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를 둘러싼 생명윤리와 여성주의 쟁점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마돈나>는 <명왕성>을 연출했던 신수원 감독의 신작이다. <명왕성>은 국내 개봉에 앞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마돈나> 역시 개봉 전에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다. 그러나 두 영화의 모두 국내 개봉은 완성된 후 해를 넘겨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지난 7월 2일에 개봉한 <마돈나>의 11일 현재 스크린 수는 고작 36개뿐이다. 그러나 개봉 9일 만에 1만5천 명의 관객을 모으며, 작지만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명왕성>은 교육문제를 파고들어,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경쟁위주의 교육이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마돈나>는 생명윤리의 문제와 성정치의 문제를 통해, 자본주의적인 모순을 극한으로 밀고 나간다. 교육, 생명윤리, 성정치 등은 자본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가 격돌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매우 예민한 화두이다. 신수원 감독은 이처럼 예민한 화두를 다루면서, 절충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서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렇다고 신수원 감독의 영화들이 불편한 사회현실에 대한 고발영화는 아니다. 신수원 감독 영화의 특징은 대단히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현실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펼치면서도, 그것을 상징적으로 활용하거나 추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명왕성>은 최고의 명문사립고를 리얼하게 그리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인질극이라는 극단적인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마돈나> 역시 생명이 자본으로 환원되는 공간인 VIP병동에 대해 아주 현실적인 묘사를 하면서도, 그곳을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활용한다. ‘명왕성’이나 ‘마돈나’라는 제목의 중의성을 활용하는 문학적인 면모도 다분하며, 리얼리티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극대화시켜 판타지와 만나게 영화적인 묘미도 가득하다.



◆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하는가

영화가 시작되면 하천 가에 화려한 옷을 입고 쓰러져 있는 여자가 보인다. 흡사 변사체처럼 보이는데, 임신 한 듯 배가 부르다. 영화 제목이 뜨고 나면, 가방을 든 채 서 있는 해림(서영희)의 모습이 물위로 비친다. 두 개의 하천에 있는 두 여자. 영화는 첫 장면부터 두 사람을 겹쳐놓으며 이들의 조우를 암시한다. 영화는 VIP병동의 간호조무사인 해림이 무연고 환자로 실려 온 미나(권소현)의 삶을 수소문하면서, 그의 영혼과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안락사와 장기이식은 그 자체로 굉장히 예민한 생명윤리의 문제이며, 자본과 결합되는 순간 더 복잡하고 딜레마적인 상황을 낳는다. 인류는 중환자의 연명치료 장치와 장기이식을 통해 생명연장의 꿈에 다가서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 ‘생명연장의 꿈’이 과연 자본의 이해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령 누구를 살리기 위해 누구의 장기가 쓰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오로지 의학적인 판단만으로 결정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의 틈새를 파고든다. 여기 자본의 증식을 위해 절대로 죽어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한 달에 병원비만 1억 원이 들지만, 그로 인해 고용이 창출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아들에게 쥐어주기 때문에 그는 죽어도 죽을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 모 회장님의 와병설에서 시나리오가 착안된 것이 아닌지 궁금해 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가 완성된 시기는 회장님의 와병 기사가 나오기 전이다.)

한편 임신부인 무연고 환자에게는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 그러나 그녀의 병원비를 지불할 사람은 없으며, 그녀의 장기는 어떤 중요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요긴하다. 따라서 그녀는 숨이 붙어 있더라도 죽어야 한다. 영화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제시하면서, 여기서 누가 살아야 할지를 선문답처럼 묻는다. 영화는 난감한 윤리적 질문을 던져 놓고, 회피하거나 유예시키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해림의 윤리적 결단을 통해, 어떤 판단을 보여준다.



영화는 마치 액자소설처럼, 해림이 마돈나라 불리던 미나의 쇠락한 삶을 탐문해가면서, 해림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즉 영화의 표면에는 미나가 겪는 몰락의 과정이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되어 흘러가지만, 영화의 심층부에는 해림의 내적 변화가 또 다른 역동성을 지닌 채 흐른다. 흔히 액자소설을 구상할 때, 마돈나의 잔혹수난기를 알아가는 해림의 위치에 순진하고 어린 여성을 배치하기 쉽다. 예컨대 ‘파란만장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백지처럼 순진했던 주인공이 이렇게 성장하였다’는 식의 서사를 짜곤 한다.

그러나 <마돈나>는 그 자리에 ‘텅빈 눈’을 지닌 해림을 놓는다. 해림은 어떤 이유로, 이미 절망의 극점을 지나 지옥에 속한 사람이다. 오히려 마돈나의 파란만장하지만 그나마 생명력이 꿈틀대는 삶을 통해, 해림은 절망의 바닥을 치고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 해림이 서사의 처음과 끝에 행하는 것은 냉정하게 보자면 범죄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해림이 범죄자란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해림만이 고통 속에서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며, 자신의 행위를 속죄하며, 더 큰 죄악의 굴레를 끊기 위해 결단하는 윤리적 주체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 영화의 결말은 윤리적 가치판단을 품고 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관객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당위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만큼의 당위가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은 해림의 결단과 의사 혁규(변요한)의 실천 덕분이다. 혁규는 부당한 시스템에 굴종해온 사람이다. 대게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광포한 불의에 맞설 정도의 용기를 갖진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소한의 선의와 옳음에 대한 감각을 놓지 않는다. 그의 행위를 영웅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마지막 용기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세상은 누군가의 영웅적인 행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해림이나 혁규와 같은 최소한의 윤리적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은 희망을 움틔우며 변화되어 간다. (변요한은 드라마<미생>으로 유명해지기 전, <마돈나>의 시나리오를 읽고 혁규 역할을 꼭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혁규 캐릭터가 지닌 윤리적 의미를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 <마돈나>를 둘러싼 여성주의적 쟁점들

영화 <마돈나>는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몇 가지 쟁점을 품고 있다. 첫째는 직장 내 성폭행의 문제이다. 영화는 미나의 삶을 통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미나가 처음 직장상사에게 추행당할 때, 미나가 취하는 태도는 일방적인 피해자의 모습은 아니다. 영화는 미나가 스스로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든지, 콜센터 김팀장이나 VIP병동 간호사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지렛대 삼아 사회적인 인정이나 성공을 얻고 싶어 하는 등 복잡한 욕망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성들이 그러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 여성이 사회적 약자이며 직장 내 성폭행은 권력관계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반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여성들이 그러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어찌됐든 영화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생생히 그리면서, 여성을 순결한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논쟁을 야기할 수 있다. 영화는 여성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불사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단순한 도식을 비켜간다. 더 풍부한 논의를 이끌기 위함이다.

미나는 옮긴 직장에서 또 다른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2차 가해까지 포함하여 더 노골적인 전개과정을 겪는다. 이것은 미나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여성일수록 더 노골적인 성폭행의 피해자가 되기 쉬운 것이다. 영화는 미나가 겪는 반복적인 경험을 통하여 직장 내 성폭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요컨대 직장내 성폭행이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는 모성에 대한 것이다. 미나가 성폭행으로 임신한 아이에 대해 애착을 갖는 다거나, 해림이 미나의 삶과 도킹하는 고리가 결국 모성이라는 점을 들어, 영화가 모성을 자명한 것으로 절대화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단순 도식에 빠지는 것이다. 미나가 성폭행으로 임신한 태아에게 애착을 보이는 것은 ‘절대적인 모성’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인 외로움’ 때문이다. 영화가 모성을 절대화하지 않았기에 “내가 살기 위해 아이를 죽였다”는 해림이 주인공일 수 있다. 해림이 미나의 영혼에게 태아에게 애착을 갖는 이유를 묻는다. 미나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아이만은 나를 사랑해주었다”고 답한다. 이 말은 물론 아전인수 격의 착각일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나가 너무나 외로운 존재였으며, 아이를 통해 그 외로움을 덜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화장품 공장에서 화려한 치장을 하고,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많이 먹는 미나에게 동료가 이유를 묻자, 미나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아서”라 답한다. 애정결핍과 우울증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태이다. 그런 미나에게 임신은 어떤 의미였을까.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다른 생명을 품고 책임지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존재의 고양’으로 느껴 질수 있다. 미나가 태아에게 애착을 품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모성이 숭고하기 때문에 의무의 차원에서 절대로 아이를 죽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 외로움이 절박하기 때문에, 필요의 차원에서 절대로 아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해림이 미나와 공감의 고리를 형성하는 것은 모성 때문이 아니라 고통과 소외 때문이다. 영화는 미나가 ‘거리의 여자’가 되었을 때, 조건 없이 머물 곳과 일거리를 제공한 다른 ‘거리의 여자’들을 보여준다. 가장 바닥에 있는 사람들끼리 희미한 연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미나의 삶을 보여주면서, 그녀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순간들을 담는다. 가령 여고 운동장에서 머리에서 검은 물을 흘리고 서있는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 주었더라면, 미나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화장품 공장에서 성폭행이 일어났을 때 2차 가해를 막아주었다면, 미나는 ‘거리의 여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순간들을 보여주면서, 해림에게 미나를 도울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의 칼자루를 쥐어준다. 해림이 미나를 돕게 된 것은 오로지 모성 때문이 아니라, (모성에 대한) 상흔 때문이다. 해림은 자신의 내면에 아로 새겨진 죄의식과 상처를 마주보며, 미나를 돕는 행위를 통해 극복한다. 이것은 미나에 대한 연대이자, 자신에 대한 구원이다.

파국적인 결말을 보여주었던 <명왕성>과 달리, <마돈나>의 결말은 구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신수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 <레인보우>의 결말은 정면 돌파가 아닌 허허실실의 우회적인 희망이었다. 그러나 <마돈나>가 제시하는 희망은 절망의 바닥을 치고 솟아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강렬함을 지닌다. 이는 마치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새로운 생명들이 탄생한다’는 자명하면서도 희귀한 깨달음을 닮았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마돈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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