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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김태우라서 가능한 찌질한 왕의 결정판
기사입력 :[ 2015-05-10 12:58 ]


‘징비록’ 찌질이가 권좌에 앉으면 온 나라에 화병이 퍼진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사극 <징비록>은 평타는 치고 있으나 작품자체가 빼어난 품위를 자랑하는 사극은 아니다. 물론 전작이었던 <정도전> 이후 정통사극에 대한 대중의 입맛이 조금 까다로워졌을 수도 있다. <정도전>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준 현대적인 정통사극이었다. 그에 비하면 <징비록>의 흐름은 밋밋하고 인물들의 성격은 평면적인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정통사극의 강점인 박력 있는 긴장감 또한 이 드라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심심한 사극 <징비록>이지만 이 드라마는 선조를 통해 제법 흥미로워진다. 선조는 그간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으로 인식된 존재였다. 왜적을 피해 한양에서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파천한 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연산군처럼 어마어마한 폭정으로 드라마틱한 생애를 보여준 왕은 아니었다. 태종, 세종, 세조, 숙종, 영조, 정조처럼 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에피소드가 많은 왕도 아니었다. 결국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 선조는 언제나 드라마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있곤 했다. 이순신, 광해군, 다음의 인물 정도로 취급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징비록>에서 선조는 비록 도망치는 왕이나 늘 이 드라마를 쥐고 흔드는 인물이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선조라는 왕의 신경질적인 ‘찌질함’을 부각시킨 것도 있지만 이 선조를 통해 ‘찌질미학’을 완성한 배우 김태우의 힘도 제법 크지 않은가 싶다.

김태우가 연기하는 선조는 기존의 선조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사극에서의 왕들과도 다르다. 과거 왕좌의 자리란 곧 그 나라 자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왕좌에 앉은 왕은 그 권력을 안하무인으로 삿되게 휘두르다 쫓겨나거나, 아니면 그 권력의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성군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하지만 <징비록>의 선조는 왕좌에 앉기엔 너무나 인간적이고 나약하고 갈대 같은 인간이다. 그는 힘을 지녔지만 굳건하지 않다. 그는 지혜를 지녔지만, 그 지혜를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한다. 그는 인간미를 지녔지만, 그 인간미는 종종 찌질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언제 언제 군사들이 내려온단 말이오? 하긴 어떤 군사들이 어떤 백성들이 이 우매하고 덕없는 과인을 위해 싸우겠소. 내 당해도 쌉니다. 당해도 싸요.” (김태우)

이런 선조의 모습들을 김태우는 과거 그의 연기경력을 바탕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데뷔 초반 그는 공부는 잘하지만 숫기는 없는 청년의 이미지가 강했다. 살짝 뭉개지는 어눌한 발음, 순해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멍해 보이는 처진 눈, 거기에 어색하게 짓는 미소까지 그리하였다. 이런 그의 모습은 평범한 멜로드라마에서는 순정파 남자주인공의 역할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성식 일병처럼 거대한 사건 속에 내던져진 나약한 인간을 보여주기에도 적절했다.

여기에 드문드문 묻어나는 지적이고 숫기 없는 남자의 찌질함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준 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김태우는 배우 김상경과 투톱으로 수컷들의 찌질함을 드러낸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보여주는 두 배우의 찌질함은 미묘하게 다르다. 김상경이 태생이 찌질하여 그 찌질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남자를 주로 묘사했다면 김태우는 나름 엘리트라 자기가 찌질한 건 아는 데 그걸 들키지 않으려다 신경질적으로 더 찌질해지는 남자를 주로 연기했다.

김태우의 이런 찌질한 남자 연기는 <징비록>의 선조를 통해 사극적인 분위기와 어울리며 나름 찌질미학의 정석을 보여준다. 김태우의 선조는 역대 사극의 왕 중 가장 잘 토라지고, 가장 신경질적이며, 가장 자기비하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주의 위엄을 보이려다 신하들이 반기를 들면 순간 맥없이 눈을 아래로 내리 깐다.



“그래요, 죽지요. 내 이곳에서 죽겠습니다.” (선조)

신하들의 충언이 듣기 싫으면 군주로선 차마 할 수 없는 황당한 말로 신하들을 어이없게 만든다.

“대궐을 불태운 백성들을 보시오. 그 놈의 백성, 백성, 백성이 도적이 되어 과인을 버렸다, 이 말이오.” (선조)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비하가 섞인 황당한 궤변까지 늘어놓는다.

“알아요, 압니다. 허나, 이 못난 과인은 이 나라와 백성의 중심에 설 자격이 없는 위인 아닙니까?” (선조)

김태우는 현대극의 엘리트 찌질이를 조선시대 권좌에 앉은 찌질이로 자연스레 옮겨온다. 솔깃한 말에 순박한 미소를 보이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금방 힘 잃은 두 눈을 보여준다. 왕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힘 빠진 목소리에 찌질한 감성을 모두 싣는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김태우가 리얼하게 연기하는 <징비록>의 선조를 통해 새로운 사극의 코드 하나를 깨달을 듯하다. 권좌에 폭군이 앉으면 궁궐에 피바람이 분다. 허나 권좌에 찌질이가 앉으면 궐내는 물론 온 나라에 화병이 퍼진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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