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인사이드’ 정말 외모가 바뀌어도 내면은 그대로일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인텔과 도시바가 합작한 6부작 소셜 필름 시리즈 중 <뷰티 인사이드>라는 작품이 있다. 이건 물론 노골적인 브랜드 홍보물이다. 지금까지 인텔이 관여한 소셜 필름 대부분의 제목이 ‘인사이드’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도시바의 전자제품들이 꾸준히 화면에 나오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면이 어떻건 내부엔...’이라는 인텔의 자기 홍보다.

매체 실험으로서 영화는 영리하다. 주인공 알렉스는 매일 다른 모습으로 깨어나는 가구제작자이다. 여자, 남자를 오가고 나이도 매번 변하고 인종도 바뀐다. 그는 리아라는 여자를 사랑하는데(알렉스와 리아라는 이름은 모두 나중에 영화에서 회사 이름으로 재활용된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구애를 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아이디어지만 재미보다는 소셜 필름으로서 실험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는 데에 의의가 더 크다. 알렉스는 매일 얼굴이 바뀌기 때문에 1편을 본 시청자 중 누구라도 오디션에 지원해서 잠시나마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별, 나이, 인종 상관없다. 심지어 영어를 못해도 된다.

이를 극장용 장편영화로 옮긴 작품이 백종열 감독의 <뷰티 인사이드>이다. 무언가를 리메이크한다면 원작이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원작 <뷰티 인사이드>는 리메이크를 도전하는 작가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이를 한국 장편영화로 만들면 문제점이 있긴 하다. 원작 시리즈의 기반이 되는 인터액티브 기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인종적 다양성 역시 건드리기 어려워진다(영화에서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다루는 순진무구한 방식을 보라).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경찰국가가 아닌가. 정부가 사진과 지문이 붙어 있는 신분증을 관리하고 의무병역이 있는 나라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비밀을 지키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원작이 남긴 빈틈을 채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원작의 아이디어는 재미있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남성이라고 그렇게 쉽게 정체화할 수 있는가. 그는 외모만 바뀔 뿐 내면은 그대로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계속 바뀌는 육체는 정신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을까? 그렇게 계속 바뀌는 사람을 사랑하는 여자 쪽 입장은 어떨까? 영화는 주인공의 사랑을 받아주는 순간 변화가 멈추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건 좀 싱겁잖아.

영화는 이중 일부는 해결한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 우진은 18살부터 그런 현상을 겪었다. 18년이면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부르기 충분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우진은 여자주인공 이수(한효주)와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원작을 이야기의 절반으로 삼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 이야기를 쓰는데 이건 올바른 리메이크의 자세다. 결국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부분은 아쉽기 그지없다. 18년은 긴 세월이다. 하지만 계속 다른 몸으로 갈아타며 살아온 10여년도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성별을 바꾸어 오며 살아온 사람이 단 한 번도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외모가 바뀐다는 것 이상의 것이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야가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진은 평범한 한국남자의 시야와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데, 아무리 로맨스 영화로 스스로를 제한하려 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는 캐릭터 절반을 포기한 것이다.

후반부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못하는 것도 시야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이수를 제대로 이해할 생각이 없다. 일단 로맨스 영화에 맞추어 틀은 세워놨고 거기에 맞추어 갈등과 고민을 넣긴 했는데, 그것이 이수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관객들은 그냥 머리로만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인물은 더 근사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단순히 얼굴만 바뀌는 게 아니라 육체 전체가 바뀌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육체가 바뀌어도 내면은 똑같다는 우진과 알렉스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같은가? 분명 영화가 건드린 것보다 더 많은 고민들이 숨어 있는데, 영화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거나 거기까지 가는 걸 두려워한다. 내가 보기엔 후자인 거 같지만 전자일 가능성도 낮지는 않다.



개인적 의견을 말하라면 <뷰티 인사이드>라는 영화가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려고 마음 먹었다면 원작의 주제와 제목 모두를 배신했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육체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적인 영혼의 개념을 꿈꾼다. 그런 걸 믿거나 꿈꾸는 건 각자의 자유지만 그거야 네시와 UFO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완벽히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있는가? 그럼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본 적 있는가? 그런 걸 본 적이 없다면 왜 우진이 그 예외라고 믿는가?

배우 활용의 측면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게 낫다. 영화는 인터액티브 캐스팅을 포기한 대신 수많은 스타 배우들을 활용하는데, 이들을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동일한 기억과 이어지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이 다르다. 로맨틱한 박서준, 능숙한 바람둥이 같은 이진욱, 수줍고 위축되었지만 용감한 천우희, 조용하고 사려깊은 우에노 주리, 철없는 어린 동생 같은 이현우, 죄의식에 시달리는 고아성이 모두 같은 내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수많은 배우들이 육체와 외모의 영향력을 탐구하는 연구에 본격적으로 동원되었다면 스턴트 캐스팅을 넘어선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정 자체가 배우라는 사람들과 연기라는 예술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가 아닌가. 아무래도 이 소재는 단순히 판타지가 깔린 로맨스의 재료로만 활용되기엔 아깝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뷰티 인사이드>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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