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 걸어다니는 마네킹에서 진짜 연기자까지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MBC 청춘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에 송승헌이 있었다면 그 계보를 잇는 <뉴논스톱>에는 조인성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조각미남에 두 발로 걸어다니며 연기하는 마네킹이었다. 두 시트콤에서 송승헌과 조인성 모두 가장 인기 있는 스타였지만 동시에 마네킹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마네킹 스타들은 그 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송승헌은 탄탄한 근육을 더욱 키웠고 2014년 현재 그는 가장 남자다운 매력을 지닌 배우 중 하나다. 파리한 조인성은 <뉴논스톱> 이후 근육 대신 어떤 감정이나 태도들을 보여주려는 듯 보였다. 그건 그 또래 사내애들의 흔한 껄렁껄렁이나 허세작렬은 아니었다.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남자들이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물렁뼈 같은 감수성들이랄까? 굳이 잘생긴 남자들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조인성은 드러냈다. 딱 <비트>의 정우성만큼 보여주면 멋있을 것 같은데 멋있지 않은 징징거리는 표정까지 고스란히 얼굴에. 조인성 특유의 이 감수성이나 감정처리는 <피아노>와 <별을 쏘다>를 거쳐 <발리에서 생긴 일>의 정재민(조인성)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실 2004년 SBS에서 방영한 <발리에서 생긴 일>은 트렌디드라마의 고전이라도 할 법한 작품이다. 그때 막 떠오르던 소지섭, 하지원, 박예진 같은 젊은 스타들이 출연해서만은 아니다. 트렌디드라마라는 그릇 안에서 담아낼 수 있는 감수성과 문제의식 같은 것들이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품이 <발리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IMF 이후 완전히 극과 극으로 갈린 경제적 계급 각각에 위치한 젊은이들을 내세운다.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수정(하지원)과 강인욱(소지섭)이 한쪽이고, 그 반대편에 부모로부터 이어 받은 부를 누리는 정재민(조인성)과 최영주(박예진)가 존재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불안하고 공허하며 위태로워 보이는 인물은 재민(조인성)이다. 재민은 부만 지니고 있을 뿐 능력이고 지성은 없고 자존심만 있는 껍데기이기 때문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턱받이를 두르던 유아기의 정서를 그대로 지니고 허우대만 멀쩡하게 큰 어른이 그다. 그의 어머니가 우리 아기, 아기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닌 처음 사랑을 느낀 수정 때문에 재민은 버거워한다. 지적인 능력 빼고 모든 걸 다 갖춘 남자 재민은 가난하지만 자존심 센 수정의 마음을 쉽게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소지섭, 하지원, 박예진 모두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발성이 제일 안 좋고, 발음이 씹히며, 대사처리가 어딘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시선처리가 불안한 사람은 조인성 밖에 없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조인성이 연기하는 재민은 그 촛불처럼 흔들리는 불안함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이고 생생한 캐릭터로 다가온다. 뭐랄까, 객관적으로 잘 하는 연기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 그걸 훌쩍 뛰어넘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어떤 먹먹함 같은 것들이 있다. 젊은 남자의 불안이나, 두려움, 상처 입은 무의식을 드러낼 때 그는 탁월하다. 연기가 아니라 발을 딛고 서 있는 세계의 불안을 아는 사람이 보여주는 어떤 특별한 감각이 있다. 특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재민이 우는 장면은 징징징 우는 것이 전부지만 이 드라마의 전부를 그리는 것처럼 잔상이 강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후 10년이 지난 2014년 SBS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은 또 한 번 인상적인 눈물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번에 흘리는 눈물은 처음 사랑다운 사랑을 알게 된 청춘의 징징징이 아니다. 조인성은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을 연기하며 서른을 넘겼지만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상처 때문에 울컥 치미는 인간의 먹먹한 눈물을 흘린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겜블러 오수 이후 노희경 작가의 페르소나가 된 듯한 조인성은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한 청소년 시절의 고통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닮은 환시와 살아가는 베스트셀러 추리소설가 장재열을 연기한다.



재열은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인 인물이다. 비현실적인 부분은 베스트셀러작가이면서 라디오DJ이자 매력적인 바람둥이로 등장하는 그의 외면적인 모습이다. 인간이라기보다 아이콘에 가까운 모습이다. 오히려 현실적인 부분은 재열의 내면, 그 일그러진 풍경들이다. 재열은 청소년기의 상처와 계부 살인사건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고통 받는다. 또 가석방으로 나온 형에게 포크로 습격당한 뒤 그 충격으로 환시인 한강우(디오)를 보는 스키조에 시달리는 중이다.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은 CF스타처럼 비현실적으로 멋진 재열과 황폐한 내면을 가진 재열을 하나로 연결시켜야 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그리고 이 어려운 역할을 조인성은 자연스럽게 끌어간다. 모든 것을 다 이룬 듯한 아름다운 남자가 불편한 내면을 드러내고 멍한 눈으로 정신과병동 침실에 누워 퀭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 한 발 한 발.



특히 <괜찮아, 사랑이야> 말미에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재열을 연기하는 조인성은 상당하다. 과거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재민을 연기할 때 그 불안을 날 것으로 드러냈다면 <괜찮아, 사랑이야>에서는 정신적으로 무너진 인물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지 완벽하게 이해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엄만, 죄가 없어요. 형이 불쌍해.”를 그렇게 메마르면서도 먹먹하게 내뱉을 수 없을 것 같다. “강우는 있어요. 강우는 나만 믿으니까. 내가 없음 강우는 아무도 없어요. 가진 게 없는 애는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 하고, 외면해.”라는 대사 또한 마찬가지다.

<괜찮아, 사랑이야> 14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몰래 병실로 찾아온 지해수(공효진)에게 재열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나 안 섹시하지?” “여기 있는 내가 너무 초라해” 재열은 그의 말마따나 안 섹시하고 초라하다. 하지만 그 대사에 실린 감정들에서 화려한 베스트셀러 작가 재열은 아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안쓰러운 내면은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재열을 그리는 조인성은 더 이상 아름다운 마네킹이 아닌 건 틀림없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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