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적’이 묻는다, 누가 진짜 도적인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해적>은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해적과 산적들이 관군들과 뒤엉키면서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을 그린 해상액션코믹영화이다. 영화는 엉뚱하게 얽혀드는 상황들과 캐릭터 코미디로 시종 웃음을 유발하며, CG까지 동원한 액션으로 상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나라를 등진 백성인 해적과 산적들을 통해, 국가와 백성이 맺는 길항적 관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 해적, 산적, 관군, 고래가 뒤엉키는 소동극

영화는 위화도 회군을 앞둔 이성계의 군영에서 장사정(김남길)이 회군에 반기를 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장사정은 그를 저지하는 상관 모흥갑(김태우)를 베고,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탈영하여 산적이 된다. 한편 해적선 대단주 소마(이경영)는 중국을 오가는 관리와 결탁하여 자신만의 부를 축적하고, 급기야 부하들을 관리의 전리품으로 내주려다가 소단주 여월(손예진)의 반란으로 바다에 던져진다.

개국에 성공한 이성계가 명나라로 보낸 사신은 국호와 국새를 받는데 성공하지만, 서해에서 공연히 고래를 공격하다 역공을 당해 배는 난파되고 국새는 고래에게 삼켜진다. 정도전은 해적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거짓 보고하여 전국에 해적과 산적 소탕령이 내려지고, 가까스로 살아난 모흥갑을 불러 고래를 잡아 국새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소마의 부하였다가 산적으로 전향한 철봉(유해진)을 부하로 받아들인 장사정 패는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자 아예 국새를 삼킨 고래를 잡겠다고 바다로 간다. 살아난 소마는 여월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관군과 함께 고래를 잡겠다고 나서고, 관군의 협박을 받은 여월도 고래잡이에 나선다. 이제 바다에는 고래를 잡겠다는 네 세력이 엇갈리면서 좌충우돌의 소동이 벌어진다.

여기서 ‘누가 고래를 잡아 국새를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은 거짓 화두이다. 영화는 이들이 얽혀드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액션의 활력을 보여주고, 바다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고래를 잡겠다고 나선 산적들의 어수룩함을 통해 큰 웃음을 선사한다. 영화 속 CG로 만든 고래나 벽란도의 대형 수차의 비주얼은 흠잡을 데가 없으며, 짜임새 있는 선상 액션장면과 빠르게 전개되는 상황극에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다. 영화는 철저한 오락물로서 관객들의 눈을 잡아채는데, 영화가 담고 있는 정치적인 시각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 누가 진짜 도적인가

영화에서 선악의 구도는 비교적 명확하다. 관군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고 자기부하도 팔아먹으려고 하는 소마와 회군의 기회를 틈타 한 몫을 챙기려던 모흥갑이 악역이다. 도덕적 명분을 잃은 그들은 자신의 부하에게 반격당해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다. 이들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여월과 장사정을 공격하며,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잔학성으로 백성과 고래를 공격한다. 모흥갑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겠다며 여월을 협박하는 장면이나, 자신들의 전과를 위해 민가를 습격하여 해적 마을이라는 이유로 학살하는 장면은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민낯을 보여준다. 처음 관군들은 “한낱 미물인 고래가 수군의 배를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고래를 공격하였고, 소마와 모흥갑은 새끼고래를 인질로 삼아 어미고래에게 포를 쏘아댄다.

반면 해녀 출신의 여월은 관군에 의해 엄마를 잃고 해적이 된 이후로도 고래와 교감하며 살고 있으며, 여월이 바다에 빠졌을 때도 고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또한 고래를 잡아야 할 순간에도 젖먹이 새끼가 가여워 공격하지 못한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선악의 구도를 따라가 보면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보다 약자인 고래와 백성, 부하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악이다.

주인공인 여월과 장사정은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거나 잘못된 국가권력의 일원으로 “나라를 훔치는 도적”이 되기 싫어서 해적과 산적이 된 인물들로, 자신의 부하와 백성과 고래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선악의 구도는 상당히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성을 드러내는데, 이는 <군도>가 시도하였으나, 악인에 대한 탐미주의로 빠지면서 실패했던 지점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국가권력을 다르게 보기

본래 해적은 국가 경계를 이탈한 존재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무국적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들도 망망대해에 고립된 채 살수는 없으며, 생존을 위해서는 어느 나라의 땅이든 잠시 정박하여 약탈한 물자를 생필품이나 무기, 정보 등으로 교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이 주로 국제무역항에서 이루어지긴 하지만, 국가권력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들이 국가와 맺는 관계는 방식은 그때그때 다르다. 국가는 이들을 토벌할 것을 원칙으로 삼지만, 주로 묵인한 채 뒷거래하는 방식을 취한다.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해적을 지원하고 상호 협력하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국내외의 사정에 변화가 생기면 갑자기 토벌에 나서기도 한다. 영화는 해적과 관군이 맺는 다채로운 관계를 보여주면서 국가권력에 대한 상대적인 시선을 제공한다. 즉 국가권력에서 벗어나 있지만, 때로는 국가권력과 교섭하고 저항하는 해적들의 모습을 통해, 국가권력이라는 절대적 중력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여말선초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것도 국가를 상대화하는 영화의 정치성과 잘 맞아 떨어진다. 국가권력은 자연환경처럼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위화도 회군 같은 정변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명나라에 제 나라 백성들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국호와 국새라는 상징적 승인을 받아옴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폭력기구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대내외적 정당성의 기표인 국새를 자연의 일부인 고래가 삼켰고, 이를 잡아 도륙하기 위해 관군이 백성을 인질로 삼아 해적을 협박·활용한다는 구도는 국가권력에 대한 도발적인 냉소를 담고 있다. 관군에게 학살당하고 유민이 된 여월이 “우리에게 지킬 나라가 있었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은 영화가 지닌 무정부주의적 냉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성계에게 보낸 장사정의 메시지를 통해, 국가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봉합한다. 국가라는 존재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나라 백성들을 조공으로 바치며 명나라의 승인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나라가 아닌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미고래가 새끼를 지키려는 그 마음에 공감한다면, 불시에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에 공감한다면, 국가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이 지금과 같이 광포하진 않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해적>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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