 수 없어요. 머리가 좋고 감수성이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죠.

어느 장르나 마찬가지지만 무대 배우에게는 연륜이 있어야 해요. 내겐 그런 연기 연륜이 없어서 연기는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요새 이윤택 연출가가 ‘연기하라’는 제안을 했는데, 엄두가 안 나요. 이것도 용기가 나야 하죠. 아니면 억지가 되니까. 자기가 혁명을 하느냐, 마느냐인데 그게 잘 안 될 것 같아요. 유혹도 있지만 괜히 잘못했다간 자기 혁명도 안 되고, 고통만 겪지 않을까 생각해요. 진짜 배우의 길은 연출의 길과 달라요. 배우는 자기를 완전히 벗고 내 던지는 건데 그건 혁명이죠. 전 그게 잘 안 돼요. 굳이 연출과 배우를 구분해 어느 것이 잘 맞냐고 물어 본다면, 직업이 그렇다보니 연출에 익숙하다고 말 할 수 있죠.”

-배우 경험이 연출자에게 뭔가 생각의 전환을 갖게 한 부분이 있었나?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밀어붙이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요. 그 배우가 못해서가 아니라 정말 패닉상태에 빠질 때가 있어요. 연출이 몰아붙일 때 그런 경우가 많이 생겨요. 그렇게 되면 나올 것도 안 나와요. 차라리 긴장을 풀어서 다시 그 사람이 힘을 얻게 해줘야죠.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죠. 배우가 마음에 억압이 있으면, 내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런 생각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칭찬이 좋죠. 그렇다고 무조건 칭찬해서 될 일이 아니라 배우에겐 자극도 줘야 해요.”

-요새는 배우들에게 친구 같이 다가오는 젊은 연출가들도 많다.
“연출의 형식이 아니라 이를테면 권위죠. 내가 60세라 치면, 25세 배우와 나는 서른다섯이나 차이가 나요. 이렇게 되면 나이에서 먼저 억압을 느껴요. 60세 연출이 아무리 민주적으로 말을 해도, 신사적으로 말해도 기본적으로 어려운 게 있어요. 그런 것들이 배우에겐 억압이나 두려움, 부자연스러움으로 다가와요. 그런데다 권위자가 어려운 이야기를 한두 마디 하거나 배우의 단점을 확 찍어서 이야기하면 얼어붙게 돼요. 반면 비슷한 이야기를 28세 연출가가 이야기하면 반발심은 생겨도 얼지는 않아요. 동시대로서 편한 게 있어서 억압은 안 느끼죠. 연출이 지랄하면 대들면 되니까.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조심스럽죠. 연출가가 아무리 속상해도 멘트를 함부로 하면, 배우가 바로 움츠려 들어버리니까요.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해야 하고 친근해야 하고, 쉽게 설명해야 하고 배우의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해요.”

-아트원씨어터 극장에서 하는 연극은 대부분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속설도 있던데, 이번에 이 극장에서 <관객모독>을 올린다. 관객층이 달라졌는데, 이번에도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것 같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기대해야죠. <관객모독>이 관객들에게 공신력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관객들은 비슷한 것 같아요. 분위기만 달라지고, 마인드만 바뀌었어요. 생각해보니 많이 바뀌기도 했네요. 사람들이 훨씬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시대가 되긴 했지만, 관객은 늘 있어왔어요. (요새는 연극 배우도 티켓파워가 있어야 사랑받는다는 말이 있다)연극에도 그런 티켓파워가 생겼나보군요.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나쁜 현상은 아니네요. 좋아하는 배우 팬클럽이 있듯이, 그렇게 연극배우도 좋아하는거니까요.”



■ 괴테처럼 늘 사랑에 빠지고 싶은 남자 기국서

-10년 전 <관객모독>으로 인터뷰 할 때, “20대는 노는 시대, 30대는 일하는 시대이자 강렬한 시대이다. 40대는 큰 일을 하는 시대이고 50대는 비밀스럽다.‘고 말했다. 이제 60대가 됐다. 60대는 무슨 시대인가?
“내가 그렇게 말 한 거 기억해요. 50대는 비밀스럽다는 말도요. 비밀이란 게 탐색이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엔 50대는 안정감이 있다고 느낄 수 있어요. 자식들을 다 성장시켜 사회적으로든 수입이든 안정 돼 있어서, 외형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여요. 그 나이가 되면 골프장에 나가고 해외로 여행도 가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처신을 잘했으면 존경을 받고 나무랄 데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60대는... 불안함이 앞서요. 안정 됐다는 건 ‘잘 먹고 트림 나서 기분 좋다’ 이 것일 수도 있는데, 이런 기분은 하루 중에 20~30분 잠깐 느낄 뿐 불안함을 더 많이 느껴요. ‘이건 아닐텐데. 이건 아닐텐데’ 이런 마음인거죠. 이런 마음을 없애기 위해선 뭔가에 빠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뭔가에 열중하면 불안정한 기분을 못 느껴요. 열중하기에 좋은 게 책을 읽거나, 아니면 등산을 하는 것이죠. 뭘 해도 좋겠지만 그 중에 ‘연애’가 가장 좋아요. 결혼을 해서 가정이 있건 없건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건 연애라고 봐요. 연애의 감정이 평생 안 오는 사람이 있고, 왔다 하더라도 한두 번 왔다 사라지는 사람이 있어요. 괴테처럼 늘 사랑에 빠진다면 최고죠. 어떤 사람이 좋아서 가슴 설레고, 가슴 아프고, 잘 때도 계속 생각나고, 이게 최고죠. 갈급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경험적으로 그래요.”

-같은 공연일지라도 똑같은 공연은 없다. 단적으로 보면 매번 소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인들이 불안, 소멸 이런 것에 대해 좀 더 민감한 걸 같기도 하다.
“‘불안’ 이란 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 같아요. 누구나 생의 혼란을 겪잖아요. 민감한 사람이 더 직접적으로 느끼고, 젊을수록 더 강렬하게 느끼죠. 나이를 먹으면 세상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해서, 불안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보는 데 그렇지 않아요. 보통 연극배우들은 생각을 비우려고 해요. 잡다한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어해요. 다 비워야 집중을 할 수 있으니까요. 자기를 비우는 거죠. 생각을 꽉 채우는 사람은 돈을 버는 사람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렇죠. 그래서 어찌보면 연극 배우들이 멋있는 모습만 보이는 게 아니라, 기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비우려고 하니 그러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연극 작업이 힘들겠지만 좋을 땐 언제인가
“연극 작업 하며 쾌감을 느끼는 때가 있어요. 먼저 좋은 희곡을 발견했을 때, 또 그 희곡을 읽었을 때요. 읽으면서 ‘이걸 연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첫 번째 쾌감을 느껴요. 가슴이 막 설레거든요. 배우를 캐스팅할 때 두 번째 쾌감을 느껴요. 내 머릿속에 염두해 둔 배우에게 연락하고, 그 사람이랑 대본을 보고 막 이야기할 때 쾌감을 느끼죠. 세 번째 쾌감은 그것 때문에 수입이 생겼거나, 다른 공연이 생겼을 때 와요.”

-공연이 막이 오르는 동안엔 쾌감을 못 느끼나
“공연을 하는 동안엔 없어요. 연습 초반엔 쾌감이 있어요. 그건 익숙한 쾌감이라 가슴 설렌다는 쾌감은 아니죠. 오히려 공연 끝났을 때, 쾌감을 느껴요. 연극 작업을 동굴 탐험으로 비유 하면 처음 들어갈 때 기분이 째져요. 그런데 컴컴한 곳을 막 정신없이 가야해서 힘들죠. 그러다 동굴 밖으로 나오면 ‘하나 해냈구나’ 란 생각에 쾌감을 느껴요. 그게 가장 비슷한 기분일 것 같아요.”

-한 동안 대학로를 떠나있었다. 기국서 연출이 연극을 접었다는 말까지 나오던 중 영화관에서 기 연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5년간 연극을 안 하시다시피 했어요. 연극을 접으려고 한 건 아니고, 내가 나서서 하지 않았죠. 힘들고 배신감이 들어 안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긴 해요. 5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부지런하게 플랜을 짰어요. 극단 76 단원들과 계속 어떻게 해야 하는거니 작품을 구하러 다니고, 자금도 모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어요. 그러다 힘들고 귀찮아지고, 깃발 들고 안하게 되니 연극을 놓게 된거죠. 내 직업이 연극 연출인데 접은 건 아니에요. 영화 출연도 우연히 하게 된 거지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그렇게 된 건 아니에요. 막상 해 보니 영화 작업도 재미있어요. 나에게는 새로운 작업이니까. 고생을 말도 못하게 하는데도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죠. 안하면 몸이 좀 근질거리고, 영화도 며칠 전에 찍었고, 열흘 후에 한 번 더 찍어요. 수입이 생긴다는 게 좋은거고. ”



■ “소극장이 있는 동네는 생각하는 사람이 사는 곳”

-항상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을 지녔다.
“제 눈빛이 무섭게 보이는 눈빛인가봐요. 가만히 있으면 화났냐고 물어봐요. 내가 그걸 아니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난 머릿속에 재미있는 농담을 생각하고 있는데도 ‘화났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억지로 방글방글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영화나 TV에서 비슷한 역이 들어오나 봐요.”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극장을 찾아간다.
“연극은 영화랑은 다르죠. 쾌적한 영화관이 아닌 조그마한 소극장을 찾아 간다는 게 힘들죠. 본인 자신은 그 사실을 파악하지 않겠지만요. 변덕심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일반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 가는 건 긴장감이 있어요. 내가 30년 전 삼천포 비슷한 조그만 소도시를 간 적이 있어요. 다른 동네는 어디를 가든 서울과 같이 비슷한 풍경이라 지루하고 권태로운데, 그 곳은 달랐어요. 처음엔 비슷하게 느껴졌지만요. 그러다 건널목을 보는데 미친 사람이 한명 있더라구요. 그걸 보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란 생각에 반가웠어요.

그러다 추적 추적 비가 오는 날, 배추 껍데기가 버려진 골목에서 나는 배추 썩는 냄새도 맡으며 걸어가는데, 무슨 무슨 소극장 간판이 보였어요. 그걸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야. 기가 막히다. 여기가 비로소 인간이 사는 곳이구나’ , ‘생각하는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란 기분을 갖게 했거든요. (연극하는) 내 동지의 발견이 아니라 극장의 발견, 그 기쁨이 말도 못했어요. 젊었을 때 독일 베를린에서도 경험했지만, 제가 그렇게 어디든 극장을 찾아가요. 멀기도 하고 찾기도 힘든 곳을 굳이 그렇게 찾아가요. 극장을 발견하고, 조그만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어요. 그 경험이 오래 됐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극장이 없을 것 같은 동네에서 극장을 발견하고 무지 반가웠던 적이 있다.
“어느 동네에 소극장이 있다고 하면, 그 동네가 지성적인 느낌이 들어요.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여기 모여있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연극을 보러가는 관객은 긴장감이 있어요. 누가 거기 있어서 찾아 가는 거니까요. 스토리나 연기, 흥행성 그런 걸 떠나서 느낌이 달라요. 대학로는 극장이 많아서 찾아간다는 느낌은 안 들죠. 그런데 시장 통에 극장에 있다고 생각해봐요. 빌딩이랑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강남 귀퉁이 어딘가에 소극장이 있다고 생각해봐요. 그건 감동적이잖아요.”

-훗날 소도시에 극장 하나를 짓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연극 하면서 극장 갖기는 너무 힘들어요. 최소 2~3억이 있어야 가능 하죠. 보증금만 해도 1억이 넘을텐데. (영화 작업 하면서 꾸준히 돈 모으면, 서울은 아니더라도 소도시에 극장 갖는 건 힘들까)조역으로 영화 2~3편 작업 하면, 우리 집 1년 정도 살 수 있는 액수가 돼요. 몇 억이 아니라 300만원 월급쟁이들 돈이죠. 극장을 마련하기엔 적은 돈이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도 계속 글을 쓰고 있나
“남은 생애 동안 작품 하나는 써야죠. 명작을 하나 쓰고 싶죠. 글을 쓴다는 건 어려워요. ‘내가 게으르다’ 그 생각을 해요. 게으르니까 몸 관리를 위해 이렇게 노력을 안 하고, 내 평생의 역작을 위해서 노력을 하는 그런 게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대신 이런 건 하고 싶어요. 중앙아시아를 몇 달간 터벅터벅 걸어가고 싶어요. 관광지 여행이 아니라 정말 배낭 여행을 하는거죠. 고생하는 여행이겠지만, 걸어서 사막도 막 가고 싶어요. 그걸 실천하려면 훈련도 해야 하고, 돈도 모으는 노력을 해야 하는 데 안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면 참 게으른 인생인 것 같아. 나는 일을 하게 되면 그냥 대가리를 박아요. 온 몸을 그 쪽으로 다 쏟아요. 그 외엔 애 쓰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희한하죠. 직장을 다니면 플랜을 짜고 좀 더 규칙적이었을 것도 같아요. 자유업이다 보니, 플랜을 짜는 건 일 밖에 없어요. 이후에 연출 할 일이 두개 쯤 남아있어요, 하나는 직접 만들어야 하고, 하나는 코미디작품이구요.”

기국서 연출가에게 인터뷰 기념으로 사인을 요구하자, ‘연애를 하세요’라는 문장을 써주었다. 최근 받은 사인 중 가장 인상적인 멘트였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연애 권하는 사회인가요(웃음) <나이든 남자가 꼭 해야 될 10가지>이런 비슷한 책을 보면, ‘나이 어린 여자와 친구하기’란 말이 나와요. 어린 여자와 사랑을 하거나 사귄다는 게 아니라 친구가 되라는거죠. (나이 차를 건너뛰고)친구 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어린 소녀랑 친구가 됐다는 건 무한한 행운일 것 같아요. 감성적인 것 이전에 현실은 접근도 못하지만요. 젊은이들이 바로 도망가거나, ‘무슨 수작을 하려고 이러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무 할 말이 없어져요. 그래도 ‘연애를 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어요. 뭔가에 열정적으로 빠지는 건 좋은 것 같아요.”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극단76, 이다엔터테인먼트]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