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근대5] 점점 벌어진 조선과 일본의 격차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놀랍게도,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번역과 근대4]에서 계속) 1613년 발간된 허준의 <동의보감>은 사대부는 물론이고 실학자에게도 갖춰야 할 책이 됐다. <동의보감>은 <경국대전> <상례비요> <삼운성휘>와 함께 ‘사대 서목(四大 書目)’이 됐다.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일지사, 2000) <상례비요>는 1648년에 간행된 상례 지침서고 <삼운성휘>는 1751년에 나온 운서(韻書)다.

허준은 <동의보감>에 인체 해부도인 ‘신형장부도’를 그렸다. 이 해부도에는 팔과 다리가 없다. 인체를 절개해 내부를 보고 그린 해부도가 아니라 관념 속의 장기(臟器) 배치도다.

당시 인체에 대한 일본의 지식도 <동의보감>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스기타 겐파쿠가 1774년 <해체신서>를 번역해 출판하면서 일본은 실제와 따로 놀던 과거의 의학과 결별한다. 이 상징적이자 실질적인 계기 이후 일본은 과거와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1866년 <서양사정>을 써 내고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서양이 쌓은 과학기술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는다.

조선과 조선 사람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1800년대 말 개화파가 앞선 문물을 보고 배우고 익히라고 보낸 관비유학생의 행태에서도 드러난다. 소설가 박태원은 1933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낙조(落照)>에서 관비유학생 출신 ‘최 주사’의 회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1930년대 청계천변 세태를 그린 <천변풍경>, 그리고 월북한 뒤에는 <갑오농민전쟁>을 썼다.

“원래가 당시 유학생들이 나뿐 아니라 모두가 인물은 없었습니다. 아니 그야 아주 없다구는 안하지만 대개가 치자면은 건달팽이로구려. 동경이라구 일껀들 가서 무슨 공부들 한줄 아시유?”
“그럼 무얼 하셨게요?”
“흥 말씀마시유… 그저 공부는 하지 않구… 하하 기맥힐 노릇이지. 이건 나부터가 명색이 유학생이지 어디 무슨 공부한답디까? 심심하면 공관으로 놀러나 가지. 공사가 처음에는 반색을 해 맞어 주고 왼통 과일에 과자에 대접이 좋았죠. 학교를 잘 댕기시요, 일어들 많이 배셨소 하구… 그야 해라는 없지. 모두 선비니까…”
“그렇겠죠.”
“그러든 것이 누가 어찌가다 한두 번씩 찾아가야지, 이건 허구헌날 드나들며 남 과일하구 과자만 축을 내놓으니 누가 좋아하겠수. 나중에는 그만 질력이 났는지 이제부터는 공관에서 청하거든 오구 그렇지 않으면 그저 모두 공부들이나 잘 하라구… 하하하.”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논문 <1890년대 후반 도일 유학생들의 현실인식>에서 “박영효의 주도 아래 일본에 보내진 유학생은 3차례에 걸쳐 151명에 달했다”고 말한다. 이들 유학생은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해 6개월~1년 반에 걸쳐 보통과 교육을 받았다.

첫 관비유학생들은 1895년 4월 7일 도쿄에 도착했다. 최 주사도 이 때 갔다. 최 주사 말에 따르면 첫 관비유학생에는 1000여명이 지원해 시험을 거쳐 100명이 선발됐다.

최 주사 등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면담한다. 후쿠자와는 도쿠가와(德川) 막부 말기인 1835년에 최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난학(蘭學)에 이어 영어를 공부하고 막부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둘러봤다. 처음 미국에 갈 때 신분은 제독 시종이었고, 유럽은 통역으로 갔다. 발전한 서양문물에 충격 받은 그가 쓴 <서양사정>은 일본이 근대국가로 가는 길잡이가 됐다. 후쿠자와는 와세다(早稻田)와 함께 일본의 양대 사학이 된 게이오(慶應)를 설립했다. 유학생들이 만났을 때 후쿠자와는 60세였다. 최 주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들어가는 길루 복택유길이를 만났구려.”
“어디서요?”
“학교서… 우리가 경응의숙(慶應義塾)엘 다녔섰거든… 지금도 동경에 그런 학교가 있지요?”
“있습니다.”
“처음에 복택이가 물어보드구먼. 성명이 무엇이요. 아무개요 대답하니까 조선 사람들은 성명 외에 자가 있구 별호가 있구 하다니 그것두 말하우 하길래 일일이 댔겠다. 그랬더니 이번엔 신분을 물어보더군… 백여 명 유학생을 일일이 물어보구 하더니 이번엔 지망이 뭐냐구 묻습니다그려.”
“그래 뭐라구 그러셨습니까?”
”흥!”
노인은 자조미(自嘲味)가 풍부한 코웃음을 치고 나서 어느 틈엔가 또 불이 꺼진 담배에 다시 성냥을 그어대고 그리고 또 한번 “흥!”하고 코웃음을 친 다음에야 이야기를 계속했다.
“역시 관직을 원한다고 그랬죠. 하나하나 물어보니까 백 명이 하나 빼지 않고 관직 지망자라구 그러는구료.”
“그럼 모두 정치과에 들어가셔야만 했겠군요.”
“아따 이 양반, 그냥 얘기나 들으슈 하하하… 그래 그 말을 듣더니 복택유길이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릅디다. 자기는 설마 백 명 학도 하나 빼지 않구 그렇게 대답할 줄이야 몰랐었든 게지. 원래가 사농공상 중에 농공상 세 가지가 나라 흥하는 근본이구료. 관직이란 매양 거저먹구 행세하구 엄벙뗑하는 그거지 아무엇두 아니예요. 그야 하나라두 없어서야 그도 어렵겠지만, 이건 모두들 그걸 하겠다니 될 말인가. 정작 농공상 세 가지는 아주 천하게들 생각하구… 흥! 참!”

후쿠자와가 경멸이 아니라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후쿠자와는 개인적으로 조선인 관비유학생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 앞선 문물에 충격을 받고 분발을 다짐하는 그런 패기를 기대했던 게 아닐까. 일본인으로서는 미개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최 주사가 들려줬듯이 조선의 유학생들에게는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관비유학 제도는 흐지부지된다. 박 교수는 “상당수의 유학생이 탈락해 귀국했고 졸업한 이는 70여 명에 그쳤다”고 전한다. 귀국한 졸업생들도 이렇다할 활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박 교수는 “많은 이들이 사립학교 교사가 되어 교육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개화파의 생각도 한 방향이 아니었다. 당시 학부대신 박정양과 내부대신 박영효가 유학생들에게 당부한 말을 비교해보자.

“제군으로 하여금 각 과로 나누어 실용사무를 강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사리를 깨우쳐 굳세고 불굴하는 정신으로 독립 문명한 세상의 필요에 응하기를 바라노니…” (박정양 훈시, 박찬승 <1890년대 후반 도일 유학생들의 현실인식>)

“여러분 중에는 양반의 아들두 있을 테구 중인의 아들두 있을 테구 평민의 아들두 있을 텐데, 지금 세상 형편이 자꾸 개척하는 시대야. 상중하 차별이 없는 시대야. 누구든 공부만 잘해서 우등한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즉 양반이지 별 게 아니란 말이야.” (최 주사가 전하는 박영효 훈시, 박태원 <낙조>)

조선이 <동의보감>에 머무는 동안 일본은 <해체신서>를 계기로 관념일 뿐인 지식을 버리고 근대 의학과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조선이 청을 제외한 세계와 담을 쌓고 사농공상의 옛 질서를 지키는 동안 일본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의 기초를 쌓았다. ([번역과 근대] 연재 끝)

칼럼니스트 백우진 <아시아경제신문 국제부 선임기자> smitten@naver.com

[사진=박영효 사진 문화콘텐츠닷컴, 허준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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