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결여’ 김수현 작가가 흠뻑 취한 캐릭터 비틀기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흐물흐물했던 반죽이 한창 쫄깃쫄깃해지는 중이다. 드라마 초반 큰 비중을 차지했건만 젊은 세대에 대한 표피적인 관찰 탓에 굵은 재미 잔재미 모두 놓쳤던 오현수(엄지원), 안광모(조한선), 박주하(서영희) 에피소드를 줄여나간 덕이 크다. 거기에 재벌가 며느리로 입성한 오은수(이지아)의 두 번째 결혼이 남편 준구(하석진)의 불륜과 거짓말로 산산조각 나는 풍경이 적나라하게 그려지면서 드라마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물론 주연을 맡은 배우 이지아가 기대 이상으로 은수의 감정이 보여주는 진폭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도 크다.

하지만 <세결여>의 진짜 재미는 역시 은수 현수 자매가 아닌 은수의 전남편인 정태원(송창의) 집안 쪽이다. 특이하게도 김수현 작가는 <세결여>에서 은수의 친정, 은수의 현재 시댁, 은수의 과거 시댁을 각각 다른 방식의 드라마로 풀어나가는 듯하다. 은수의 현 시댁은 전형적인 김수현 식의 여성 드라마(그 예로 ‘불꽃’이나 ‘완전한 사랑’을 들 수 있겠다)다. 은수의 친정은 이상적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장하는 <부모님 전상서>와 같은 전형적인 김수현 식 홈드라마의 형식이다. 반면 은수의 과거 시댁인 정태원의 집안은 상당히 괴랄(괴상하면서도 기이하다는 뜻의 속어)하다.

뭐랄까, 태원의 집안을 묘사하는 작가 김수현은 그 동안 자신이 공들여 쌓아온 인물들의 원형을 비트는 재미에 흠뻑 취한 것 같다. 어떤 부분은 희극적으로, 또 어떤 부분은 비극적으로 말이다.

<세결여>에서 정태원의 집안은 아버지가 없는 모친 중심의 집안이다. 더구나 이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최여사(김용림)는 과거 김수현의 80년대 대표작 <사랑과 야망>의 어머니처럼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이끈 억척어멈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긴 세월을 아우르는 <사랑과 야망>에서의 억척어멈은 모든 이들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세결여>에서의 억척어멈은 모든 속물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시어머니로 묘사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랑과 야망>에서의 태준 어머니 역시 속물적인 어머니였던 것 아니었을까? 두 어머니 모두 어떻게든 가족의 생계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간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사랑과 야망>의 시대에는 미덕으로 보이던 악착이 <세결여>의 시대에는 속물로 비춰진다.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돈을 모아야하는 시절이었고 지금은 돈이 바탕이 된 시대라는 점이다. 물론 작가가 비슷한 성격의 인물을 희극적으로 비튼 까닭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편 김용림의 옆에서 늘 구시렁대는 가사도우미 임실댁(허진) 역시 그 원류는 <사랑과 야망>에서 남능미가 연기했던 파주댁에 있다. 하지만 구박덩이여도 가족들에게 한 식구처럼 여겨졌던 파주댁과 달리 임실댁은 집안에서 언제나 남으로 여겨진다. 그녀가 태원의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 까닭은 ‘정’ 때문이 아니라 ‘음식솜씨’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태원의 어머니는 임실댁을 눈엣가시로 여기면서도 내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원의 가족과 거리를 두면서 임실댁은 ‘관찰자’라는 독특한 권리가 생겨난다. 임실댁은 이 집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지점들을 콕 집어 구시렁구시렁 논평한다. 그 결과 시청자들은 이 임실댁의 시선으로 정태원의 집안을 비웃거나 또는 끌끌끌 혀를 차며 관찰할 수 있다.



태원의 누나인 정태희(김정난) 역시 김수현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능력 있고 똑똑하고 말 잘하지만 시집은 안 가려하는 맏딸의 유형이다. 하지만 태희는 그런 인물에서 똑똑하고 말은 잘하나 능력은 쏙 뺀 ‘백수’다. 허나 드라마에 등장할 때 늘 눈치만 보는 다른 드라마들의 백수와 달리 태희는 당당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배부른 년’이라 오히려 시청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한편 이렇게 희극적으로 비튼 인물 외에 작가가 비극적으로 더 비튼 인물로는 태원과 태원과 은수의 딸인 슬기(김지영)가 있다. 태원은 김수현 드라마에 등장하는 효자의 모습, 슬기는 <배반의 장미>의 민지(최형선)나 그 이후의 다른 드라마에서도 등장하는 똑똑한 어린이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두 인물은 <세결여>에서 식상하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상당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시대에 흔해진 ‘이혼’이라는 과정 속에서 평범한 인물들이 어떻게 상처받는지를 이 두 인물이 섬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원의 가정에 뜬금없이 끼어든 문제의 인물 채린(손여은)이 있다. 채린은 김수현 식의 드라마에서 그간 찾아보기 힘들었던 유형이다. 채린은 사실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에 등장할 법한 그 성격부터가 워낙 ‘괴랄’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유형의 인물이다. 임성한 작가의 특기는 바로 이 황당한 성격파탄 같은 인물을 너무나 쉽게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볼 때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런데 <세결여>로 건너온 이 황당한 악녀 채린을 작가 김수현은 날것으로 툭 던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악녀에게 늘 악녀의 논리를 만들어 주는 작가가 김수현이었으니까.



보통 김수현 드라마의 악녀들은 자기연민에 가득 차 있고 감정이 뜨겁고 절절하다(감정이 너무 뜨거워서 머리까지 늘 그렇게 보글보글 볶아놓는 걸까?). 그 뜨거운 감정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세결여>의 다미(장희진)가 김수현표 악녀로 보이면서 동시에 촌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채린은 다르다. 채린은 뜨거워서 악녀가 아니라 자기가 악녀인줄 몰라 황당한 악녀다. 타인의 인생을 파괴하려는 악녀가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이해 못하는 악녀다. 어른의 외피를 입었으나 내면은 모두 자기중심인 어린아이 그대로라 악녀다. 더구나 이런 채린을 해석하는 손여은의 연기 역시 신선하다. 김수현의 복잡한 대사를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특유의 표정과 말투로 가지고 놀 줄 안다.

그간 <세결여>에서 작가 김수현은 왜 채린이란 황당한 악녀가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 내내 그 밑밥을 깔아놓았다. 그래서 겉보기엔 지극히 모범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이 인물의 내면이 얼마나 헝클어졌는지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시청자들은 짐작이 가능해진다. “벌거벗겨 내쫓는다”라거나 발레를 배우겠다는 아이에게 “팔다리가 짧아서 안 되겠다”라거나 아이의 말을 무조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점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채린의 유년시절이 얼마나 황폐했을지 시청자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슬기를 때리는 모습을 임실댁에게 들키자 우선 돈뭉치부터 챙겨들고 임실댁에게 달려가 쥐어주는 장면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돈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세계에서 태어난 인간의 공허하고 텅 빈 모습, 어쩌면 그게 바로 채린인 것 같아서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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