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심, 선과 악을 넘나드는 묵직한 카리스마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80년대 고두심은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마을회장댁 맏며느리였다. 지혜롭고 마음이 넓고 시부모님께 깍듯한 전형적인 효부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건 1980년대 후반 KBS 주말극 <사랑의 굴레>에서 기업가의 아내 한정숙으로 출연했을 때였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유행어 “잘났어, 정말!”을 유행시킨 고두심은 이 드라마에서 기존의 효부와는 완벽하게 다른 인물을 보여준다.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여인 정숙은 히스테릭한 인물로 드라마는 점점 그녀를 파멸로 몰아간다. 한편 남편 박인섭(노주현)은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온 얌전한 아가씨 이선미(김미숙)에게 마음이 기운다. <사랑의 굴레>는 극 초반 정숙이 남편과 가정교사를 의심하는 과정을 아내의 의부증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정숙의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극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그런데 이 <사랑의 굴레>의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의 줄거리와 상관없이 모든 극의 중심이 고두심이 연기한 한정숙에게 기울었다는 사실이다. 한정숙은 <사랑의 굴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챙이 넓은 요란한 모자로 상징되는 그녀의 화려한 옷차림, 트러블메이커지만 가끔씩 보이는 공허한 표정, 남들이 뭐라고 충고하면 살짝 빈정대듯 고개를 꺾으며 내뱉는 “잘났어, 정말!”까지. 말 그대로 마음씨 맑은 ‘화이트 두심’ 역할을 십 년 가까이 해 온 배우가 어느 순간 ‘블랙 두심’의 사악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했다고 할까?

하지만 <사랑의 굴레> 이후 고두심은 다시 ‘화이트 두심’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번에는 전원일기의 맏며느리보다 더 먹먹한 역할들이 그녀의 몫이었다. 1990년 MBC 미니시리즈 <마당 깊은 집>에서 그녀는 한국전쟁 이후 새끼들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엄마를 연기한다. 그 이후로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중들이 고두심을 기억하는 건 억척스럽고 너무 열심히 살아서 우리를 죄스럽고 먹먹하게 만드는 착한 엄마의 모습이다. 1997년 MBC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랬고 2004년 MBC 드라마 <한강수타령>에서도 그러했다.



2004년 KBS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그렇게 착하게 살다 마음에 멍이 든 엄마의 모습까지 연기했다. 이른 나이에 치매가 온 이 드라마의 엄마 이영자가 큰 딸 김미옥(배종옥)앞에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가슴팍에 빨간약을 바르는 장면만큼 절절하게 슬픈 순간은 없었다.

‘화이트 두심’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는 중간 중간에도 고두심은 ‘블랙 두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가 극의 중심이 아니라 양념 같은 역할로 등장하는 작품에서 그러했다. 특히 MBC <인어아가씨>에서 유명 부티크를 운영하는 조수아로 등장했던 그녀는 <사랑의 굴레>의 한정숙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그녀를 떠올리기엔 좋은 캐릭터였다. 특히 부티크의 단골고객이자 친구인 심수정(한혜숙)과 육탄전으로 치고받는 싸움 장면은 아직 ‘블랙 두심’이 남아 있다 싶을 만한 장면이었다.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 동안 배우 고두심이 연기하는 착한 엄마들은 빛이 바랜 감이 있다. 착하고 억척스러워서 먹먹한 엄마보다 대중들은 이제 재미있는 엄마, 말이 잘 통하는 엄마, 멋진 엄마를 더 원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고두심은 옛날 엄마의 전형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몇 년 동안 착한 엄마가 주인공을 위해 너무 쉽게 소비되는 드라마에서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SBS <상류사회>에서 고두심은 오랜만에 꽤 괜찮은 캐릭터와 만난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사모님으로 등장하는 민혜수는 먹구름 같은 여인이다. 재벌가의 사모님이지만 화려하기보다 인내가 몸에 밴 인물이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 등등을 참고 살아온 세월 때문에 마음속의 응어리를 아들에 대한 집착이나 막내딸에 대한 미움 등으로 풀어헤친다. 그 때문에 이 여인을 보고 있자면 ‘화이트 두심’과 ‘블랙 두심’의 양면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더구나 드라마 속의 민혜수는 아들의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죽음 때문에 고상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폭발시키기에 이른다. 이번 ‘블랙 두심’은 <사랑의 굴레>의 정숙처럼 히스테릭하기보다 음산하고 묵직하다.

“이제는 인간한테만 인간대우를 해줄 거야.” (민혜수)

민혜수는 남편 곁에 붙어 있는 첩의 머리채를 흔들고, 얼마 남지 않은 남편의 머리카락을 잠자리에서 마구 쥐어뜯는다.

“폭력을 이래서 쓰는구나, 좋다.” (민혜수)

SBS <상류사회>는 오랜만에 ‘화이트 두심’에서 ‘블랙 두심’으로 변신하는 고두심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다. 어쩌면 과거 <사랑의 굴레>에서처럼 이번 <상류사회>에서도 드라마의 실질적인 여주인공은 고두심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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