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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성실하면 없어 보이는데 괴물조차 될 수 없는
기사입력 :[ 2015-09-14 13:06 ]


‘오피스’, 엽기적 살인마보다 진정으로 더 무서운 것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오피스>는 흡사 적자생존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회사를 배경으로 한 공포물이다. 살 떨리는 직장의 긴장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드라마 <미생>을 떠올리게 하고, 과잉경쟁과 과잉억압의 폐쇄된 장에서 미쳐가는 약자들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여고괴담>을 생각나게 한다. 한편으로는 슬래셔 장르로 한정되지 않는 이 시대의 막막한 공기를 담은 사회물이란 점에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킨다.

◆ 성실한 일개미의 지옥

영화는 멍한 얼굴로 귀가한 김과장이 가족들에게 돌연 망치를 휘두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김과장은 사라졌고, 이튿날 형사들이 회사로 찾아와 김과장에 대해 묻는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직원들의 말 속에 숨기는 것이 있음을 직감한 형사는 인턴사원 이미례(고아성)을 따로 불러 묻는다. 김과장이 “눈치 없이, 자기 일만 혼자 열심히 하는 인간”이 아니었냐고. 김과장이 회사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만 찍힌 CCTV, 김과장을 보았다는 흉흉한 말들, 엽기적인 가족 살해 등으로 회사의 이미지를 구기고 싶지 않은 상부의 입단속, 그리고 김과장이 하던 업무를 누군가 떠맡아야 하는 노동과부하 등이 맞물리면서 사무실의 긴장은 극도의 높아진다. 회사 안에서 직원들이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공포와 불안은 폭발할 지경에 이르고, 새로운 인턴사원의 발령으로 이미례는 미치기 직전 상황에 빠진다.

영화는 부당해고, 인격모독, 직장 내 왕따, 인턴제도, 과잉경쟁 등을 잘 보여준다. 특히 야근을 밥 먹듯이 하거나 밤중에도 불려 나오기 일쑤이고, 주말에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과잉노동의 상황이 리얼하게 재현된다. 직원들이 죽어나가도 회사 이미지를 챙기는데 급급한 간부들이나, 노조간부의 체포를 놓고 공권력과 거래하는 비인간성도 잘 드러난다. 겉보기엔 번듯한 빌딩에서 일하는 대기업 직원이지만, “내가 회사를 죽으려고 다니는지 살려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병 걸릴 것 같다”라는 홍대리의 토로처럼 그들의 일상은 노동지옥에 빠진 일개미의 삶이다.



장하나 의원실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30대 대기업에 다니는 사원과 대리는 하루 평균 10시간이 넘게 일을 하고, 10%는 일이 없어도 야근을 하며, 한 달에 한번은 주말에도 일을 한다. 이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실제로 LG전자 프랑스 법인에서 10년간 CEO로 일했던 에리크 쉬르데주는 직원들이 회사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으로 하루 10~14시간씩 근무를 하고, 회사는 군사적이고 위계적인 서열문화를 통해 직원들을 냉혹하게 감시하는 한국 대기업을 접하고 “한국인은 미쳤다!”는 쓴 소리를 쏟아냈다.

이러한 살인적인 경쟁과 감시는 9월 13일 노사정 위원회의 합의로 더욱 심화될 양상이다. 회사는 저성과나 근무불량을 이유로 들어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도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사규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인턴사원이나 마찬가지로 상시적인 해고위협에 시달리며 근무성과와 윗사람 눈치 보기 경쟁에 내몰리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영화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하고 있을 때 목덜미에 스치는 선득한 느낌이나, 등 뒤에서 나를 비웃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한 아찔한 느낌을 생생히 전달한다. 또한 파티션으로 가려져 반만 보이는 사무실의 책상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머무는 비상구, 혼자 울기 위해 가는 화장실 등 직장인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의 공간들을 쏴한 공포가 스치는 을씨년스런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이미례가 느끼는 열패감과 절망을 통해 슬래셔 무비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공포를 환기시킨다.



◆ 성실하면 없어 보인다

이미례는 광주에서 올라온 대졸 인턴사원이다. 중학생 때부터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싶은 마음에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는 그는 서울의 방값이 워낙 비싼 탓에 경기도 어디쯤에서 자취를 하며 용산에 있는 회사에 다닌다. 그는 광역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매일 1분이라도 늦지 않을까 초긴장 상태에 놓여있다. 그는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성실히 일한다. 그러나 “너무 열심히 일하면 없어 보인다.” 소리를 듣는다. 직원들은 이미례가 “답답하고 음침한 구석이 있다”며 싫어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미례의 반대편에 새로 온 인턴사원이 있다. 그는 미국대학출신에 국내 명문대에서 대학원을 나왔고, 잠실에 살면서 회사 코앞에 원룸을 얻었다. 그는 “스펙도 좋은데 잘난 척도 하지 않고, 집도 어느 정도 사니까 인맥도 좋을 것 같고, 세련된 센스를 지녔다”는 칭찬을 듣는다.



직장에서 가난하지만 성실한 사람보다 유복하고 세련된 사람을 반기는 것이다. 그러나 유복함, 인맥, 세련됨, 여유 등은 모두 본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며, 자본의 가치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인성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성실함, 노력 등으로 표상되는 ‘노동의 가치’가 추락하고, 세련됨, 여유 등으로 표상되는 ‘자본의 가치’가 승리한 것이다.

이러한 가치평가는 당사자에게도 내면화된다. 이미례는 인턴인 자신에게 그나마 인간 대우를 해준 김과장이 “너도 나와 비슷한 부류다.”라 말하자 화들짝 놀라며 부인한다. 그러나 김과장이 “잡고 있으면 묵주처럼 편안해 진다”며 건넨 그 칼자루를 쥐게 된다. 어둑한 빈방에 홀로 칼을 쥔 채 귀신처럼 서 있던 이미례는 진짜로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 이는 노력이나 성실함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형국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이러한 경향은 <경향신문> 9월 4일자 기사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해>라는 기사에 인용되어 있는 인터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죽창요? ‘금수저’들이 연애 자랑, 여행 자랑, 자기 뭐 먹은 거, 자동차 산 거 자랑하면 ‘그래 봤자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죽창 앞에서는 다 평등하다’고 댓글 달아요. ‘네까짓 게 금수저라고 아무리 잘난 척해도 죽창 앞에서는 너나 나나 한방에 나가 죽는 평등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인데 속이 시원해지죠.”(이태경) 아무리 노력해도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칼이나 죽창을 찌르는 파국적 결말을 상상하며 오히려 위안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칼과 죽창은 파국을 신앙하는 유사 종말론자의 묵주가 된다.



◆ 괴물조차 될 수 없는

그러나 파국은 오지 않는다. 김과장이 가족을 망치로 때려 죽어도, 직원들이 변사체로 발견되어도 파국은 오지 않는다. 이들의 죽음 역시 노동의 과부하와 관료적 일처리를 특징으로 하는 ‘헬조선’의 방식으로 봉합된다. 경찰의 수사는 진실의 탐문이 아닌 사태의 봉합을 목표로 하기에, 편의에 따라 자살로 처리되거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어 버린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누가 죽였건 아무 상관도 없다. 회사는 회사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고, 경찰은 자신의 조직에 불똥이 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심지어 살해도구를 보고 “내가 지니던 물건”이라고 말해도 뒤바뀌는 건 없다.

첫 시퀀스에서 김과장이 가족을 죽인 범인이란 증거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25kg의 하중으로 내려치는 힘”이나 “망치의 지문”이 강조되었다. 이는 경찰 수사의 알리바이를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이미례는 범인이 되지 못한다. 즉 여성은 물리적 약자이기 때문에 악인이 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김과장의 가족살해 사건의 진실도 알 수 없다.) 영화는 직장에서 가장 억압된 위치에 놓인 여성인턴사원 이미례가 광기를 폭발시키며 괴물로 돌변하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다시금 다소곳한 피해자의 자리에 정위치 시킨다. 이것은 피로 얼룩진 ‘오피스’가 새로운 인력충원으로 말끔하게 봉인되는 것과 더불어 대단히 보수적인 무의식을 드러낸다.

임상수의 <하녀>가 김기영의 <하녀>와 달리, 악녀로서 가정을 파탄내기는커녕 자신의 죽음을 전시하고도 그들의 가정에 ‘기스’조차 내지 못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례는 살인마가 되어서도 다시금 다소곳한 인턴사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원귀나 괴물이 되지도 못하고, 그저 음침함을 지닌 가난한 노동자가 되어 착취당할 기회를 얻기 위해 다시금 ‘노오오오력’ 해야 한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누군가 살인마가 되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오피스’의 피칠갑보다도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그 아무렇지 않은 매끈한 봉합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오피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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