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혁명이라는 이름의 희생과 잔인성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를 뚫고 피어난 영원한 사랑이야기가 예술의전당 무대 위에 펼쳐졌다.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국립오페라단 ‘안드레아 셰니에’는 베리스모 오페라(verismo 사실주의)라는 타이틀 속에 감추어진 마법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한 시공간적 조합을 시도함으로써 현실을 더 정확하게 각성하게 된 것.

무엇보다 무대와 의상, 조명, 안무에 연출까지 1인5역을 한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의 활약이 돋보였다. 새하얀 무대 위 계단과 벽 곳곳에는 프랑스혁명의 후유증을 상징하는 듯 곳곳에 금이 가 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라질 것 같은 그 곳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감이 감돈다. 총 4막의 작품에서 1막과 3막, 2막과 4막을 짝을 지어 전복된 현실을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가듯 파헤친다.

특히 화려한 샹들리에가 전면을 차지한 1막과 이를 뒤집은 3막은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형물 거미-마망을 떠올리게 했다. 이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희생과 잔인성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2막은 불끈 쥔 주먹 형상을 턴테이블 위에서 돌리며 혁명의 칼날과 폭력이 민중들 모두를 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마지막 4막은 곳곳에 홈이 빠진 잘린 얼굴을 내세웠으며 상공에는 ‘인민의 면도날’이라 불리던 단두대, 기요틴이 설치되어 있다. 혁명의 주먹이 곧 공동묘지로 전복된 것.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억압하는 혁명 앞에선 두 남녀는 “우리들의 죽음은 사랑의 승리다”고 외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죽어간다.

“역사와 문명의 순환에 대한 거대한 수수께끼”를 담아 낸 이번 작품에서 스테파노 포다는 “이번 연출의 목적은 이 무대를 통해 관객 중 누군가는 보다 한 층 넓고 깊은 차원에서 음악이 지닌 고유의 의식과 힘에 대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순간은 우리의 껍데기보다 훨씬 거대한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한 조각일 것이다.”고 연출의도를 전했다.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명작 ‘안드레아 셰니에’는 프랑스 대혁명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투쟁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실존 시인 앙드레 셰니에(1762~1794)가 주인공이다. 혁명기의 지식인 셰니에와 백작의 딸 맏달레나와의 비극적인 사랑, 맏달레나의 집안의 하인으로 연정을 품고 있는 제라르의 드라마가 얽혀있다. 국립오페라단이 <안드레아 셰니에>를 공연하는 것은 1962년 창단 이후 처음이다.

귀족들의 춤곡 ‘가보트’를 ‘엘레지’로 해석해 또 다른 긴장감을 유발해 낸 이번 작품은 흑백 대비를 통해 옛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을 부각한 오페라이다. 분칠과 분장으로 허망하게 늙어가는 자아를 잃은 귀족들 사이에서 셰니에, 막달레나, 제라르 등은 까만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이 외에도 80여명의 합창단(그란데 오페라 합창단)과 30여명의 연기자ㆍ무용수(진아트컴퍼니)가 동원됐다. 주요 아리아가 불러질 때에도 하나의 그림을 감상하듯 군중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드라마의 연결을 촘촘하게 이어나간 점이 인상적이다.

‘안드레아 셰니에’는 영화 '필라델피아'에 삽입돼 유명해진 막달레나의 아리아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이다. 안드레아 셰니에를 향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내는 맏달레나 역은 최근 빈국립극장의 새로운 디바로 급부상하고 국내 오페라 무대에 첫 데뷔하는 소프라노 고현아와 김라희가 열연했다. 두 주역 모두 온 몸을 내던져 열연한 것은 물론 정서적 공감을 담아 깔끔한 가창을 들려줬다.



이번 공연의 안드레아 셰니에 역은 명징한 미성과 강렬한 표현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력파 테너 박성규와 테너 윤병길이 맡았다. 초반 ‘즉흥시(L'improvviso)’에서부터 관객들의 귀를 사로 잡은 두 주역들은 마지막 사랑의 이중창을 들려주는 단두대 장면까지 많은 박수를 이끌어냈다.

안드레아 셰니에와 맏달레나 사이에서 고뇌하는 카를로 제라르 역은 이탈리아 출신의 바리톤 루치오 갈로와 한국이 낳은 독보적인 차세대 바리톤 한명원이 맡아 유명 아리아 '조국의 적'(Nemico della patria)을 유창하게 소화했다.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연계 돼 “조국은 시인들을 죽이는 이곳이 아니란 말이오!”의 의미 역시 더욱 잘 전달됐다.

이외 밀정 역 테너 민경환의 존재감, 극의 시작과 마지막을 책임지는 집사 및 간수 역의 바리톤 한진만의 매력적인 목소리 역시 돋보였다. 메조소프라노 정수연, 양송미, 양계화, 김지선, 바리톤 박정민, 조규희, 베이스 전준한, 이진수, 장영근, 테너 전병호 등이 열연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이끈 지휘자 다니엘레 칼레가리의 유려한 조율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모두 세 차례나 휴식시간이 있었음에도 작품이 빨리 끝나지 않길 바랄 정도로 관객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국립오페라단은 최근 단장 사퇴와 관련 해 잡음이 많았다. 그럼에도 2015년 첫번째 작품,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는 수 많은 이들의 땀과 노력이 엿보이는 무대였으며, 로비에 메이킹 필름 영상을 내보내 관객들의 이해를 도운 점 역시 칭찬할 만했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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