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 카펫이 궁금한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시상식이나 영화제 결과가 나올 때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남이 주는 상에 간섭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은 없다. 그리고 그 상을 주는 영화제나 기타 단체가 단일한 의지와 연속성이 있는 주체라고 여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쓸데없다. 대부분의 경우 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자연현상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현상은 시간이 남아도는 업계 사람들이 인기투표로 주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대부분 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접하는 심사위원들과는 달리 아카데미 회원들은 몇 개월 동안 온갖 종류의 광고, 비평, 입소문의 영향을 받으며 투표 결과에 별다른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의 심미안, 의도, 의지를 의미있는 평가 대상으로 봐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 결과를 무시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 행사를 무게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그것 자체가 습관화되면 그 자체가 무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게를 즐긴다. 냉소주의만 갖고 버티다간 시상식의 드라마도, 베가스의 도박꾼들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재미인가. 그 무게를 받아들이고 그 놀이에 끼어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2015년 아카데미 후보 리스트가 논란이 되었던 것도 모두가 이 행사의 무게 그리고 그 가상의 무게를 만드는 주체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음 질문을 보자. "올해엔 흑인 배우들이 한 명도 없네? 심지어 마틴 루터 킹이 주인공인 영화(<셀마>)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배우 부분 후보자가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나?" 만약에 이것이 한 평론가 개인의 리스트라면 이 질문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영화 선택이란 원래 주관적이기 마련이고, 올해 아카데미가 내민 후보자 리스트는 비교적 준수한 편으로 이들 중 억지로 누락되어야 할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인종배분에 신경을 쓰는 것은 아카데미가 단순히 작년의 우수작을 뽑는 행사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계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반영하는 상징적 존재임을 우리가 이미 인정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후보작 리스트는 단순히 좋은 영화 리스트로 끝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번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재미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위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구체적인 존재가 없는 행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쇼를 짜고 대본을 쓰고 상을 타러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재미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 행동하는 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다.

위에서 <셀마> 이야기를 했는데, 별 생각없이 시상식을 본 관객들은 올해 연기상 후보에 오른 배우 중 흑인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상을 주러 옥타비아 스펜서, 바이올라 데이비스, 에디 머피와 같은 쟁쟁한 흑인 배우들이 올라왔고 상의 주체인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셰릴 분 아이작스 회장은 이 자리에 오른 첫 흑인여성이다. 무엇보다 <셀마>가 주제가상을 받을 때 시상식장에 있었던 스타들의 열렬한 환호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상이었지만 거의 작품상과 같은 임팩트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작품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물론 좋은 작품이라 믿는다) 이 영화를 지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의견이 쇼를 만든 사람들과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은 아카데미 수상 결과와는 달리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다.

이보다 더 주목받은 것은 아카데미에 불어닥친 페미니즘 열풍이었다. 리스 위더스푼의 주도 아래 작품 보다는 패션과 손톱에 더 집착하는 아카데미 레드 카펫 중계에 대한 거부가 이어졌고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패트리샤 아퀘트는 감사 인사 뒤에 평등 임금과 여성 인권에 대한 연설을 덧붙인 뒤 메릴 스트립을 포함한 수많은 동료들의 환호를 받았다. 올해 아카데미는 단 한 명의 흑인 배우를 후보에 올리지 못한 것처럼 단 한 명의 여성 감독도 후보에 올리지 못했지만 (흑인 여성 감독이 만든 <셀마>는 양쪽 모두에 해당된다)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두 영화는 모두 자신과 동료 여자배우들에게 가치 있는 역할을 주기 위해 위더스푼 스스로가 제작한 작품들이었다. 이는 이들의 노력이 단순히 연설로 그치지 않고 실제 작품에 반영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닐 패트릭 해리스의 사회 아래 진행된 이번 행사는 동성애, 장애 심지어 이주민 인권에 대한 연설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 <이미테이션 게임>의 각색자 그레이엄 모건이 외친 "Stay weird. Stay different."는 패트리샤 아퀘트의 연설과 함께 올해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선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분위기가 과연 이전과 특별히 다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아카데미상을 받으러 카메라 앞에 선 수상자들은 수억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아메리칸 원주민의 처우 문제를 내세우며 수상을 거부한 말론 브랜도와 같은 사람들을 보라.) 단지 올해는 몇몇 사람들의 돌출 행동으로 끝나지 않고 출연자들이 연대가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연대는 사전에 조직된 것이기도 했고, 각본에 따른 것이기도 했으며, 즉흥적인 분위기를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이번 행사에 놀랄만큼 일관된 방향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중 일부는 단순한 분위기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다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 카펫 중계가 궁금하지 않은가? 과연 그 사람들은 내년에도 여자배우 손톱을 찍는 작은 카메라를 가져올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YTN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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