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이 글은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니다.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 건축가 김원 편]을 읽은 재미를 전하기 위한 글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끈 이야기를 따서 재구성했다.

이용재는 문학도를 꿈꿨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건축과에 진학해 ‘공돌이’가 됐다. 그가 건축평론을 택한 건 괜찮은 절충이었을까. 하지만 건축평론이 돈이 될 턱이 없었다. 그는 건축평론과 건설 현장 사이를 여러 차례 왕복했다. 현장은 험했다. 그는 재산을 날리고 감옥에도 다녀왔다. 택시를 몰았다. 이제는 글쓰기를 본업으로 삼는다. 이 글 일부는 그의 이전 책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에서 따왔다.

그의 글은 자코메티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군더더기가 거의 없이 사실의 뼈와 가시만으로 지은 글이다. 그런데도 그의 글엔 여유가 있고 울림이 있다. 사설이 길었다.

워커힐에는 피자힐이 있다. 조망이 좋다. 난 가족과 함께 한 번 들렀다. 낮에 갔는데, 건물 외관은 기억나지 않는다. 알고 보니 한국 현대건축의 대가로 꼽히는 김수근의 작품이다.

김수근은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 시절 미군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나중에 커서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요?”

“건축가가 돼라. 건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다. 건축가는 사람의 꿈을 디자인한다.”

꿈을 디자인하고픈 건축가의 꿈은 꿈일 뿐이다. 그 꿈은 제도와 권력과 금력과 이해관계자에 의해 꺾이기 일쑤다. 뿐만 아니다. 건축가의 꿈과 현장 사이엔 ‘노가다’가 있다. 건축가는 거친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들을 자신의 뜻대로 부려야 한다. 그래서 건축가가 자신의 꿈을 온전히 세우는 데엔 철근과 콘크리트 외에 기지와 뚝심, 정치력이 필요하다.

김수근이 피자힐을 지을 때다. 워커힐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월턴 워커 장군에서 이름을 따 지어졌다. 김수근은 피자힐 건물을 워커의 W자 모양으로 설계했다. 아래가 좁아지는 파격적인 모습이다.

뼈대를 세우고 거푸집을 만들어 콘크리트를 붓고 굳기를 기다렸다. 거푸집을 철거하는 날, 노가다들이 전부 손을 놓고 뒤로 나자빠졌다. 콘크리트가 무너질까봐. 김수근은 건물 1층 한 가운데 앉아서 막걸리를 들이키며 말했다.

“자, 이제 뜯어라. 무너지면 내가 먼저 갈게.”

이후 고분고분해진 노가다들은 김수근 말이라면 다 따랐다.

김수근은 4·19 이후 남산에 건립이 추진된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 당선됐다. 5·16으로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된다. 열 받은 김수근은 머리를 식히려고 일본 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행 비행기 옆자리에 JP, 김종필이 앉았다. 김종필 서른 여섯, 김수근 서른이었다. 둘은 초면이었다. 김종필은 김수근에게 아차산 20만평 부지에 조성할 워커힐 호텔 설계를 통째로 맡긴다.

국회의사당 설계는 새로 공모된다. 당선작이 없는 희한한 방식이었다. 국회의사당은 김중업부터 김수근까지 건축가 6명이 지원한 설계안을 뒤섞은 모습으로 여의도에 들어섰다.

몇 년 뒤 경기고 강당. 경기고의 선배 초청 강연회 자리. 김수근은 까까머리 후배 3000명 앞에 섰다. 그는 실현하지 못한 국회의사당의 꿈을 후배들에게 그려보였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에 어펙션(affection)과 디그니티(dignity)를 함께 부여하느라 고심했다.”

그 강연을 들은 경기고 후배 중엔 2학년생이던 김원이 있었다. 김원은 청담동 아르마니 매장 건물, 러시아대사관, 국립국악원 등을 설계했다. 김원은 성당과 성지 등 가톨릭 건축 일을 많이 했다. 그는 설계를 둘러싼 갖은 압력에 휘둘리지 않은 건축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김원은 부산사대부속 초등학교를 다녔다. 부산 피난 시절이다. 동기가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다. 이 회장이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들여오려고 할 때였다. 한국에 별 관심이 없던 아르마니는 다른 명품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깃발을 나부끼는 모습에 자극받아 뒤늦게 진출을 준비한다. 아르마니는 그러나 까다로움은 양보하지 않는다.

신세계에서 보낸 매장 건물 설계가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원아, 이거 원 자존심이 상해서. 네가 맡아줄래?”

“내가 무슨 구원투수인가?”

김원은 자비로 세계 주요 도시의 아르마니 매장을 둘러본다.

‘첫째도 노블(noble), 둘째도 노블, 오로지 노블로 가는 거다.’

김원 설계는 단박에 통과.

“차림이 그게 뭐니. 내가 네 코디 맡을게.” 이 회장은 김원의 트렁크에 아르마니를 잔뜩 챙겨준다.

이 회장은 ‘기마이’가 좋다. 옷가지로 끝낼 이명희가 아니다. 그는 고마움의 표시로 김원에게 굵직한 일을 줬다. 신세계가 기증한 이화여대 경영관.

다시 김원과 김수근의 인연으로 돌아가자. 김원은 1965년 김수근연구소에 입사했다. 김수근은 심드렁했다.

“본관이 어디지?”

“김해 김입니다.”

“흠.”

김원에겐 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라, 책이나 보자. 1년간 건축사무소에서 쓰일 연필을 깎으며 책만 본다. 글이나 쓰자. 요샛말로 하면 건축비평이다. 그는 ‘공간’이라는 매거진을 만든다. 20대 중반 젊은이가 쓴 글이 아니었다. 당시 거장들의 작품은 그의 날카로운 비수 앞에 추풍낙엽이었다.

김원은 건축발은 물론 글발도 뛰어나, 젊은 건축인 중 상당수는 김원의 글을 보고 건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김원은 김수근문화재단 이사장이다.

글을 적으면서 내게 두 가지 물음을 던졌다. ‘나는 내 꿈을 얼마나 잘 이루고 있나. 나는 내 꿈을 주저앉히는 현실의 중력을 어떻게 얼마나 벗어나는가.’ ‘나는 누군가의 역할 모델이 된 적이 있나.’


칼럼니스트 백우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cobal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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