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잉 인 더 레인’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성공은 어려운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오늘은 영화가 아닌 무대 뮤지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얼마 전에 보았고(당시 주연은 제이, 최수진, 선데이였다) 지금도 공연 중인 <싱잉 인 더 레인> 이야기다. 어차피 영화와 동떨어진 주제는 아니고, 최대한 영화 주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기로 한다.

아시겠지만 이 뮤지컬의 원작은 스탠리 도넌과 진 켈리가 감독한 동명의 뮤지컬 영화이다. 이 뮤지컬에 대해 검색하면서 많은 관객들이 원작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접하고 놀랐다. 원작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팬들 중 상당수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놀랍다. 두 작품 모두 놓치면 아쉬운 작품이고 구하기도 쉬우니 읽고 보시라. 그래도 <싱잉 인 더 레인>은 원작에 충실하기라도 하지, <지킬 앤 하이드>는 멀쩡한 원작을 말도 안 되는 신파로 뜯어 고친... 하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지킬 앤 하이드>가 아니다.

공연칼럼니스트인 지혜원 씨는 아이즈에서 SM 아이돌들을 주연으로 써먹기엔 '작품이 가진 요소나 표현양식이 여전히 올드하며',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작품이라 지적했다. 모두 프로페셔널한 판단에 바탕을 둔 맞는 말인데, 성격이 안 좋고, 원작의 맹렬한 팬인 필자는 무조건 시비부터 걸고 싶어진다. 일단 필자는 <싱잉 인 더 레인>의 원작이 '올드'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싶으니 말이다.

당연히 내 입장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SM 아이돌이 원작에서 그렇게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나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싶다. 20년대를 무대로 한 50년대 뮤지컬이니 당연히 옛날 이야기다. 하지만 현대 한국 연예계에서 아이돌들은 클래식 할리우드 전성기의 스타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요새 할리우드 배우들보다 그들에 더 가깝다면 가깝다.



영화 속 돈 락우드와 SM 아이돌 사이에는 그럴싸한 조화를 이루는 평행선이 존재한다. 게다가 그게 뮤지컬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오직 공연 한 번을 봤을 뿐이지만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 한다면 가능한 캐스팅 조합을 다 챙겨봐야겠지만 필자는 지금 그 위치에 있지 않다) 필자는 제이가 1막 끝에서 1929년에 처음 소개된 아서 프리드와 나시오 허브 브라운의 노래를 그럴싸하게 뽑아내는 걸 보고 조금 감명받았다. 다들 어떤 연결점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닌 두 세계가 시간과 공간을 뚫고 만나는 걸 본 것 같달까. 물론 이건 흥행 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에게 가장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무리 제이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이 노력을 해도 <싱잉 인 더 레인>의 원작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배우들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제이의 춤은 진 켈리에 못 미쳤다. 하지만 문제는 춤을 잘 추느냐, 못 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에 빠져 빗속에서 날뛰는 진 켈리의 댄스가 (1) 오로지 켈리라는 무용수를 위해 그리고 (2) 오로지 영화라는 매체를 위해 안무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첫 번째 핸디캡은 아이러니컬해서 조금 웃음이 난다. 외국 뮤지컬이 한국 캐스팅에 의해 공연될 때 발생하는 일반적인 문제점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싱잉 인 더 레인>에서 돈 락우드를 맡은 아이돌들은 모두 장신에 팔다리가 길쭉길쭉하다. 하지만 진 켈리는 170센티미터의 작은 키에(더 작아 보이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다부진 체형의 아일랜드 남자였다. 단점 같이 들리지만 자신의 작은 키에 신경 쓰지 않는 당당함은 그에게 섹스 어필의 일부였다. 물론 그는 그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맞는 안무를 만들었다. 그의 춤은 민첩하고 빠르며 힘이 있는 작은 근육질 육체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그런 춤을 흉내내는 아이돌들은 여벌로 남아도는 팔다리 때문에 켈리의 날렵함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본 제이의 춤은 종종 진 켈리의 오리지널을 슬로우모션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두 번째 핸디캡은 이보다 더 치명적이다. 영화와 연극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매체이다. 그건 영화라는 매체를 완벽하게 활용한 걸작일수록 무대로 옮기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 켈리를 비교하는 것은 유용하다. 둘은 모두 20세기 중반을 휘어잡은 위대한 춤꾼이었다. 하지만 아스테어의 <탑 햇>을 무대 뮤지컬로 옮기는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진 켈리의 <싱잉 인 더 레인>을 뮤지컬로 옮기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훨씬 쉽다.

아스테어는 자신의 춤을 영화에 넣을 때 카메라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카메라는 그와 파트너의 몸 전체를 잡으며 편집을 최소화한 채 그를 수동적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진 켈리는 정반대다. 그는 적극적으로 카메라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는다. 유튜브를 뒤져 유명한 <싱잉 인 더 레인>의 댄스 장면을 보라. 얼핏 보면 소박해 보인다. 요새 뮤직 비디오의 현란한 편집이나 화면 왜곡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카메라가 진 켈리의 동작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편집되고 있는지를 보라.



이제 정확히 같은 동작을 옮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은 상황과 비슷한 춤을 따온 무대를 보자. 몇 톤의 물을 쏟아붓고 진짜 무용수가 나와도 영화의 친밀함을 따라가기 힘들다. 일단 1.37:1의 아담한 화면에 무용수를 가두고 있는 원작과는 달리 뮤지컬 무대는 너무 비어 보인다. 공간적으로도 비었지만 안무의 절반도 없다. 원작에서 진 켈리는 카메라 앞과 카메라 뒤 모두에서 춤을 추었지만 무대의 제이의 경우 카메라 앞의 켈리만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성공은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물론 한국어로 넘어가면서 필자가 잡아내지 못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거나 오히려 있었던 문제점들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했어도 <싱잉 인 더 레인>이 위대한 할리우드 영화라는 결정적인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팬으로서 필자는 그 부족한 결과물이 무척 안심이 된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SM C&C, 영화 <싱잉 인 더 레인>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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