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단 가무극 ‘소서노’,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다.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대한민국 최초로 두 개의 하늘을 연 여왕의 이야기를 다룬 서울예술단 가무극 <소서노>(이희준 작가, 김길려 작곡가, 정혜진 연출)가 지난 2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개막했다. 이번 작품은 남편 주몽의 건국으로 기억되는 고구려, 아들 온조의 기억으로 기록된 백제를 태동시킨 실질적인 여왕은 ‘소서노’ 였다는 데 착안한 팩션(Fact+Fiction) 뮤지컬이다. 고구려와 백제 이렇게 두 나라를 건립할 수 있었던 여제의 내공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

한 줄 평을 하자면, 웅장한 고구려 시대 속에 감춰진 여인 ‘소서노’의 상생의 미덕이 살아있는 공연이었다. 피를 부르는 강력한 군주를 꿈꾸기 보다는 지도자에겐 관용과 사랑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졸본 부여의 왕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왕의 동생 연무발의 음모로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물의 신령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숲 속에서 자란다.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 도망친 청년 주몽과 친구들(오이 마리 협보)는 숲에서 만난 소서노의 도움으로 커다란 강 엄시수를 건너게 된다.

16년 전, ‘물의 영웅이었던 아이가 생명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신탁에 안절부절 못했던 연무발은 거침없이 야욕의 칼을 휘둘러 왕의 자리가 코앞에 왔지만 다시 한 번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다. 왕위계승자를 뽑기 위한 검투대회가 열리고 열 여섯 살 소서노가 최종 우승자로 결정됐지만 자유롭게 떠나 버리고 만 것. 영원히 2인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연무발은 졸본의 모든 열 여섯 소녀를 잡아들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가무극 <소서노>를 크게 보자면, 1막은 판타지적인 영웅의 시대, 2막은 인물 중심의 역사 시대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1막은 연무말과 소서노의 대립을 그린다면, 2막은 소서노와 주몽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연무발과 주몽 모두는 뻗어나가는 불 같은 세력을 지닌 인물이고 소서노는 안으로 감싸 안는 물의 기질을 지닌 인물이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들의 마음이 담긴 넘버 ‘꿈’이 작품의 핵심을 보여준다.



서울예술단과 천안문화재단이 공동 제작하는 이번 공연은 같은 나라 안에서 상반된 꿈을 꾸는 두 개의 태양을 비추고 있다. 1막에선 연무발의 불의 힘, 2막에선 주몽의 불의 힘이 소서노의 물의 힘과 부딪치고 있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강력한 군주를 꿈꾼 주몽은 자신의 불꽃이 소서를 만나서 점점 작아지고 꺼지려고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물의 영웅 소서노는 자신의 꿈이 흩어져가는 것을 보며 새로운 지혜를 끌어낸다.

‘소서노’는 배신과 음모의 시대에 평화와 공존, 양보와 이해의 가치를 보여주었던 여왕으로 그려진다. 2막에서 현명하게 비류국과 화친을 이끌어내는 소서노와 승전깃발을 올리며 정복전쟁을 계속 할 것을 주장하는 주몽의 세계관이 명확히 대비되며 이 작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뭔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한편, 정복전쟁보다는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볼 것을 이야기하는 소서노 앞에 나타난 이는 ‘바보 같은 전쟁 바보 같은 세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어린 소년 유리이다. 이번 작품에서 유리는 어린아이의 리더로써 세상을 바로 잡고 싶어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비 없는 세상, 진짜 왕이 없는 세상에 불만 있는 유리를 눈여겨 본 소서노는 그가 주몽을 보필 할 수 있는 적자라고 생각한 것. 주몽의 자손인 유리 역시 물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만 유리는 아비와 달리 용감히 엄시수의 강을 건넜다. 그렇게 유리는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됐다. 소서노의 뜻 깊은 비밀은 마지막에 가서 밝혀진다.

<소서노>는 놀랍도록 새로운 건국신화를 써내려갔다. ‘대의를 위한 양보’라는 미덕을 갖춘 영웅이 어떻게 기억되고 완성되는지는 극장에 직접 가서 만나봐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더 단순히 타이틀 롤인 소서노만을 치켜세운 것이 아닌 점 역시 설득력을 지닌다. 1막에서 악의 화신 연무발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이는 나이는 어리지만 현명한 리더 유리임이 그 증거다.



이번 작품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1막과 2막 사이 내용의 점핑을 관객들이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느냐 하는 점 때문이다. 창작극의 특성상 계속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점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이야기 전개가 친절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분명 있지만 서울예술단의 땀방울이 제대로 느껴졌다는 점에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울예술단 정혜진 예술감독의 첫 연출 작품이다. 영화적인 기법을 사용해 판타지적인 무대를 구현한 점, 검투, 군사훈련, 추격, 전쟁 장면의 조직화된 역동적인 군무, 그 사이사이에 신비로운 비주얼의 움직임, 생기 넘치는 아역들의 등장은 믿고 보는 서울예술단의 작품에 힘을 싣는다.

청아한 음색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호평 받은 배우 조정은 타이틀 롤을 제대로 해 내고 있다. 깊은 눈물 안에 담아낸 포용력과 고민은 설득력을 지니게 했다. 주몽 역 배우 박영수는 소년 같은 모습의 1막과 권력을 탐하는 2막의 모습을 달리하며 주몽의 내면에 한 발짝 다가가게 만들었다.

주 조역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특히 배우 이시후와 김백현 조풍래 최정수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순수함이 가득했던 <박연>과는 180도 달라진 범접하기 힘든 모습으로 등장해 연무발의 야욕, 폭정을 히스테릭하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담아 낸 배우 이시후가 1막 전반의 비주얼을 책임진다면, 1막 후반은 주몽과 함께 하는 세 명의 검객 오이 마리 협보 역을 맡은 배우 김백현 조풍래 최정수의 즐거운 에너지가 객석에 전달된다. 지혜를 꽃피우는 검객 오이 마리 협보는 연무발이 소서노를 잡아들이기 위해 선포한 '열 여섯 소녀들의 죽음'을 호기롭게 막는 젊은이들로 등장한다. 유리 역 배우 김도빈, 비류 역 김혜원의 똘망 똘망한 기운, 신령족장 고미경의 카랑카랑한 보이스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소서노>는 3월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 이후 4월 5일부터 4월 12일까지는 천안예술의전당 대 공연장으로 무대를 옮겨 공연을 이어간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허영옥, 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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