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시라와 김희선의 놀랍지만 이유 있는 연기변신

[엔터미디어=이만수 기자] 망가져도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MBC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을 기억하는 중년들에게 채시라는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마음 속 연인이었다. 그녀는 초콜릿 CF로 당대의 청춘들의 가슴을 녹이는 여인이었다. KBS1에서 방영됐던 <왕과 비>에서는 인수대비 역할로 정치9단의 면모를 과시했고, KBS2 <해신>에서는 자미부인으로 그 우아함과 냉철함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렇게 모든 걸 내려놓다니 놀랍기만 하다. KBS2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채시라는 과연 이 배우가 과거의 그 배우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바닥을 보여주고 있다.

화장기가 거의 없거나 혹은 너무 과하거나 혹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건 아마도 김현숙이라는 극중 인물에 100% 몰입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김현숙은 엘리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학창시절 공부도 못했고 레이프 가렛의 열혈 팬으로 학교에서 도망쳐 그의 귀국길 마중까지 나갔던 캐릭터다. 그런 그녀를 엘리트 지상주의자인 담임 나현애(서이숙)는 편견으로 대한다. 결국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까지 쓰고는 퇴학당한 그녀는 이 트라우마로 딸을 교수시키려는 마음이 집착에 가까워진다.

정 많고 흥이 많지만 한도 많은 인물. 채시라가 지금껏 연기해온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열등감 덩어리의 인물이 김현숙이다. 엘리트주의 세상에 대한 편견을 꼬집는 캐릭터지만 채시라로서는 이렇게 바닥까지 드러내는 인물로의 변신이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터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발갛게 충혈된 채시라의 연기를 볼 때면 그래서 저 과거의 여옥의 그림자나 자미부인의 자태를 떠올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한없이 자신을 무너뜨려 김현숙이라는 인물에 가까워질수록 채시라라는 배우의 아우라는 더 짙게 다가온다.

한편 연기력 논란의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던 김희선은 KBS2 <참 좋은 시절>에서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더니 이번 MBC <앵그리맘>에서는 억척스런 엄마로의 변신에 액션까지 더했다. 사실 여고생 엄마가 다시 학교폭력을 당한 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등학교에 가는 설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역할은 아니다. 일단 동안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안이라도 거기에 그만한 연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또 쉽지 않은 배역이다.



김희선은 그런 점에서 보면 조강자라는 역할을 꽤 잘 소화해내고 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예쁜 척 하는 배역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좀 더 자신을 낮춰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연기자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간 멜로에서 소비되던 예쁜 역할은 그런 점에서 보면 김희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뿐이다.

김희선은 <앵그리맘>에서 엄마로서의 모성애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통쾌한 액션 연기까지 펼쳐야 한다. 게다가 그녀 앞에 나타난 진짜 선생님 박노아(지현우)와의 관계 역시 발전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여러 모로 김희선이 그간 가졌던 자신의 이미지의 껍질을 벗겨내는데 이만한 역할이 없는 셈이다. 김희선에게서 엄마와 액션 연기라니. 놀랍지 않은가.

채시라나 김희선의 연기변신은 이제 그들이 중견 연기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때 젊은 시절을 구가하다 나이 들면 슬쩍 자리를 비우는 게 많은 여배우들의 행보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처럼 어엿한 중견으로 자리해 자기 역할을 해내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는 그녀들은 드라마업계로서는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외모로 소비되지 않고 나이가 연륜이 되는 연기의 길. 많은 여배우들이 추구해야할 궁극의 길이 아닐까.

이만수 기자 leems@entermedia.co.kr

[사진=K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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