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 아니고 이들이 올해 영화계를 이끌었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얼마 전 한국 갤럽에서는 ‘올해를 빛낸 인물–영화배우 부문’을 조사해 발표했다. 1등과 2등은 최민식, 송강호이고 류승룡, 하정우, 이병헌, 강동원, 설경구, 정우성, 현빈, 김수현이 뒤를 잇는다.

이 리스트는 여러 면에서 웃기지도 않는다. 일단 올해에 영화 한 편도 내지 않은 이병헌이 당당한 5위다. 드라마로 히트를 치긴 했지만 영화를 내지 않은 건 김수현도 마찬가지. 설경구, 정우성, 현빈이 과연 ‘올해를 빛낸 영화배우’의 위치에 오를만한 결과물을 냈는지도 수상쩍다. 그리고 여자배우들은 다 어디로 갔나.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사 대상 중 꾸준한 영화 관객들은 얼마 없었을 것이고 그들 중 상당수는 그냥 대충 대답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그냥 답변을 쓸 때 머리에 떠올라서 올라갔을 수도 있다. 대종상을 욕하시는 분들은 한 번 답변해보시라. 이 리스트가 대종상 수상결과보다 더 나은가?

연말 리스트나 영화상이란 게 다 그렇다. 다수의 투표는 게으르기 쉽고 소수의 심사위원은 편견에 차있기 십상이다. 평론가나 매스컴의 리스트도 괴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냥 1년을 돌이켜보고 좋았던 배우를 줄 세우면 될 거 같은데, 그게 이상하게 잘 안 된다. 남들이 거의 안 본 영화에 나온 배우도 빠지고, 연기는 좋았지만 영화가 나빠도 빠지고, 심지어 어떤 때는 다들 눈치 보는 동안 그냥 빠진다. 이런 식으로 누락되는 탈락자들을 보면 종종 올해 최고의 배우들도 섞여있다. 복수의 상과 복수의 리스트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양한 의견들이 공존하면서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갤럽의 리스트를 보다가 올해의 한국 배우 리스트들을 짜보기로 했다. 물론 이 리스트 역시 편견에 차 있고, 게으르고, (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게 다른 리스트가 남긴 구멍을 채워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넣지 않을 배우들을 열거해본다. 우선 최민식은 넣지 않는다. 그에게 2014년이 특별한 한 해였다는 건 안다. 천만 영화인 <명량>에 나왔고 미국에서 흥행 1위한 영어 영화인 <루시>에도 나왔다. 나는 심지어 그가 <명량>에서 피땀 어린 명연기를 했다고도 믿는다. 단지 그 영화에선 그가 대충 연기했어도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송강호도 넣지 않는다. 내 계산에 따르면 그의 <변호인>은 2013년 영화이기 때문에. 갤럽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중 넣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 강동원뿐이다. 배우로서 하정우는 여전히 믿음직스럽지만 그에게는 다른 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름은 가나다순이다. 극장 개봉작에서 주연을 한 배우로 한정한다.



◆ 강동원

올해 한국 남자 스타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 명성의 인플레 시달렸다. 송승헌, 차승원, 현빈, 장동건과 같은 스타들에 의지했다가 허물어진 수많은 영화들을 보라. 이들 중에서 배우로서, 스타로서 안정된 존재감을 보여준 건 강동원뿐이다. 그가 특별히 엄청난 명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은 안 든다. 하지만 대중에게 <군도>에서 그의 존재감은 훨씬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하정우를 가릴 정도였고 <두근두근 내 인생>의 철없는 아빠 역도 믿음직했다. 여전히 그의 연기폭은 제한적이고 기교적인 연기를 할 때보다 그 자신으로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배우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는 올해 자신이 가진 그 제한된 이미지의 자산을 누구보다 알차게 써 먹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스타가 할 일이다.



◆ 김수안

연기력과 스크린의 존재감만 따진다면 김수안은 당연히 올해 모든 신인여우상을 거머쥐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배우에게는 몇 가지 핸디캡이 있다. 일단 아역배우이다. 주연한 두 편(<콩나물>, <신촌 좀비 만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피크닉>)은 모두 단편이다. 정식 개봉된 영화인 <신촌 좀비 만화>는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 결과 최고의 명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망각과 무지의 림보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이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콩나물>과 <피크닉>에서 김수안이 보여준 연기는 단순히 좋은 ‘아역배우’ 연기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어린 연기자에게서 뽑아 낼 수 있는 사실적이고 시적인 어린이 연기의 끝이다.



◆ 박주희

올해의 신인으로 언급되어야 마땅하지만 영화상 리스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이름 중 하나가 박주희다. 올해 주연작이었던 <마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 영화에서 소름끼치는 신입사원을 연기했던 배우가 누군지 궁금해 했다. 하지만 <마녀>는 독립영화였고, 극저예산으로 만든 장르(스릴러/호러) 소품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영화에서 아무리 명연기를 펼쳐봐야 사람들은 상을 받을 자격을 주지 않는다. 뭔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뭔가 아닌 것’이 뭔지 물어보라. 아무도 대답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 ‘뭔가 아닌 것’이다.

박주희는 올해 가장 바빴던 배우이다. 장편 주연을 두 번 했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른 한 편인 <미성년>은 내년에 개봉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단편에 출연했으며 조연 출연작도 만만치 않다. 이들 중 일반 관객들의 시야에 들어올 영화가 몇 편이나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1,2년 안에 여러분은 이 배우의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 배두나

배두나의 이름이 연말 영화상 리스트에 오르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다. <도희야>에서 이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기교적인 ‘명연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두나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배두나가 영화 후반부의 취조 장면에서 보여주는 수치심, 분노, 슬픔, 위선, 두려움이 절묘하게 섞인 조용한 표정을 보라. 이 표정에 연기가 더 들어갔다면 영화가 더 좋아졌을까?



◆ 심은경

저 갤럽 리스트가 가장 어이가 없는 이유는 심은경의 이름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 배우가 출연한 <수상한 그녀>는 메시지가 수상쩍고 완성도도 평범했다. 하지만 8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본 히트작이었고 그 안에서 심은경이 보여준 젊은 여자 몸속에 들어간 할머니 연기는 한 번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데도 갤럽에 답변한 사람들은 이 배우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에 실패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답은 쉽게 나온다. 그들 대부분은 그냥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들이었던 거다.



◆ 안재홍

언제라도 우울함과 절망 속으로 침몰할 것 같은 한국 독립영화의 컴컴한 우주 속에서 <족구왕>은 한줄기 밝고 명랑한 빛이다. 그리고 안재홍의 수더분하고 낙천적인 얼굴이 없었다면 그게 가능했을까. 수많은 젊은 남자배우들이 발굴된 해였지만 내가 여전히 올해의 남자신인으로 안재홍을 미는 것은 이 컴컴한 시대에 그 대책 없는 낙천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관객들에게 감염시키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서 그건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 이선균, 조진웅

이선균도 리스트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배우이다. 좋은 배우지만 늘 한결 같아서 어느 포인트를 잡아 상을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 역시 그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 않은데, 올해는 조진웅과 묶어서 리스트에 올린다. 인공적인 느끼함이 줄줄 흐르는 브로맨스와 유사 BL의 시대에 이선균과 조진웅이 <끝까지 간다>에서 보여준 안티 버디 커플 연기의 화끈한 화학반응은 보는 내내 즐거웠다.



◆ 천우희

올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라면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한공주>의 천우희를 뽑는다. 성폭행 피해자라니, 이 나라 영화계가 심심할 때마다 여자배우들에게 툭툭 던져주는 역이다. 하지만 천우희는 쉽게 습관적인 묘사로 빠질 수 있는 캐릭터에 믿을 수 없는 깊이와 존엄성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그 나이 평범한 소녀가 가질 수 있는 자잘한 감정의 디테일까지 불어넣는다. 영화를 본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이 영화 속 천우희의 얼굴을 보면 울컥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느낌이 무엇인지 기억할 것이다.

올해 천우희만큼 평론가와 관객으로부터 압도적인 격찬을 받은 배우는 많지 않다. 전문 심사위원의 의견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청룡영화상에서 천우희가 상을 받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종상처럼 심사위원의 책임이 없고 인터넷 투표의 비중이 큰 행사일 경우엔 여전히 운에 기대어야 한다. 그게 무성의한 투표의 힘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공개된 청룡영화상 투표 결과에서 네티즌의 선택이 어땠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 최우식

김태용의 <거인>의 포스터만 보면 꼭 교복 입은 미소년 얼굴 파먹는 탐미주의적인 영화 같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그런 내용과 거리가 멀고 주연배우인 최우식도 그런 미소년 부류와 거리가 멀다. 그가 연기한 영재는 가톨릭 보호시설에 머물며 자신만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소악당이다. 관객들이 거짓말과 도둑질, 배신으로 점철된 이 캐릭터의 뒤를 100퍼센트 감정이입을 해가며 따라가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팔할이 최우식의 공이다. 호소하고 설득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관객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군도><신촌 좀비 만화><스틸컷><마녀><도희야><수상한 그녀><족구왕><끝까지 간다><한공주><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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