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정’, 중국 공산당에 대한 착잡한 비웃음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지아 장커의 영화들은 솔직히 좀 지긋지긋하다. 피하고 싶다. 그는 늘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이면, 그 숨막히는 그늘의 현실을 말한다. 지아 장커는 말한다. 중국이 세계 2대 강국이라고? 흥! 그게 뭐 어떻다는 얘기인가. 허울좋은 인민의 세상. 중국에서는 지금 돈에 죽고 돈에 사는 황금만능주의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심화되고 있는 계급 계층의 양극화, 매춘과 마약이 판치는 갱스터의 세계가 퍼져 가고 있다고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영화적 소재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중국의 현실이, 아니 전 세계의 현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아 장커는 늘 세상의 진실을 얘기한다. 다만, 우리는 종종 그런 뼈아픈 진실이 싫은 것이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 한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늘 대중적이지 못한 것, 장르적이지 않은 것, 상업영화의 드라마 틀을 지니지 않은 것, 그 때문에 국내에서 상영되더라도 아주 적은 스크린 수에서 개봉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아 장커의 가장 최근작인 <천주정>은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이야기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피와 살이 튀긴다. 그래서 흥미롭고 역설적으로 재미있기까지 하다. 물론 어둡고 사회고발적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에 서있는 작품이다. 그걸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지아장커가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같은 음울한 하드 보일드 스타일을 차용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2시간10분의 러닝 타임을 채우는 등장인물은 모두 4명이다. 탄광 개발을 둘러싸고 그 이권을 나눠 갖지 못해 늘 불만이 가득한 인물로 살아가는 따하이(강무)가 있고, 중국 전역을 떠돌며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가는 조우산(왕보강)과 함께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퇴폐 안마시술소에 카운터에서 일하는 샤오이(자오 타오), 10대의 어린 나이지만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롤플레이 섹스 숍에서 돈을 버는 샤오후이(나람산) 등이 이야기를 옴니버스 식으로 채워 나간다.



이들의 삶은 비록 씨줄낱줄로 얽혀 있지는 않지만 바야흐로 한 통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중이다. 따하이는 결국 같은 고향 출신임에도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대기업 사장을 포함해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묻지마 살인극을 벌이고, 어린 청년 샤오후이는 섹스 숍에서 마음에 둔 여인에게서 실연을 당한 후 대기업 공장에 취직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따하이가 죽인 사장의 회사라는 식이다.

중국식 자본주의는 현재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폭력, 그것이 자본의 폭력이든 아니면 물리적 폭력이든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사실 모든 물리적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의 폭력이라는 전제 때문에 비롯됐다는 것을 영화는 새삼 깨닫게 만든다.

실제로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샤오이가 두 명의 남자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당하는 장면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이 어느 정도까지 저급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는 지를 보여 준다. 남자들은 돈 다발로 샤오이의 뺨과 머리를 계속해서 때리며 이렇게 말한다. “이래도 몸을 안 팔아? 이래도?! 이래도?! 야 이 XX년아 이래도?!” 샤오이는, 자신은 카운터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 마사지를 하는 여성이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남자들은 오히려 그 차이가 뭐냐고 되물을 뿐이다. 샤오이는 결국 자신을 때리는 남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모든 것은 존엄에 대한 문제다. 어린 10대의 샤오후이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을 고향에 몽땅 송금함에도 불구하고 걸려오는 엄마 전화는 네가 도시에서 일한답시고 돈을 흥청망청 써대니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불만과 의심의 얘기일 뿐이다. 샤오후이가 기숙사에 앉아 자신의 바래고 낡은 옷을 꿰매다 불현듯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도 삶의 행적이 너무도 고달퍼서라기 보다는 아무도 이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좌절과 절망감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더 나이를 먹는다 해더라도 삶은 막다른 골목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자각한다. 그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샤오후이는 룸살롱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만 그녀는 그의 순수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사오후이에게 얘기한다. “업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해.” 실제로 이후 그는 그녀가 때로는 간호복을 입고, 혹은 역무원 옷을 입고 남자에게 성 접대를 하는 모습을 바라 보며 자신은 술 서비스를 해야 하는 처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가 돈은 좀 덜 벌더라도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공장에 취직한 것은 그 때문이고 그래서 고향에 돈을 덜 보낼 수 밖에 없어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샤오후이는 어린 나이지만 자존을 지키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비극적인 결말로 그를 치닫게 만든 꼴이 됐다.

롤 플레이 전문 룸살롱에서 여인들이 그룹으로 나와 남자들에게 ‘간택’되기 전 로비에서 행진을 하는 모습이 역설의 구토를 느끼게 한다. 그때 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공산당 복을 숏 스커트로 개조한 듯한 의상이다. 여자들은 인민군 식의 부츠를 신고 행진을 하고 비슷한 모습으로 남자들에게 거수경례를 붙이기도 한다. 중국 공산당, 아니 세계 공산당, 더 나아가 이른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매춘의 수준으로 전락했음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 정부에 대한 지아 장커의 비웃음은 이쯤 되면 최고조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게 통쾌하기 보다는 왠지 착잡하고 슬퍼진다. 우리가 과연 여기까지 왔는가. 진실로 이 지경까지 왔는가에 대해 통렬한 아픔이 느껴진다.



지아 장커의 <천주정>은 지난 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주목을 끌었지만 일반 극장 상영까지는 거의 반년 이상이 소요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가 끌어내는 세상의 진실에 대해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핏빛 어린 폭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돼 고통의 신음을 터뜨리고 있다 한들, 그게 내 자신의 일이 아닌 한 굳이 잘잘못의 근원을 탐색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아 장커는 지금의 세상에 있어 거꾸로 괴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하긴 그는 로우 예, 왕 샤오슈아이 등과 함께 중국 지하전영(地下電影)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영웅> 등을 만들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총연출을 맡았던 장 이모우 감독처럼 중국 공산당 체제에 백기를 들지 않고 여전히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것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윤색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하지만 이번 영화 <천주정>은 상업영화적이고 장르적인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일단 먼저 대중 관객과 영화를 두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대중들이 더 많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나서야 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해 얘기와 토론이 가능한 것 아니냐는 깨달음이 엿보인다. 그래도 지아 장커는 지아 장커다. 지아 장커처럼 종종 어두운 세계관을 공유하고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는 지금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하다고 얘기하는 영화는 거짓이다. 때론 그 점을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아 장커의 <천주정>을 통해 자신들이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가를 확인해 보시라. 비록 어둡고 쓸쓸해지게 될지언정.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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