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칸타빌레’, 현실 없는 리메이크의 극명한 한계

[엔터미디어=이만수 기자] 첫 회 8.5%, 2회 7.4% 그리고 3회 5.8%. KBS <내일도 칸타빌레>의 시청률은 갈수록 뚝뚝 떨어진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리메이크작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 일드의 대명사처럼 잘 알려진 <노다메 칸타빌레>를 리메이크한 <내일도 칸타빌레>는 그 원작이 갖고 있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첫 회가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확실히 원작의 아우라 덕분이다. 원작에 대한 향수가 있는 시청자들이라면 리메이크가 궁금했을 터다. 하지만 리메이크가 원작과 크게 다를 바 없고, 어떤 면에서는 원작을 다시 찾아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여겨지는 순간부터 추락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우리 드라마의 정서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즉 여기 등장하는 공간이 한국인지 아니면 일본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느 외국의 어디쯤 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굳이 그 공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만화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현실 공간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은 웹툰이나 만화 원작들의 성패가 되기도 한다. 극화된 웹툰, 만화 원작이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됐을 때 그 명성에 비해 초라한 성적을 많이 내게 된 것은 그 주인공들이 밟고 있는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허영만 화백의 작품이 많이 리메이크되고 또 성공작도 있는 것은 적어도 그의 원작이 철저한 취재를 통한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드라마화 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도 마찬가지다. 윤태호 작가의 작품에는 허영만 화백에게서 배운 그 리얼리티가 바탕이 되어 있고, 또한 지극히 우리네 현실의 공기를 담아내는 정서가 깔려 있다. 그러니 리메이크를 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노다메 칸타빌레>는 만화 원작을 거의 그대로 만화 톤으로 드라마화 했고 <내일도 칸타빌레> 역시 여기에 한국적 정서와 배경을 깔지 않고 그대로 드라마를 리메이크했다. 그러니 드라마가 생뚱맞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마치 우리 드라마들이 방영되는 시간에 일본 드라마(아니 알 수 없는 국적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듯한 느낌이다.



드라마에 반드시 국적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곳의 현실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그것이 만화적 톤이든 뭐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생>이 다루고 있는 우리네 청춘들을 떠올려 보라. 한없이 좌절하고 심지어는 자책하는 그 청춘들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마음 아픈 공감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내일도 칸타빌레>의 청춘들에게는 그런 현실적인 공감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현실과 분리된 유리벽 속에서 차유진과 설내일의 음악적 성장과 사랑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들에게도 성장통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성장통이 우리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청춘들에게 주는 울림은 그리 크지 않다.

똑같은 클래식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지휘를 소재로 다뤘던 <베토벤 바이러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거기에 강마에(김명민)에게 “똥.덩.어.리.”라고까지 불렸던 지독한 현실에 처한 서민들의 얼굴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일도 칸타빌레>에는 이런 부분들이 거세되어 있다.

<내일도 칸타빌레>는 만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그 만화적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지금 <미생>의 장그래(임시완)처럼 하루하루를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는 너무 한가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이만수 기자 leems@entermedia.co.kr

[사진=KBS,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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