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이 시청자를 유혹하는 데 실패한 까닭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 월화드라마 <유혹>에 유혹 당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유혹>에 어울리지 않게 이 드라마는 게으르고 텁텁하다. 불룩 나온 아랫배를 손으로 벅벅 긁으면서 느끼한 멘트를 날리는 부장님의 헛된 유혹이 떠오를 정도다. 한때 가장 잘 나가고 지금도 괜찮은 비주얼을 간직한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이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어쩌면 <유혹>은 이 드라마가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불륜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닐까?

사실 불륜은 아침드라마부터 주말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심심할 때마다 등장하는 케케묵고 만만한 소재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떡밥이기도하다. 이 낡은 떡밥을 끼워 얼마나 의미 있게 시청자를 낚느냐는 작가와 연출자, 그리고 배우의 역량에 달려 있다.

올해 초 SBS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는 드라마를 통해 이 케케묵은 소재를 가지고 비교적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결혼한 이들의 감정적인 공허, 쇼윈도 부부의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줌으로써 결혼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최근 JTBC의 <밀회> 또한 단순히 젊은 남자와 유부녀와의 치정이 아닌 계급을 뛰어넘는 인간과 인간 간의 감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 작품성 있는 드라마란 무엇인지 증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히트작 <천국의 계단>에서 만났던 권상우, 최지우가 조우하고 <피에타>의 이정진과 <하이킥>의 박하선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유혹>만의 변별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유혹>의 변별점은 10억에 있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의 첫 장면은 홍콩 가는 비행기 안을 보여준다. 네 사람 모두 같은 비행기를 타지만 유세영(최지우)은 1등석 최석훈(권상우) 일반석의 자리에 앉는다. 동성그룹 대표이자 냉정한 여인 세영(최지우)과 파산에 이른 젊은 가장 석훈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피라미드 먹이사슬 내에서 계급 자체가 전혀 다른 인간이다.

하지만 홍콩에서 세영은 풋풋함을 잃지 않은 남자 석훈에게 색다른 매력을 느낀다. 세영은 그를 유혹하기 위해 혹은 이 남자의 시간을 소유하기 위해 1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돈 때문에 석훈과 그의 아내 나홍주(박하선)는 경제적 파산에도 겪지 않았던 위기에 처한다. 바로 아내 홍주가 그간 쌓아온 남편 석훈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초반의 <유혹>은 이처럼 단순한 불륜 드라마가 아닌 물질에 진실한 사랑이 농락당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미는 딱 거기까지다. 그 후에 이 드라마는 각각의 주요 인물들을 지극히 진부한 캐릭터로 만들어놓고 유혹 아닌 유혹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최지우가 연기하는 세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석훈에게 의지하는 뻔한 여주인공으로 변해간다. 박하선의 홍주는 모든 걸 의심하고 모든 것에 대해 징징거리는 여인으로 변한 지 오래다. 권상우의 석훈 역시 아내에게 호통치고 사과하고, 세영에게 친절하게 대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빠지는 게 전부다. 이정진의 느물느물한 강민우만이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가물치마냥 펄떡거린다. 하지만 드라마 중반부에 이른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그가 한 일은 <원 썸머 나잇> 배경음악과 함께 홍콩에 있던 숨겨둔 아들내미를 한국으로 데려온 것이 전부다.

더구나 중반부에 이른 지금까지 <유혹>은 인물 간의 팽팽한 감정대립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들은 투덜거리고, 하소연하고, 독백하다가, 어느새 지지부진하고 의미 없는 관계를 이어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이 내뱉는 대사들은 언제나 설명적이고, 상투적이며, 따분하다. 똑같이 불륜을 다룬 <내 남자의 여자>처럼 바늘처럼 날카롭게 꽂히는 대사나 뇌리에 확 박히는 장면 같은 건 없다. <청춘의 덫>의 “당신, 부숴버릴 거야.”처럼 상대에 대한 분노를 짧지만 강렬하게 압축하는 대사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은 보는 이들의 눈을 사로잡기는 한다. 하지만 드라마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진지한 분위기에 유혹 당해서는 아니다. 어딘지 이 작품이 코믹하게 다가와서다. <유혹>의 화면과 정서는 꽤 매끈하지만 그 취향이 90년대에 머문 듯 희한하게 촌스럽다. 그래서 드라마는 진지한 장면은 의도와 달리 종종 실소를 머금게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격정적인 피아노와 현악기의 등장, 와이셔츠를 걷어 올린 채 일에 몰두하는 남자의 팔뚝을 보고 애틋한 표정을 짓는 여주인공의 얼굴을 잡는 식상한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보니 특급 스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프라이즈> 같은 재연드라마나 추억의 노래방 화면을 보는 듯한 아이러니한 재미가 있다. 물론 아름답고 잘생긴 주연급 배우들이 뜬금없이 재연배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꼭 ‘서프라이즈’해서만은 아닌 것 같긴 하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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