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오동진의 영화가이드] 경쾌하고 밝은 로맨틱 코미디인 척, 의뭉을 떨지만 <러브&드럭스>는 사실 블루 칼러 색채의 영화다. 속내를 알고 보면 우울하고, 또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음탕하리만큼 야한 대목도 적지 않다. 적어도 이 영화 속 주인공 남녀는 잠자리에 관한 한 쉽게 행동한다. 아니, 쉽게 행동하려고 애쓴다. 여주인공 매기(앤 헤써웨이)는 제이미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대뜸 이렇게 얘기한다. “렛즈 고우!” 이런저런 군소리 필요없이 곧바로 잠자리를 하러 가자는 얘기다. 그것이 당신이, 남자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할리우드의 장인형 감독답게 연출솜씨가 매끈하다. 맵시가 있다.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즈윅의 장점이자 또 한편으로는 자칫 한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회적 이슈’를 영화 속에 늘 녹여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때는 매우 괜찮아 보이지만(<블러드 다이아몬드>, 2006년작) 또 어떤 때는 다소 엉성해 보인다.(<비상계엄>, 1998년작) 이번 신작 <러브&드럭스>는 후자에 속한다. 청춘남녀의, 비교적 격렬한 사랑이야기를 전진배치시켜 놓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우리 모두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고민해야 할 것들, 궁극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뛰어난 머리를 가졌지만 의대를 중퇴하고 영업사원으로 살아가는 제이미는 굴지의 제약회사로 불리는 파이자에 막 입사한 상태다. 그의 영업솜씨는 대부분 매끈한 외모와 살인적인 미소 덕이다. 대부분 그가, 접하는 여자와 동침하게 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하지만 파이자 영업사원으로서는 숨이 턱에 달린다. 그가 팔아야 할 상품은 항우울성 치료제 졸로프트다.

하지만 항우울성치료제라면 영국 글락소 스미스 클라인의 프로작이 이미 전세계 제약업계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이미의 좌충우돌 행각은 여기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26살의 젊은 나이에 파킨슨병에 걸린 여자 매기를 만나게 된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파이자 회사가 바이아그라를 시판하게 되면서 제이미가 졸로프트의 판매실적까지 올리며 승승장구하게 되는 과정과 또 한편으로는 파킨슨병 때문에 진지한 관계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며 의도적으로 잠자리에만 탐닉하려는 매기와의 연애담을 병치시킨다. 두 가지의 에피소드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떠돌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공과 좌절, 야망과 사랑, 행복과 고통이라는 댓구를 절묘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이한 하모니의 느낌으로 모아져 간다.

어찌 보면 ‘제약회사=영업사원=바이아그라’로 관통되는 키 워드는 자본주의사회의 극단적 욕망을 대변한다. 제약회사는 한줌의 원료비로 초절정 거액의 부를 거머쥐려는 한탕주의 산업이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 정도로 ‘육탄 마케팅’의 대가들이다.



바이아그라 역시 죽어있는 성기를 지속적인 잠자리가 가능하게 할 만큼 살아나게 한다는, 절대적 욕구를 상징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늘 그런 욕망을 좇게 만든다. 피로와 위기감을 느낄지언정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파킨슨에 걸린 주인공 매기의 손과 몸처럼 늘 떨리고 흔들릴 뿐이다. 아무리 욕망을 채운다 한들 가장 기초적인 것, 자연적인 무엇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욕망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매기가 제이미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욕망의 끈을 좇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러브&드럭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제이미의 뒤를 좇아 시카고의 제약박람회에 갔던 매기가 우연히 파킨슨병에 걸린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파킨슨병 1기인 자신에 비해 3기,4기에 걸려 이미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미 그들은 정서적으로 파킨슨병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건강이 아니다. 그들이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생명의 부지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눈을 감기 전까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존엄성을 회복하고, 또 회복 받고 싶어한다. 매기가 깨달은 것, 그리고 제이미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점은 바로 그 존엄성에 대한 문제다. 존엄은 사랑보다 약간은 우위다.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종종 사랑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매기가 끝내 제이미를 떠나 보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매기의 선택이야말로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러브&드럭스>를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할리우드産이 아니라 인디펜던트 계열의 작품이었다면 마무리를 좀 달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라면 둘은 갈라서는 게 맞다. 그게 리얼하고 옳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희망이다.

에드워드 즈윅이 선택한 결말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그걸 탓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은근히 즈윅의 결말대로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러브&드럭스>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에 대해 답을 주는 영화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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