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빈과 유나의 만남, 모두에게 행운인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강아지상과 고양이상이 태반인 연예계에서 김옥빈의 마스크는 꽤 독특하다. 그녀의 얼굴 특히 무표정한 표정은 싸늘한 맹수의 분위기를 풍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척하는 아이돌 같은 미소보다 영화 <박쥐>에서처럼 먹잇감을 앞에 두고 짓는 섬뜩한 미소가 더 잘 어울리는 게 그녀다. 그렇다고 커다랗고 압도적인 사자나 호랑이과는 아니다. 그보다는 날쌔게 초원을 달리는 치타상에 가깝다.

치타를 닮은 얼굴 때문인지 김옥빈은 실제로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움직임이 재빠르고 시원스럽다. 그래서 정적으로 있을 때는 섬뜩함과 청순함이 느리게 공명하지만 움직일 때는 무언가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물론 정적인 표정과 동적인 움직임이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낼 때 그녀는 가장 독보적이다.

2009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서 삶이 피곤한 한복집 며느리에서 흡혈귀로 변해 욕망의 자유를 얻는 태주가 그랬다. 이 영화에서 김옥빈은 능숙한 연기는 아니지만 박찬욱의 카메라 안에서 꽤 멋들어진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표정과 움직임만으로도 영화는 날선 긴장감을 주다가도 어느 순간 질주하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옥빈의 대표작은 더 이상 박찬욱, 송강호와 함께한 <박쥐>가 아니라 최근 긴 여정을 마친 JTBC의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박쥐>에서의 김옥빈은 매력 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녀는 연기자라기보다 날 것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낸 맹수 같았다. 압도적일 만큼 ‘또라이’ 같은 힘이 넘쳤지만 과연 이 젊은 배우가 일상적인 연기를 소화할 수 있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나의 거리>를 통해 김옥빈은 소매치기이자 사람들과의 정을 통해 마음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인물인 본명 강춘옥 가명 강유나를 제대로 연기한다. 아니, 연기라는 말을 쓰기가 아쉬울 정도로 이 드라마에서 김옥빈은 유나와 그대로 일치한다.



그 배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과 픽션 속 인물이 지니고 있는 개성이 하나로 이어질 때 느껴지는 짜릿한 순간들이 <유나의 거리>에는 존재한다. 김희애가 억울한 표정과 지적인 분위기와 청승을 동시에 갖춘 후남이를 만났을 때, 김선아가 퉁퉁하고 어눌하지만 사랑스러운 옆집 친구 같은 삼순이를 만났을 때, 혹은 이보영이 깍쟁이처럼 얄미운 면과 안쓰러워 연민이 느껴지는 면을 동시에 갖춘 서영이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처음 <유나의 거리>에 김옥빈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을 때는 의아했다. <박쥐> 이후 뚜렷한 대표작도 없을뿐더러 그녀의 다소 차가운 분위기가 사람 냄새 훈훈한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와 어울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유나의 거리>의 첫 회에서 어두운 거리를 내달리는 유나를 보았을 때 이건 김옥빈이 적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무심하고 담담하게 힘껏 달리면서도 아름다운 야생동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배우는 흔치 않아서였다. 그리고 이 길거리의 야생동물 같은 소매치기 유나가 거리의 천사 같은 창만(이희준)이 숙식하는 가게에 숨어들면서 드라마는 시작한다.

김운경 작가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유나의 거리>의 인물들은 모순적이다. 그들은 오늘은 착했다가, 내일은 약아빠지고, 모레는 남의 등골을 빼먹으려다가, 그 다음날에는 사랑 때문에 눈물짓는다. 혹은 직업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소매치기인데 마음은 지극히 따뜻하거나, 직업은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검사인데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주 편협하거나. 하나의 인물만이 아니라 모든 인물들 각각이 이런 우둘투둘한 돌멩이 같은 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리 보면 저렇고, 저렇게 보면 또 이런데, 알고 보면 이해가 가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드라마가 <유나의 거리>다.



<유나의 거리>의 여주인공 유나 또한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라 모난 돌임에는 틀림없다. 소매치기 대부의 딸로 태어나 여자 소매치기의 전설이 된 젊은 아가씨. 주변의 길거리 친구들에게는 의리의 언니로 통하지만 남의 지갑을 훔치는 일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인물. 타인의 애정공세에는 낯간지러워하는 대장부 같은 성격이지만 창만의 사랑 앞에서 어느 순간 종종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천상 여자.

그런데 신기하게도 김옥빈은 이 복잡한 인물을 별로 힘들게 연기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유나이자 춘옥이자 어쩌면 옥빈인 길거리의 아름답고 깡 있는 누군가를 우리에게 ‘스윽’ 보여준다. 그러니 배우 김옥빈이 유나와 만난 건 행운이고, 드라마 <유나의 거리>를 통해 오랜만에 제대로 된 20대 여주인공의 연기를 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시청자로서는 꽤 큰 행운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JTBC, 영화 <박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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