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근대4] 일본 번역혁명의 기반은 출판시장이었다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일본은 어떻게 중화적인 세계관을 타파했을까[번역과 근대3]에서 계속) 일본은 서양에 대해 극히 제한적으로 문을 열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1603~1868년) 초기부터 서양과의 통상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다만 남만(南蠻)과 한 패가 아니라고 여긴 네덜란드에는 우호적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포교에 의욕적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남쪽의 오랑캐’라는 뜻인 남만이라고 일컬었다.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 상관이 1607년 설치됐다. 막부는 1641년에 나가사키 데지마의 남만인을 쫓아내고 네덜란드 상관을 그리 옮기도록 한다. 데지마는 막부가 서양 문물을 들여오되 유입을 통제할 창구로 조성한 인공 섬이다. 이후 매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배가 들어왔고 네덜란드 의사들이 와서 외과술을 전파했다.

네덜란드 서적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급은 엄격히 규제됐다. <난학의 세계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이야기>라는 책이 네덜란드 알파벳 25글자를 본문에 넣었다가 문제가 돼 절판됐을 정도였다. 이런 규제는 18세기 중반에도 이어졌다.

따라서 사실상 최초의 네덜란드 책 번역본인 <해체신서>를 내는 일은 모험이었다. 스기타 겐파쿠와 동지들은 유학자들에게서 이단으로 낙인 찍힐 소지나 막부체제의 질서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꼬투리를 만들지 않으려 고심한다. 이들은 그래서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한 <해체신서> 전체를 한자로 표기한다. 네덜란드 알파벳은 한 글자도 넣지 않는다. 또 책 전체를 세로쓰기로 편집한다.

이들은 그러나 <헤체신서>를 내기 1년 전인 1773년에 책을 홍보하는 전단지인 <해체약도>를 만들어 배포한다. 금기에 도전한다고 여겨질지 모를 책을 조심스럽게 준비하면서도 홍보에 나서는 이중적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일본에는 출판시장이 상당한 규모로 형성돼 있었다.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의 출판은 통제됐지만, 일단 이 관문을 통과하면 괜찮은 서적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들은 <해체신서>가 금서로 낙인 찍히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동시에 그 경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에도 신경을 쓴 것이다. 책이 많이 팔려야 번역에 기울인 노력을 보상받으면서 서양의학의 기초를 널리 알린다는 목표도 이룰 수 있다.

<일본기술의 변천>에 따르면 16세기 후반까지 중국 고전을 내거나 종교서적을 출판하는 데 한정됐던 일본 출판은 17세기부터 활성화됐다. 서정적인 소설에서부터 풍자에 이르기까지, 시에서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세속적인 서적이 유통됐다. 이 책은 출판시장이 발달한 요인을 “상인계층의 새로운 부가 형성되면서”라고 분석한다. 상업이 발달하고 상공인 계층이 두터워지면서 귀족과 관료 등 상류층 외에 책을 사서 볼 독자가 많아졌다는 얘기다.

<일본기술의 변천>은 “이동식 인쇄기법이 이용되기도 했지만 목판인쇄가 일반적으로 선호됐다”고 전한다. 목판인쇄와 비교되는 이동식 인쇄기법이 활자로 판을 짜고 그 위에 먹을 칠해 종이에 찍어내는 활판인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일본에 구텐베르크 활판인쇄기가 1590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난학의 세계사>는 예수회 주선으로 로마에 가서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온 덴쇼소년사절단이 근대적 세계지도와 함께 구텐베르크 활판인쇄기를 가져왔다고 전한다. 활판인쇄가 언제 일본에서 활용됐는지는 추가로 확인해야 할 사항이되, 일본이 외부 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1600년대에는 활판인쇄가 자리잡았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일본이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조선의 금속활자와 전적(典籍)을 밑천 삼아 도쿠가와 막부 이후 출판업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본기술의 변천>과 <난학의 세계사>가 전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조선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본 출판시장의 밑바탕이라기보다는 참고 자료가 됐지 싶다.



일본 대도시에는 수입된 중국 헌책을 파는 서적상과 서점이 생겨났다. 상업적인 도서관도 문을 열었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줬다. <해체신서>가 출판된 지 30여년 뒤인 19세기 초 에도에는 사설도서관이 600여개, 오사카에는 300여개 성업했다.

일본 출판시장의 규모는 1866년 간행된 <서양사정>의 판매부수에서 가늠할 수 있다. 이 책을 쓴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사정> “초판 발행 부수가 15만부를 밑돌지 않았다”고 <전집>에서 회고했다. 그는 “교토 일대에서 나돌던 불법 복제판까지 합할 경우 20만~25만부가 팔렸음에 틀림 없다”고 추정했다. (가와무라 신지, 후쿠자와 유키치, 다락원)

조선은 어땠나 비교해야 한다. 조선에는 놀랍게도 서점이 없었다. 중국에서 송나라 때 이미 민간 출판사와 서점이 존재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때 출판사와 서점이 급증한 것과 비교하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조선시대 지방의 소장 사림세력이 서점을 설립해 책을 쉽게 구입해 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건의는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서점이 없었다는 것은 출판시장이 없었다는 뜻이다. 책을 구하는 일도, 펴내는 일도, 모두 돈이 많이 들었고 돈을 내거나 댈 용의가 있어도 여의치 않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책을 왕으로부터 하사받기도 하고, 없는 책은 빌려서 베끼고, 지방 고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의 목판으로 책을 찍어 달라 하거나,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북경에서 책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책을 마련했다. 기존에 나온 고전도 새로 찍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논어>나 <중용>의 가격이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따르면 영조 때 인쇄돼 보급된 <대학>과 <중용>은 각각 178면, 294면으로 그리 두껍지 않다. 이 책의 값은 그러나 각각 면포 서너 필에 해당했다. 면포 또는 광목 서너 필은 요즘 화폐로 얼마 정도 할까. 광목이 요즘도 비교 가능한 다른 품목과 어떤 비율로 교환됐는지 알면 환산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현금 역할을 한 쌀과의 교환 비율을 찾으면 된다. 1955년 신문기사를 보면 쌀 한 가마(80㎏) 도매가가 1만3000환이고 광목 한 필이 6200환이다. (경향신문, 추석 후 제 물가 동향, 1955.10.4.) 광목 두 필을 사려면 대략 쌀 한 가마 값을 치러야 했다는 얘기다. 면포 서너 필은 최고 쌀 두 가마의 값에 해당했다. 요즘 쌀 한 가마 시세를 17만원이라고 하고 이 시세를 조선시대에 적용하면 책 한 권 가격이 34만원이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상대적인 가격체계 속에서 책 한 권 값은 이보다 훨씬 비쌌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당시 다른 상품과 비교한 쌀 한 가마의 가격이 요즘 쌀 한 가마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재 널리 읽히는 <대학> <중용> 합본 중 하나는 번역문과 원문을 합쳐 246면인데 값은 7500원이다.

기존에 있는 책이 이렇게 비쌌으니 새 책을 간행하거나 다른 사람이 저술한 신간을 구해 읽는 일은 얼마나 돈이 많이 들고 어려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책을 빌려서 베끼곤 했다는 사실이 당시 실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은 출판을 독점해 체제를 유지하고 통치이념을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데 썼다. <조선출판주식회사>에 따르면 조선은 나라가 책을 출판해 보급하는 업무를 주관했다. 조정은 어떤 책을 얼마나 간행할지, 어디서 출판할지 결정해 중앙 관청이나 지방 감영에 그 일을 부과했다. 충성과 효도 같은 유교 윤리를 가르치는 책은 대대적으로 간행해 배포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종 때는 <삼강행실도>를 한번에 2940질이나 펴냈다.

아울러 조선은 간혹 유교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 수 있는 내용의 책이 발견되면 곧바로 책을 거둬들이고 유통을 금지시켰다.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이처럼 출판을 나라에서 틀어쥐고 주도했다. 조정에서 공급하는 도서와 백성이 읽고자 하는 책에는 목록의 차이와 수량의 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서점은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 “서적 인쇄를 국가가 독점한 것이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서적공급량을 확대하는 데도 장애물이 됐다”고 설명한다. 서점이 생겨났어도 사농공상의 순서에서 상업을 가장 천하게 여긴 조선에서 도서가 활발히 유통되고 출판시장이 커졌을지는 의문이지만, 하여간 조선은 서점조차 생겨나지 않아 지식 확산과 축적의 숨통이 막힌 나라였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등 대표적인 실학자의 저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쇄됐다.



이종찬은 <난학의 세계사>에서 조선 실학과 일본 난학을 비교해 실학의 한계를 보여준다. 난학은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 서양의 의술과 군사학을 직접 접하고 번역하며 발전시킨 반면 조선 실학은 사대부가 한문을 통해 옮겨진 천문학과 역학 등을 간접적으로 익힌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또 일본에서 출판시장이 발달한 반면 조선에는 출판시장이 없었음을 대비시킨다.

이 가운데 출판시장의 존재 여부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출판되지 않은 책은 쓰이지 않은 책이나 다름없다. 실학은 같은 뜻을 품은 학자들 사이에 알음알음으로 필사본으로 전해졌을 뿐, 사상적인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학은 후세 역사가들이 당대에 갖지 못했던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실은 확산되고 축적되지 않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연구였다. 작은 냇물로 시작했지만 막부체제를 무너뜨리는 강한 물줄기로 불어난 난학과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는 실학자의 연구와 저술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그들의 뜻과 노력이 왜 실질로 이어지지 않았는지, 그 지점까지 함께 논의해야만 실학자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실학자들이 난학자들처럼 변화의 지적인 토대를 만들지 못한 것은 사대부가 주도해서이거나 실질을 담지 못해서가 아니라 출판시장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 컸다.

우리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활용했지만 정작 출판문화는 갖지 못했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 ‘세계 최초 금속활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의 전파와 유통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서양의 근대화를 견인했던 것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중략) 그렇다면 금속활자를 만든 고려와 그 활자를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한 조선을 구텐베르크의 시대와 동치시킬 수 있을까? 금속활자의 궁극적 의미가 활자의 재질이 금속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영향력에 있다고 한다면, 양자는 결코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지 않았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독서인구 증가, 지식의 해방, 지식의 값싼 공급과는 상관성이 희박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일본은 지식을 전파할 인쇄술과 출판시장을 발달시킨 상태였다. 그 토대가 있었기에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한 <해체신서>라는 근대의 불씨가 불길로 번져나갈 수 있었다.([번역과 근대5]에 계속)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smitten@naver.com

[사진=휴머니스트, 알마, 천년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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