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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감독의 선택과 집중, 뭐가 문제일까
기사입력 :[ 2014-12-25 13:12 ]


‘국제시장’ 아무런 정치성도 없다고 시치미 떼지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국제시장>이 2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예상했던 일이다. 일단 영화의 만듦새는 좋은 편이니까. 황정민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우며, 김윤진, 오달수, 장영남, 라미란 등 조연들까지 출중한 연기를 보여준다. 촬영이나 미술 등 스텝들의 공로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우리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지던 흥남부두 장면이나 독일탄광 장면, 그리고 눈물의 이산가족 찾기 장면을 재현해낸 것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로 인해 새로운 집단기억의 심상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흥남부두 후퇴장면에서 느껴지는 추위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타이타닉>을 보았을 때 느꼈던 심리적 충격에 못지않다. TV로 이산가족 찾기를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과연 누가 저 날것의 장면을 연기해 낼 수 있을까 의심하였지만 황정민은 기대이상의 연기로 이를 재현해냈다. 영화는 한 세대의 경험을 재현해 냈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가 인정된다. 그 결과 중년층은 물론 노년층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강한 흡입력을 지니며, 연말에 모처럼 가족 단위의 관람객을 불러 모을만한 흥행성을 지닌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운 편이다. 슬프다, 감동적이다, 우리 아버지들이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등등. 그런데 이러한 감동을 얻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화세대에 바치는 헌사

영화는 부산 국제시장의 ‘꽃분이네’ 낡은 간판을 감싸며 날아오르는 나비의 비행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시작된다. 나비는 기억을 상징하는 매개체다. 노인이 된 덕수(황정민)는 “어릴 때 기억”을 묻는 손녀의 질문에 “쿵”하는 폭격음과 함께 넘어진다. 그의 기억은 전쟁에서 출발한다. 피난보따리를 이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도착한 덕수네 가족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까스로 미군 군함에 오른다. 덕수는 업고 있던 여동생을 놓치고, 아버지와도 헤어진다.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국제시장으로 내려온 덕수는 아버지가 남긴 “가장의 책임”을 아로새기며, 독일로 베트남으로 일을 떠난다.

<국제시장>은 덕수의 인생을 통해 산업화세대가 경험하였던 한국의 현대사를 풀어놓는다. 가령 스치듯 등장한 정주영의 환상적인 말(“돈을 벌어 땅을 산 뒤 거기에 투자를 받아 배나 자동차를 만들면 된다”)이 그대로 실현되었듯이, 1950년에서 1980년대 남한사회가 일군 ‘한강의 기적’을 키워드로 삼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평범한 가장들의 헌신을 조명하는 것이다.



영화는 “걸뱅이”소리를 듣던 덕수가 자기를 희생한 덕에 그의 가정이 온전한 중류가정의 모양새를 갖추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서울대학에 합격한 남동생의 학비를 위해 파독광부가 되고, 허영심 많은 여동생의 결혼밑천을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다. 그러는 사이 덕수의 가족은 집을 사고 가게를 산다. 그러나 덕수의 꿈은 영영 멀어지고 덕수는 장애를 입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찾기에 나선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던 덕수는 이제 노년이 되어, 가족들로부터 ‘괴팍한 노인네’ 소리를 들으며 사진 속의 아버지와 홀로 대면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산업화에 나선 우리 아버지들의 고생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제 살만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덕수는 산업화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영화는 ‘산업화세대에 바치는 헌사’이다. 심지어 윤덕수와 오영자는 윤제균 감독의 실제 부모님 이름이다. 감독은 부모님의 이름을 딴 주인공의 삶을 통하여 젊은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고생을 절감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영화가 세대 간 화합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친미, 독재, 반공, 극우

<국제시장>은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정치적인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그 흔한 4.19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주영, 앙드레 김, 남진, 이만기 등의 실존인물을 카메오처럼 끼워 넣으면서도 정치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 이유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 라고 답하였다. 물론 ‘선택과 집중’은 필요하다. 문제는 ‘선택과 집중’에는 필연적으로 의도가 개입된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주인공과 그가 관통한 시대로부터 최대한 정치성을 탈각시켜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태도로 인하여 영화는 일정한 정치성을 띄게 되었다.

영화는 흥남부두에서 미군의 군함에 올라타 월남한 피난민의 눈으로 한국전쟁을 기억한다.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미군은 당연히 구세주이다. 당시 이들의 마을을 폭격하던 주체도 미군이었다는 사실은 불문에 부쳐진다. 미군은 자신들의 군수물자를 내리고 피난민을 실음으로써 전쟁의 주체가 아니라 양민을 구조하는 평화의 사신이 된다. 물론 흥남철수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1만 4천명의 피난민이 월남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전쟁의 국면에서 미군은 노근리의 학살자이기도 하고 흥남의 구조자이기도 하였지만, 영화는 흥남의 구조자였던 미군을 월남민의 시각으로 조명하는 ‘선택과 집중’을 한다.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덕수는 “큰 배의 선장”이 되기를 꿈꾼다. 영화에서 미군의 큰 배는 ‘노아의 방주’이고, 이는 선망의 대상이다. 이후 구두닦이를 하는 덕수가 미군의 초콜릿을 구걸하는 행위에 수치심을 느꼈다하더라도, 손수 초콜릿을 건네는 미군이 은혜로운 존재라는 인상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는 마지막에 난리 통에 죽은 줄만 알았던 여동생이 미군에 의해 구조되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구세주로서의 미군의 존재를 재확인시켜준다.



독일광부로 지원하기 위해 덕수가 애국가를 부르며 “애국심 투철”의 도장을 받는 모습은 그와 국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는 오직 먹고 살기 위하여 애국심 강한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4.19나 5.16은 그의 뇌리에 없으며, 국가나 정권의 성격을 의문시한 적은 없다. 파월을 앞두고 아내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라”는 대화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와중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위해 일어서야 했을 만큼 ‘훈육된 주체’였다. 물론 그 시절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먹고살기에 바빠서 정치를 사유할 짬이 없었고, 독재정권의 애국논리를 내면화한 채 살았다. 문제는 덕수 같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 미군의 은혜로 사선을 넘어 남한에 왔으며, 북에서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냐?”는 질문에 수시로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 가난한 월남민으로서, 반공을 국시로 삼는 독재정권에 별다른 의문 없이 순응하였던 그가 어떤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이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아마도 그는 투철한 반공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그가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에 가서 어떤 행태를 취하였을까? 혹시 반공주의자로서 “빨갱이”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영화는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자신에게 은사를 베풀었듯이, 그가 베트남 소년에게 초콜릿을 건네고, 베트남 양민들을 배로 구출하느라 총상을 입는 모습을 보여준다. 베트남에서의 이 장면들은 한국전쟁 장면에 대한 오마주이며, 이는 영화의 대사(“많이 본 장면 같지 않냐?”)는 통해 확인된다.

영화는 이러한 겹치기를 통해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구세주였듯이,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구세주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파월 당시의 박정희 정권의 논리, 즉 ‘우리가 6.25때 자유우방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물리쳤듯이, 월남을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자’는 반공논리의 정확한 재현이다.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학살자이자 구조자 였듯이, 한국군 역시 베트남 전쟁에서 학살자이자 구조자로 활동했던 것은 이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이 종식된 지 40년, 한-베트남 수교를 맺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전이 미국의 명분 없는 개입으로 인한 전쟁이자, 베트남 민중이 승리한 반제국주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여전히 반공의 잣대로 전쟁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 소통부재의 진짜 원인은?

영화 <국제시장>은 친미, 독재, 반공, 극우의 논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대로 차용하면서 마치 영화에는 아무런 정치성도 없으며,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선의를 지닐 뿐이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덕수로 대표되는 아버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관심도 없다. 영화는 덕수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청혼하는 덕수에게 영자가 자신에 대해 잘 모르지 않냐고 질문하자 덕수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아마도 장녀일 것이고, 가족에게 월급을 전부 부칠 것이고...” 라고 말한다. 덕수가 영자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일 거라는 사실 외에 별 관심이 없듯이, 영화는 덕수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장남으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영화가 부여한 덕수 캐릭터의 모든 것이며, 영화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지 않는다.

월남민으로 부산에 정착하여 파독과 파월의 경험을 지닌 그는 중년이후 집과 점포를 소유한 자영업자로 살아간다. 그런 그가 이주노동자를 놀리는 청소년을 혼내는 장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실 청소년들의 쇼비니즘은 바로 덕수와 같이 반공과 독재의 시절을 먹고 사느라 의문 없이 관통해 온 산업화세대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었던가. 한국전쟁에서 보았던 미군의 역할을 베트남전에서 대리하고 싶어 하였던 영화적 무의식을 파독경험에 적용해보면, 오히려 덕수가 인종차별을 행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실제로 인종차별을 겪었던 사람들이 자신보다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모습이 더 흔하게 관찰되지 않던가. 덕수는 어떻게 비슷한 경험을 한 세대들이 쉽게 빠지는 극우적 정치성향을 벗어나서 파독의 경험에서 역지사지를 통해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가 월남전에서 만났다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부산지역에서는 드물게 남진을 응원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쇼비니즘과 지역감정에 물들지 않은 착한 노인 덕수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세대 간 화합이라는 영화의 취지에 부응하기 위하여 감독의 머릿속에서 급조된 이상적인 존재가 아닐까.



<국제시장>은 산업화세대의 아버지들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극우적 정치성을 외면하면서, 세대 간 화합에 껄끄럽지 않을 허구적인 존재를 발명해낸다. 아버지 세대들이 고생을 한 사실을 부정할 사람들은 없다. 문제는 단지 그들이 고생한 존재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생으로 말미암아 소통할 수 없는 반동적 주체가 되었으며, 여전히 현실에서 정치적 힘을 발휘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산업화세대의 노인들이 덕수처럼 쇼비니즘과 지역감정에 물들지 않고 역지사지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들과 소통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으랴. 진짜로 소통이 불가능한 원인은 영화가 애써 외면한 아버지세대의 반동성에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원인이 단지 노인의 희생을 모르는 가족들의 무심함에 있다는 듯 거실에서 웃음 짓는 가족들과 방안에서 눈물짓는 덕수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끝맺는다. 영화를 보고 눈물짓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 눈물로는 어떠한 성찰이나 화해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진정한 비극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국제시장>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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