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매력적인 악역 박영규 우연이 아니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그 해 가을에 배우 박영규는 태어났다. 그 시절에 태어난 아이들을 떠올리면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솟아오른 새싹 같은 것이 함께 떠오른다. 낡고 헤진 옷차림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아이들을 찍은 흑백사진 것들 말이다. 어쩌면 그 사진 속 까까머리 아이의 미소 짓는 입가와 눈가에 세월의 주름이 잡힌다면 우리가 인터뷰 사진에서 종종 보게 되는 박영규의 잘생긴 미소가 겹쳐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배우 박영규의 얼굴은 단순히 잘생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물론 가난과 박영규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는 했나 보다. 1985년 박영규가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진출하면서 가진 ‘TV가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그가 품은 희망은 해맑게도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15살에 신문을 돌리다가 불독에게 물린 뒤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학교 담임선생님이 그를 위로해준 말인 “넌 훌륭해질 거라고 선생님은 믿는다.”였다면서. 그 이후 박영규는 성악가를 꿈꿨으나 경제적 사정 때문에 포기하고 술집 웨이터, 책 외판원 등의 생활을 하다 서울예전에 입학해 배우의 꿈을 키운다. 이후 대학로의 유명 연출가인 오태석 밑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소극장에서 13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간다.

그런데 드라마에 진출했을 당시 박영규의 이미지는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순풍 산부인과>의 버벅대는 박영규는 아니었다. 드라마에 진출하기 전 지금은 EBS가 된 KBS3의 교양프로 <취미생활>의 진행을 맡았다는 걸 보면 그의 첫 이미지는 원숙하고 진지한 남자가 아니었을까 한다. 현재 KBS 사극 <정도전>에서 그가 연기한 이인임처럼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캐릭터 말이다.

그가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MBC의 사극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로 당시의 톱 여배우 이미숙의 상대역 이서방이었다. 이서방은 차별이 심하던 봉건사회의 중인 출신 인물로 여주인공을 사랑하고 그녀를 한결같이 기다리는 지고지순하면서도 묵묵한 사내다. 당시 이 드라마의 연출자는 드라마 출연은 <베스트 극장> 한 편이 전부였던 박영규를 캐스팅한 까닭에 대해 “식상하지 않은 새 얼굴, 준수한 외모, 가슴으로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선한 인물을 찾다가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이후 1989년 ‘TV가이드’에서 베스트드레서로 선정된 박영규는 MBC 주말연속극 <내일 잊으리>의 중간에 김희애의 상대역으로 투입된다. 당시 <내일 잊으리>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노총각이자 밤무대 업소의 대부이며 주먹세계의 두목 배동준이다. 그 해 1월에 실린 ‘TV가이드 스타100문100답’을 보면 거칠지만 때론 신사적이고 인자한 이 중년의 멋쟁이에 시청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박영규조차 홀딱 빠진 듯하다.

또한 ‘스타100문 100답’에서는 브라운관 바깥에서 활동하는 카멜레온 같은 박영규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몇 가지 등장한다. 우선 그가 현재 오태석의 극단 <목화>의 운영자이며 장래에 <목화>의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소극장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본인의 밤무대 가수 활동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당시 그는 그랜저를 끌고 다니며 그가 출연하는 업소마다 쫓아오는 여성팬이 있을 만큼 인기 있는 밤무대 스타였다. 또한 앞으로 이브 몽땅이나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노래하면서 연기도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해 여름 박영규의 목소리가 담긴 앨범이 발매된다. 그 앨범의 타이틀곡은 <순풍 산부인과> 전까지 박영규 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노래 <카멜레온>이었다. 사실 이 느끼하고, 코믹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사랑 노래 <카멜레온>은 박영규가 아니면 소화할 수 없는 노래였다. 당시의 트로트 스타인 현철이 불러도, 빅스타 조용필이 불러도, 몇 년 후 장발의 미남 록스타로 비주얼 쇼크를 주며 혜성같이 등장한 신성우가 불러도 박영규의 기름지면서 멋진 저음이 보여주는 매력을 살릴 수는 없는 곡이니 말이다.



이후 멋진 신사에서 다소 코믹하고 느끼한 신사 이미지가 더해진 박영규는 98년 자신의 연기 인생을 뒤집는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 출연한다. 앞머리를 힘없이 내리고 등장한 카멜레온 박영규는 더 이상 예전의 베스트드레서 ‘한국신사’가 아니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IMF 이후 힘을 잃은 우리들의 아빠, 하지만 주책맞고 때로는 좀스러워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 사랑스러운 아빠를 연기한다. 그 후 99년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도 이어진 그의 코믹연기는 박영규를 어느새 멜로배우가 아닌 코믹한 배우로 인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2014년 박영규가 KBS 사극 <정도전>에서 연기하는 수구파이자 능수능란한 구렁이 같은 정치가 이인임은 그간에 보여준 모습과는 또 다르다. 물론 몇 편의 사극에서 박영규는 진중한 역할을 연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이인임은 박영규가 단순한 악역에 그칠 수 있는 이 인물을 작가의 대사를 통해 얼마나 잘 해석하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역이다.

그래서 이인임은 전형적인 사극 톤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지만 박영규의 진중한 저음의 목소리를 통해 평범한 악역이 아닌 정치적인 식견을 가진 현대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또한 과거의 그가 보여준 방정맞은 코믹 연기가 아닌 무게감 있고 진중한 표정과 눈빛으로 80년대의 박영규나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규의 색깔을 모두 지워버린다. 드라마에 데뷔한 지 30여 년 만에 박영규는 카멜레온처럼 그렇게 또 한 번 변신에 성공한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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