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media 주요뉴스

‘돌연변이’, 아버지 세대의 닦달에 대한 청년의 응답
기사입력 :[ 2015-11-03 13:00 ]


생선이 되어서라도 ‘헬조선’을 탈출하고픈 ‘돌연변이’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돌연변이>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신약개발 임상시험에 참가했다가 생선인간이 되어버린 청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사회의 대립과 소동을 보여주는 블랙코미디다. 영화는 이천희, 박보영, 이광수가 배역을 맡았지만, 마이너리티의 감수성이 풀풀 묻어나는 저예산 기획이다.

영화 <돌연변이>는 생선인간의 출현이라는 쇼킹한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폭넓게 짚는다. 예컨대 아르바이트로 위험한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청년실업의 문제, 인권에 관한 문제조차 극단적인 이념대립으로 치달으며 마침내 ‘종북’으로 몰리고 마는 끔찍한 공론장의 지형, 선정적인 언론의 행태,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상대를 혐오와 학대, 온라인상의 소모적인 논쟁을 유발하는 인정욕구, 세대 간 단절, 지방대 차별과 패거리문화, 황우석 사태를 연상시키는 윤리를 도외시한 과학의 행태와 그것이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용인되고 지지받는 기막힌 현실, 언제나 자본의 편을 드는 종편들, 그러나 결국 제약 산업이 추구하는 것은 인류적 혜택이 아니라 이윤이라는 당연한 사실, 무너진 사법정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처럼 보였던 인물의 기회주의적 행보 등 현재 한국 사회를 살면서 접하는 병폐들이 총망라된다.

영화 <돌연변이>는 이 많은 문제들을 풍자적으로 그리지만, 영화가 취하는 블랙코미디의 전략이 세련되거나 깊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생선인간의 등장이라는 설정만 판타지일 뿐, 이후의 모든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웃기다기보다 뼈아프게 느껴진다. 이러한 직설적인 비판이 가뜩이나 저예산 영화로 볼거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돌연변이>가 제시하는 상황과 문제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느낄 만한 것이어서, 이를 이해하지 못할 관객은 없다. 따라서 별도의 설명이나 해석을 요하지 않는다. 정작 이 영화에서 해석되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의 의미와 주진(박보영)이라는 캐릭터다.



◆ 아버지, 더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어요...

평범함을 자신의 특성이자 삶의 목표로 삼았던 청년 박구(이광수)는 생선인간이 되어버린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난리를 겪고서 심신이 피폐해진다. 그는 한차례 자살 시도 끝에 자발적으로 제약회사의 실험실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비인도적인 생체실험을 당한 경험이 있는 그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걸까. 앞으로 어떤 학대나 고문을 당할지 아는 그가 실험실 행을 결심하였을 때, 그는 이미 시민권을 지닌 주체임을 포기한 상태이다. 그가 결심한 이유는 ‘갈 곳이 없어서’였다. 그는 자신을 돕던 변호사와 아버지와 서기자(이천희)마저 각자의 욕망으로 균열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여자 친구라고 착각했던 주진(박보영)을 찾아가 “나, 너 사랑한 적 없다”는 확답을 듣는다.

재판에서 패소하고, ‘종북 빨갱이’로 여론몰이를 당하고, 길가는 중학생들에게 혐오폭력을 당하고, 자살에도 실패하고, 자신을 돕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기댈 수 없으며, 주진으로부터도 “병신아, 정신 차려” 소리를 들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확실한 죽음에 해당되는 실험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실험실의 그는 시민권이나 인권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사회에서 추방된 일종의 ‘호모 사케르’로서, 그는 ‘헐벗은 생명’으로 취급된다. 즉 사회적 인간으로서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던 것이다.



자본으로부터 배신당한 변박사가 박구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술을 애초에 가지고 있었음을 털어놓지만, 박구는 분개하지 않는다. 인생을 송두리 채 빼앗아버린 변박사에게 그는 왜 분개하지 않았을까. 물론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거나, 자포자기 상태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삶’이 자신이 놓쳐버린 가장 소중한 가치로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지 않고, 생선이 되는 것을 택한다. 인간으로서 이미 죽었던 ‘호모 사케르’ 박구의 장례식이 뒤늦게 치러지고, 그는 한 마리 생선이 되어 수학여행에서 한번 보았던 바다, 서기자에게 데려가 달라 부탁했던 바다로 간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생선이 됨으로써, 그동안 온갖 핍박과 증오와 부조리를 안겼던 ‘헬조선’을 탈출한다. 마침내 보라카이 바다를 유영하는 독특한 생명체가 된 그는 무척 자유로워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탈주이다. 남의 자식에게까지 “적성이 어디 있냐, 약해빠져 가지구선. 공무원시험이나 봐라”라고 말하는 완고한 아버지, 주진으로 대표되는 영악한 또래여자, 자신을 이용하고 적대하고 분풀이 하는 세상, 끔찍한 이념적 대립 등에서 탈출한 것이다. 이 모든 부담과 소동과 기대와 갈등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는 인간이라는 당연한 규범을 버리고, 인간계라는 한계를 넘어 탈주해버린다. 이것은 그저 평범한 삶을 꿈꾸었고, 걸핏하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또래 여자나 중학생에게까지 “병신”소리를 듣는 박구가 ‘헬조선’에서 요구하는 경쟁과 긴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상징적인 차원의 탈주를 감행해버리는 서사로 읽힌다.



이것은 영화 <사도>가 강조하는 아버지의 말들, “공부를 해라, 이 좋은 환경에서, 내가 너 만했을 때는”에 대한 청년세대의 응답으로 읽힌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잔소리에 짓눌려 주술과 도참이라는 판타지에 빠졌듯이, 생선이 되어 보라카이 바다를 유영하는 박구의 모습 또한 어떤 판타지의 세계를 상징한다. 온갖 사회적 관계나 성취를 폐절하고, 오타쿠나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그보다 구체적으로 해외로 가서 은둔해버리는 ‘소토코모리’의 삶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그보다 건전하게 한국에서의 경쟁적 삶을 모두 내려놓고 한적한 나라에 가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젊은 세대의 판타지로 읽힌다.

요컨대 <돌연변이>의 결말은 영화 <명량><국제시장><사도>를 통해 울려 퍼지던 아버지들의 말들, “우리들의 개고생을 기억하라, 너희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갈 유산은 없다. 자연스러운 승계는커녕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행동을 하라”는 사회적 압박에 대한 세대론적 응답으로 읽힌다. 그런 세상에서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생선이 되어서라도 ‘헬조선’을 탈출하여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는 비명에 가까운 응답으로 들리는 것이다.

영화 <인턴>에 대한 한국의 젊은 관객들의 반응은 아버지 세대의 겁박에 대한 간접적인 응답처럼 보였다. 그런데 <돌연변이>는 아예 직접 쓴 답장처럼 보인다. “아버지, 평범한 저로서는 더 이상 ‘헬조선’에서 인간으로 사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요”라는 포기의 응답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 패퇴한 청년남성이 바라보는 젊은 여성이라는 괴물

<돌연변이>에는 청춘남녀가 등장하지만, 이들 사이에 로맨스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우정을 주고받는 사이로 보기도 힘들다. 생선인간이 된 박구가 처음 주진을 찾아왔을 때, 주진은 몇 십 만원에 그를 제약회사에 판다. 주진이 서기자와 함께 제약회사를 찾은 것은 박구를 구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논쟁하였던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박구를 발견한 주진의 첫 행동이 사진을 찍으며 온라인상의 누군가를 향해 “봤냐? 새끼들아?”라고 외쳤던 것임을 기억하자. 주진은 박구를 판 행위에 대해 “왜 안 되냐? 자본주의 사회에서”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파탄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위악적이다. 단순히 청년세대가 워낙 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퉁 칠 수가 없다. 가령 가출소녀와 양아치 소년이 등장하는 영화 <들꽃>에도 로맨스와 우정과 연대가 존재한다. 소년은 자기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빠진 소녀를 돕는다. 또한 소녀는 선배를 배신해가며 소년에게 보답한다. 그러나 <돌연변이>에서 이러한 교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진은 약간의 미안함을 가지고 구출된 박구와 한동안 동행한다. 그러나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한다. 박구의 아버지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며 다른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판한다.



결국 주진은 자신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박구를 떠난다. 주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든 오프라인 상에서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인정받는 것이다. 박구는 마지막으로 주진을 찾아와 사과와 작별의 인사를 전하지만, 주진은 끝까지 위로나 우정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박구가 주진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것은 자신에게 남은 현금이었다.

이처럼 각박한 주진의 모습은 기존 영화들이 재현하였던 헌신적이고 모성적이고 이타적인 여성들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주진의 모습을 새로운 여성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진은 자기 일관성을 지닌 주체라기보다는 이러저러한 시선에 의해 굴절된 파편적인 이미지의 조합처럼 느껴진다. 가령 처음 서기자를 만난 주진이 정신없이 털어놓는 장면을 보자. 주진은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잘난 남자 벗겨먹으려는 서사를 신나게 풀어놓다가 가부장제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곧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반여성적인 발언을 한다. 그 이야기는 결국 누군가가 “쌍년”이라는 말로 마무리 된다. 이것은 일관된 자기 논리와 인격을 지닌 여성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남성의 눈에 비친 영악한 요즘 여성에 대한 분열적인 묘사가 뒤섞인 것이다. 즉 주진은 또래 남성이 느끼는 '해독되기 어려운 영악한 여성'을 상징한다.

요컨대 주진은 박구로 대표되는 패퇴한 청년남성이 또래여성에게 느끼는 피해의식이 투사되어 빚어진 존재이다. 지나치게 돈을 밝히고 인간미가 없으며, 은근한 어장관리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를 벗겨먹으려는 영악함을 지닌 반면, 못난 남자와는 어쩌다 ‘원 나잇’은 해도 끝내 마음을 주지 않는 철저함을 지녔다. 그는 무시나 불이익을 참지 못한다. 특히 꼰대스러운 아버지세대의 권위를 참을 수 없다.



그는 결국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끝에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하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유명세도 얻는다. 주진의 적응능력은 박구의 무기력과 정면으로 대비된다. 즉 주진이란 캐릭터는 한 명의 구체적인 여성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헬조선에서 더 이상 인간으로 살기 힘들어요’를 토로하는 박구가 느끼는 열패감이 뒤집힌 상태로 또래여성에게 투사된 것이다.

이처럼 영악하게 적응하는 젊은 여성과 부적응 상태에서 열패감에 빠져드는 젊은 남성이라는 구도는 영화 <그랜토리노>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소수민족으로 미국에 온 이민자들 중 소녀들은 대학에 가고, 소년들은 감옥에 간다.” 자기 나라의 가부장제에 억눌려왔던 소녀들은 국경을 넘음으로써 사회적 기회를 얻지만, 소년들은 국가라는 상징성과 함께 남근적 기표를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 사회 밖으로 퇴출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년남성은 내 나라에서 주권을 잃은 이민자 신세와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즉 나는 이 세계의 주인도 아니고 세상이 원하는 아무런 재원도 갖고 있지 못한데, 젊은 여성들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와중에도 놀라운 투지와 영악함으로 무서울 정도로 잘 적응해나가는 것이 보인다. 주진은 박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고 나보다 세상과 좀 더 악바리처럼 싸울 수 있는 투지가 있는 무서운 존재, 젊은 여성’을 대표한다.



이것은 요즘 논의되는 여성혐오의 본질에 가깝다. 지금의 여성혐오는 남성들이 우월한 위치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혐오한다기보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나 이질감에 가깝다. 즉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주인으로서 누리던 권리와 감각이 박탈된 상태에서, 자신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던 여성들이 보이는 놀라운 생존능력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다.

박구는 또래여성에게 기대어 보았지만, 결국 기댈 수 없었고, 자기보다 조금 연상이면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서기자에게 자기 서사를 의탁한다. 박구는 서기자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변박사에게 남기는데, 그런 식의 주변부 남성들 간의 결합과 연대는 가능함을 뜻한다.

<돌연변이>는 판타지의 설정을 차용하여,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을 쏟아낸다. 파닥이는 생선살을 발라내면, 생선뼈가 드러난다. 그것은 차라리 생선이 되어서라도 ‘헬조선’을 탈출하고픈 청년세대의 비명과, 위기의식 속에 퍼지는 여성혐오의 본질이다. 비릿한 연민이 일렁인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돌연변이>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뒤로가기 인쇄하기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