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거리’, 사랑이 심심하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칼 내놔.”
“버렸는데.”
“네가 뭔데?”
“법을 지켜야하는 대한민국 민주시민.”
“칼 내놔!”

이것은 무시무시한 범죄조직과의 혈투가 벌어지는 스릴러의 한 장면이 아니다. 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남녀주인공인 강유나(김옥빈)와 김창만(이희준)이 나누는 대사다.

한쪽은 깡만 남은 여자 소매치기고 한쪽은 가난하지만 도덕선생처럼 바른 말 참 잘하는 콜라텍 지배인이다. 한쪽이 칼처럼 날카롭다면 한쪽은 꽃처럼 평화롭다. <유나의 거리>는 배우 김옥빈이 출연했던 번지르르한 사극 <칼과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대신 투박해도 칼과 꽃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과거 사극에서 지루한 꽃이었던 김옥빈은 <유나의 거리>에서 날카로운 칼인 유나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람 좋게 웃는 인상의 이희준은 <유나의 거리>에서 평화로운 꽃 같은 남자 창만에 안성맞춤이다.

“칼 내놔” 대사는 자신을 배신한 소매치기 동료의 얼굴을 칼로 그으려는 유나에게서 창만이 칼을 빼앗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둘은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건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한다. 한쪽은 칼이라면 한쪽은 꽃이다. 하지만 <유나의 거리>는 칼이 꽃을 자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꽃이 한걸음씩 칼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다. 세상이 온통 적이라고 믿었던 칼에게, 이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며 꽃이 칼을 품어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품을 때 사랑은 자라난다. <유나의 거리>는 그런 사랑에 대해 말하는 드라마다.

물론 <유나의 거리>의 사랑은 우리가 멜로드라마에서 혹은 로맨틱코미디에서 단물 빠지게 보았던 그 사랑과는 다르다. 인위적으로 멋지고 예쁘게 가공된 신데렐라와 재벌가 왕자님의 사랑이 아닌, 정말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 부딪치게 될 것 같은 그런 사랑들이다. 그런 사랑을 그리는 데 있어 작가 김운경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남들이 보기엔 구질구질해도,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듯 시시해도, 남들이 보기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아도 어쨌든 우리가 경험했던 사랑.



사실 <서울의 달>과 <서울 뚝배기>의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김운경은 이미 흘러간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밀회>의 선재와 혜원이 그려낸 우아하고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 있던 시청자들에게 후속작 <유나의 거리>의 사랑은 너무 심심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런 걱정은 붙들어도 좋다. 전작인 MBC 사극 <짝패>에서 힘 빠진 호랑이 같던 김운경 작가는 <유나의 거리>에서 본인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더구나 그가 그려내는 21세기 서울은 촌스러움과 현대적인 정서가 뒤섞여 독특한 매력을 발휘하는 드라마 속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막걸리는 막걸리인데, 옛날에 마시던 막걸리가 아니라 입에 더 착 감기는 맛이 가미된 막걸리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김운경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특별히 더 세련되게 변한 건 아니다. 서울 변두리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다세대 주택과 인근 콜라텍을 배경으로 삼는 <유나의 거리>인물들 면면은 여전히 김운경 표다. <파랑새는 있다> 등등에서 늘 이 사회 주변부의 인물을 전면에서 내세웠던 작가는 이번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창만과 유나가 세 들어 사는 다세대주택의 인물군상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소매치기 세계에서 알아주는 선수인 젊은 아가씨, 한때는 주먹세계를 휘저었으나 지금은 뒷방노인으로 전락한 건달, 간간이 페인트공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남자와 그의 동거녀, 간통으로 감방에 들어갔다 나와 뒷돈 대주는 유부남의 도움으로 카페를 운영하는 여사장, 주인집 처남이란 이유로 붙어 있지만 모든 이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노총각 백수. 이 인물이 복닥복닥 부딪치면서 드라마 <유나의 거리>는 흘러간다.



이 팍팍해 보이는 삶에서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이 아니다. 바로 그들을 하루하루 살게 하는 건 사랑이다. 때론 돈이 섞여들고, 때론 욕심이 섞여들고, 때론 배신이 섞여들어 그들의 사랑은 때가 타고 구질구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유나의 거리>의 전작인 JTBC 월화드라마 <밀회>에서 주인공 남녀를 제외한 상류층의 인물들이 사랑을 믿지 않는 것, 혹은 사랑을 그들의 표면적인 삶의 완결성을 보여주기 위한 소도구 정도로만 이용했던 것과 달리 그들의 사랑은 진실하다.

그런 면에서 <유나의 거리>의 장면 중 벌금 내는 대신 감옥에 ‘몸빵’하러 떠나는 동거녀와 페인트공이 버스 앞에서 이별하며 나누는 사랑의 대사는 무뚝뚝하고 일상적이지만 절절하게 다가온다.

“내 버스 온다.”
“다음 꺼 타라!”
“안 돼, 늦어.”

이어 페인트공과 동거녀는 버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이별의 손인사를 나눈다.

또한 창만과 유나가 공원에서 포옹하기 전 창만의 대사와 이후 이어지는 상황들은 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혹시 나한테 안아달라는 이야기하고 싶으면 지금해도 돼. 너무 깊게 생각할 것 없어.”
“안아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포옹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어?”
“나 오줌 마려워.”

창만은 유나가 소변을 볼 수 있도록 공원 한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녀 앞에서 보초를 선다. 그리고 유나가 소변을 보지 못하자 ‘쉬-’라고 말하라고 가르쳐준다. 이어 깊은 밤 공원에서 외롭고 가난한 두 사람은 함께 쉬쉬 나지막하게 2중창을 노래하듯 읊조린다.

결국 유나는 그곳에서 소변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유나의 찌르르함은 오줌이 마려워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이 온통 적이라 믿고 날카로운 칼로만 살아온 그녀가, 처음 꽃처럼 평화롭고 아늑한 사랑의 찌르르함을 느낀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삶이 팍팍한 이들에게 사랑은 더욱 소중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어깨만이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하게 기댈 유일한 언덕이니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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