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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비수사’가 전해준 ‘살려야 한다’의 참된 의미
기사입력 :[ 2015-06-25 12:58 ]


‘극비수사’, 무엇이 이 아이를 두 번이나 살렸을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 영화는 많이 있었다. 잘 알려진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만 해도 <그놈 목소리>와 <아이들> 등이 꼽힌다. <극비수사> 역시 실종된 아이를 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잘 알려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78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부산 효주양 사건.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결말을 모두 기억한다. 젊은 세대 역시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볼 수 있으니, 이 영화의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스포일러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 1978년 부산 효주양 사건은 유괴된 지 33일 만에 아이가 살아 돌아온 매우 드문 사건이다. (이후 아이는 한 번 더 유괴되지만 두 번째도 살아서 돌아온다!) 정말 운이 좋아서 일까.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바로 그것이 궁금하다. 영화가 익히 알려진 사건을 다룰 때, 어떤 결말이 나는지가 관건일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이며, 이 영화의 경우 어떻게 이 사건에서만은 아이가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토록 흉악하고 허무한 유괴영화들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어왔던 관객들이라면, 한번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유괴영화가 보고 싶다. 그 과정을 보며 위안을 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그러한 성공이 가능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극비수사>는 바로 그 지점을 나지막이, 그러나 신실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영화다. 과연 아이를 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 무엇이 아이를 살렸을까?

한 아이가 두 번이나 유괴를 당했던 ‘부산 효주양 사건’은 높은 현상금에 대통령 담화문까지 곁들여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또한 처음으로 최면 수사 기법이 도입되어, <수사반장>에 맞서 TBC에서 새로 출시한 수사드라마 <형사>의 첫 회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첨단 수사기법인양 소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높은 현상금, 대통령 담화, 첨단 수사기법 등이 효주 양을 집에 돌아오게 한 것일까.

아니다. 영화 <극비수사>는 떠들썩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던 사건의 이면에 집중한다. 효주양이 처음 유괴되었을 때, 공개수사를 하면 범인이 아이를 해칠 우려가 있다며, 끝까지 극비수사의 원칙을 고수하였던 형사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아이는 이미 죽었을 거라 말할 때, 반드시 살아 있다고 말했던 역술인이 있었다. 공길용 형사와 김중산 도사가 그들이다. 감독은 사건을 영화로 옮기면서 효주양의 이름은 은주로 바꾸었지만, 두 사람의 실명은 그대로 가져온다. 감독은 공길용 형사(김윤식)와 김중산 도사(유해진)이 서로 조력하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익숙한 버디물의 형식을 통해 37년 전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런데 형사와 역술인의 버디물이라니,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수사극 특히 실화를 소재로 한 수사극이라면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장르인데, 초현실적인 역술의 세계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물론 수사물에 역술인이 등장한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도저히 사건의 단서를 찾을 수 없을 때, 형사는 주술의 힘이라도 빌리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이는 임의적이고 일회적인 것이었다. <극비수사>의 경우 이들의 만남은 훨씬 필연적이다. 애초에 사건해결의 적임자로 공길용 형사를 끌어들인 것이 역술인이다. 공길용 형사의 사주만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김중산의 말에 따라 공길용 형사는 관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투입된다.

두 사람은 조력관계를 이루지만,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이 처음부터 순탄할리는 없다. 영화 초반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공길용은 역술인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돈이나 갈취하는 사기꾼쯤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것은 공길용만의 생각이 아니다. 다른 형사들은 사건에 대해 뭔가 말한 김중산이 의심된다며, 다짜고짜 그를 잡아다 고문한다.

김중산을 믿지 않는 것은 극중 형사들만이 아니다. 처음 은주의 어머니가 “우리는 우리대로 알아본다”고 하고 역술인의 집을 드나들 때, 관객의 대부분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미개함(?)에 살짝 기막혀했다. 하기야 영화가 리얼하게 재현해주는 1970년대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덧붙이면서. 즉 은주의 어머니나 고모는 역술인을 믿지만, 이성의 존재이자 계몽된 주체인 형사와 관객들은 역술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다. 공길용은 김중산을 차츰 믿게 되며, 공길용의 눈을 통해 관객들도 김중산을 차츰 믿게 된다.



◆ 합리적 이성보다 공감과 소신의 힘

영화 <극비수사>는 공길용과 김중산이 유괴범을 쫓는 형식을 취하지만, 선악의 구도는 다르게 그어져있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원칙과 믿음으로 움직이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범인을 잡아 공을 세우려는 다른 형사들과 자신의 명성을 지키겠다는 다른 역술인을 배치한다. 공길용과 김중산에게 감정을 이입한 상태에서, 반대편에 놓인 사람들의 욕망은 추악하고 치졸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평균적인 욕망과 윤리를 지닌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공길용과 김중산의 분투는 출세나 명성 등의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고독한 윤리의 싸움이기도 하다.

여기서 생각할 점이 있다. 영화의 초반에 빠르게 묘사된 공길용 역시 평균적인 윤리와 욕망을 지닌 형사였지, 특별히 윤리적인 인물이 아니다. 범인을 잘 잡는 용감한 형사이긴 하지만, 관행에 따라 나눠먹기를 한다거나, 자신의 이력에 득 될 게 없는 사건은 맡고 싶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오직 범인을 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동료형사들과 다른 목표와 원칙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된 걸까.

영화는 그것을 ‘특별한 사주의 힘’으로 신비화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인간적인 과정이 있다. 그것은 “니 자식이 없어져도 그랄끼가?”라는 아내의 일갈에서 출발하여, 급우인 은주를 찾아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거쳐, 은주가 바로 내 자식과 같은 아이라는 역지사지의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공길용은 32일간 은주의 가족과 동고동락하면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은주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연스러운 공감을 쌓아간다. 실종자 가족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공감의 정도는 같을 수 없으며, 옆에서 고통을 지킨 사람은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김중산이 불어넣어 주는 아이가 살아있다는 믿음은 공길용에게 아이의 생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끌고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이고 수행적인 윤리의 과정이다. 평균적인 도덕을 지닌 사람이 어떤 경험을 통해, 평균적인 도덕의 지점을 넘어서고, 이를 통해 이전의 자신이 속했던 세계의 불의를 돌아본다. 영화는 공길용의 눈을 통해, 세속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동료경찰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성찰을 이끌어낸다.

공길용이 김중산을 믿게 되는 과정 역시 초현실적인 과정이 아니다. 물론 영화는 그가 예언한 시간에 정확히 전화가 오는 등 신비함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놀라는 공길용에게 답하는 김중산의 말로 설명을 갈음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감응을 얻는다”고. 이는 신비의 영역이라기보다 차라리 인간적인 영역에 가깝다. 아니 그러한 감응까지 포함하여 인간적인 영역이라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합리적인 이성만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며 정서적이고 종교적인 감수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길용이 김중산에게 느끼는 것은 신비함이 아니라 신실함에 가깝다. 그가 사주를 주어 섬기며 설명하는 모습에 대단히 카리스마가 서려있지는 않다. 공길용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만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배운 역학에 자기만의 소신을 더해 스승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이것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말하는 김중산의 얼굴이나, 흙바닥에 ‘소신(所信)’을 한자로 쓰며 앙다문 표정을 짓는 김중산의 모습엔 소장학자 같은 진지함과 견고함이 서려있다. 처음엔 “네가 뭘 걸었냐?”고 반문하던 공길용도 ‘소신’이란 한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공길용은 김중산과 동행하며, 그가 자신과 같은 아이들의 아빠이자 직업적 관계망과 개인적 소신 사이에서 고민하는 생활인이자, 실종된 아이의 생사에 전념하는 존재임을 믿게 된다.



◆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가.

두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불화하면서 소신을 지키고, 그 힘으로 아이를 지켜낸다. 그러나 사건 해결의 공은 엉뚱한 이들에게 돌아간다. 그 과정을 보는 것은 씁쓸하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을 목표로 한 사람들에게 세속적 성공이 돌아가고, 오직 아이를 살리는 것을 원했던 이들에게 아이를 살렸다는 만족이 돌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영화는 논공행상에 눈이 벌건 사람들과 대비하여, 사건을 해결한 두 사람이 씁쓸함을 잠시 접어두고 가족들과 물가에 소풍 나온 장면을 충만한 시선으로 잡는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과는 무관하게 자신과 가족들에게 떳떳한 존재가 되어 만족스러운 소풍의 한낮을 즐긴다. 출세욕에 찌든 인간들에게 공로가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긴 하지만, 좀 빠르고 늦을 뿐 돌고 돌아 그리 나쁘게만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또한 세상의 이치임을 영화는 김중산의 짧은 예언을 통해 초연하게 들려준다. 이것은 37년 전 그때보다 세속적 욕망의 위세가 훨씬 커진 지금의 관객들에게 잊힌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의 답을 에둘러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는 형사와 역술인이라는 이질적인 결합을 통해, 우리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징적으로 가르쳐준다. 흔히 역술인이라 하면 미래를 예언하는 신비하고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김중산의 역할에서 더 중요했던 것은 아이가 반드시 살아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 믿음에 의해 가족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고, 공길용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할 수 있었다. 아이가 반드시 살아있다는 믿음, 그리고 아이를 반드시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원칙,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만 아이는 살 수 있다.



사회에 어떤 변고가 일어났을 때, 고통 받는 가족의 곁을 지키며 반드시 아이가 살아있다는 믿음을 주어 그 사회가 아이를 살리는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 어떤 종교든 철학이든 인문학이든 예술이든 정신의 영역을 담당하는 분야가 맡아야 할 역할이 그것이다. 이것을 사회적 영성이라 부르든 공동체의 신심이라 부르든 시민종교라 하든 상관없지만, 영화에서는 일개 역술가 김중산이 이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경찰이든 공무원이든 실무를 담당한 이들이 의전과 문책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휘체계 속에서 우왕좌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원칙이 바로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공길용은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이 원칙을 끝까지 지켜 마침내 아이를 구하였다. 세월호에 갇힌 304명 중 단 한 명의 사람도 살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메르스 창궐을 방기한 대통령의 홍보사진 속 ‘살려야 한다’는 표어가 던지는 공허함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극비수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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