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장혁·장나라, 사랑스럽지만 닭살 돋지 않게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언뜻 평범해 보이는 로맨틱코미디 MBC 수목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시작부터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눈에 띄는 드라마였다. 그건 물론 ‘운명’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은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사실 처음 들었을 때 뜨악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세상에, 운명처럼 널 사랑한다니, 어딘지 폰팅이 유행하고 포켓사이즈 <대중가요> 노래책 뒤 펜팔코너가 떠오르는 시절의 사랑 고백과 어울리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제목을 제쳐둔다면 이 드라마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존재했다. 그건 어떤 호흡들에 관한 궁금증이었다. 우선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아롱다롱 어울렸던 장혁·장나라가 다시 만나는 드라마는 점이 그러했다. 풋내 풀풀 풍기던 시절 커플로 등장했던 이들이 과연 각자의 틀을 다져놓은 배우로서 성장한 다음에는 어떤 호흡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대만에서 빅히트했던 40부작 가까운 장편 드라마가 어떻게 20부작 내외의 호흡을 지닌 미니시리즈로 바뀌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던 호흡은 이 드라마의 두 작가에 대한 것이었다. <운사>는 80년대 활약했던 주찬옥 작가와 2천년대 중반 인상적인 시트콤을 쓴 조진국 작가가 함께 쓰는 작품이었다. 주찬옥 작가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개 숙인 남자>에서 황인뢰 피디와 호흡을 맞춰 90년대 초반 가장 철학적이면서도 진지한 드라마를 작업했던 주인공이었다. 한편 조진국 작가는 <안녕, 프란스체스카 시즌1>과 <소울메이트>를 공동창작하면서 독특한 유머감각과 세련된 감수성을 지닌 시트콤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 각기 다른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던 남녀 작가가 어떤 호흡을 보여줄지, 또 90년대와 2천년대라는 각기 다른 감수성이 어떤 독특함을 보여줄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사> 초반 그런 기대감은 뜨악함으로 바뀌었다. 가운데 가르마를 탄 단발머리로 등장하는 장혁을 보는 순간에 느껴졌던 난감한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무언가 드라마 전체가 어울리지 않게 삐걱거리는 인상이었다. 김미영(장나라)이 중심이 된 드라마의 진지한 부분은 답답하고 상투적이었다. 이건(장혁)이 중심을 맡은 코믹한 장면은 당황스러울 만큼 도드라졌다. 그렇다 보니 어느 쪽에 중심을 두고 드라마를 보아야할지 난감해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그 상황에서 먼저 이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준 것은 건과 미영을 연기하는 장혁과 장나라 두 주인공이었다. 약을 탄 음료 때문에 의미없는 하룻밤을 보내고 그 때문에 아이까지 생긴 이 두 사람은 사실 처음부터 ‘운명처럼’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다. ‘떡방아’ 장면으로 귀엽게 포장되긴 했지만 오히려 불쾌한 사고에 가깝다. 그렇다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연은 아니었다. 홍콩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충고를 해준 인연이 있어서다. 특히 이건은 그 동안 늘 사람들에게 치어 살았던 소심한 인물 미영에게 쉽게 떨어지는 포스트잇이 아닌 본드 같은 인물이 되라고 처음으로 충고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하여간 <운사>는 이 사랑으로 만나지 않은 두 사람이 어떻게 오해를 극복하고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가며 사랑을 쌓는지 그걸 그럴 듯하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자연스럽지만 지루하지 않게, 사랑스럽지만 닭살 돋지 않게. 거기에 하나 더 이 드라마의 특성 상 괴팍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장혁과 장나라는 이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드라마의 몰입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장혁은 자신이 그간 <추노>, <뿌리 깊은 나무> 등등에서 쌓아온 진지하고 무거운 사내 분위기를 적절하게 패러디하면서 이 드라마의 괴짜스러운 유머감각의 맛을 꽤 맛깔나게 살려냈다. ‘달팽이’ 미영의 늪에 빠져들어 넋을 놓는 건이를 장혁이 이렇게 능청스럽게 연기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제는 특유의 호탕하면서도 어색한 웃음소리가 없는 건이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장혁이 의외의 매력을 보여주었다면 장나라는 그간 그녀가 해왔던 섬세한 감정 연기를 미영을 통해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미영은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인물, 혹은 착한 척해서 정 떨어지는 인물로 오해받기 쉬운 유형이다. 장나라는 대사에 드러난 미영의 표면만이 아닌 그녀의 감정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미영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장나라의 연기는 이 소심하지만 착하고 모성애 강한 여주인공을 시청자들이 응원하게끔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이 두 주인공의 호흡이 어우러지면서 <운사>는 중반부에 이르러 탄력을 받았다. 그쯤부터 원작과는 다르지만 매력적인 <운사>만의 설정들도 돋보였다. 또한 <운사>의 두 작가가 보여주는 진지함과 독특함 사이의 미묘한 균형추 또한 안정감을 찾았다. 그 때문에 <운사>는 독특한 유머감각을 지녔으면서 불꽃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물들이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드라마로 변해갔다.

특히 최근 회차의 건과 미영의 문자메시지를 두 사람의 직접적인 대화로 처리한 장면들은 이 드라마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한다. 옛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연인간의 다정하고 친밀한 전화통화 장면처럼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살아있다. 그러면서도 그 장면이 건이 화가가 된 미영의 고객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미영과 문자를 나누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세련된 연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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