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열광하는 당신, 때론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제11강. 관람객 [觀覽客]

[명사]
1. 공연이나 전시회 따위를 구경하는 사람.
2. 때론 이것보단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tvN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류혜영)는 어떤 학생인지 좀처럼 감을 잡기 어려운 사람이다. 1988년 당시 민주정의당 중앙연수원 점거 투쟁까지 함께 할 정도면 분명 조직 내 중책을 맡은 인물일 텐데, 당사 점거 투쟁을 제외하고 그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좀처럼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보라는 동네 불량 청소년들을 혼내주면서 투쟁의 구호를 외치고, 이웃집 아주머니를 고향으로 태워다주는 차 안에서 민중 가요를 부른다.

투쟁의 폭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 구호만 급진적인 그의 태도는, 화목한 중산층 가정을 중심으로 안전한 세계만을 묘사하는 홈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계를 보여준다. 시대의 어둠과 잔혹함을 묘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 <응답하라 1988>은 보라의 ‘운동권 학생’으로서의 삶은 에둘러 묘사하고 화급히 봉합해 버린다. 1988년을 다루면서 정치를 영 외면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다루기엔 부담스러웠을 제작진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제작진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경찰들에게 잡혀간 보라를 기다리며 경찰서 앞에 모인 쌍문동 주민들은, 보라의 아버지 동일(성동일)을 위로하며 덧붙인다. 훈방조치 되고 나면 따끔하게 혼을 내서 다시는 데모나 학생운동에 몸담지 못하게 하라고. 보라가 운동권 학생이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대노해 보라에게 화를 내던 동일은, 정작 이웃들의 말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답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떻게 혼내.”

엄혹했던 시기의 어둠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도, 시대의 정치적 맥락을 상세하게 설명해 줄 의향도 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그 시기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서 있던 학생들이 민정당 연수원에 무단침입한 일도, 옥상을 무단점거하고 불법 유인물을 뿌린 행동도 ‘잘못’이 아니었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해둔 것이다. 그 점 하나를 못박아 둠으로써 <응답하라 1988>은 간신히 그 시대를 향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



지난 11월 29일 방영된 JTBC <송곳>의 마지막 회는 다분히 기만적이었다. <송곳>의 모델이 된 까르푸-이랜드 투쟁은 결코 작중에서 묘사된 것처럼 준법투쟁과 단식투쟁 만으로 승리한 투쟁이 아니었다. 2003년 당시 10여일 간 계속된 파업은 밀린 식대와 교통비 만 원 정도만 올린 채 끝이 났고,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은 2008년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20여일의 매장 점거농성과 511일간의 마라톤 파업을 거쳐서야 가능했다. 물론 드라마 <송곳>이 까르푸-이랜드 투쟁을 모델 삼았다고 해서 반드시 실제 사례를 그대로 화면 위에 옮겨야 할 이유는 없다.

<송곳>을 보는 많은 이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에 마음이 괴롭다고 호소해 왔으니, 결말만큼은 마음 편한 승리를 안겨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당장 경찰이 용역깡패들과 함께 해고노동자들을 진압하는 초반부와, 구사대가 파업 지도부 천막을 급습해 폭력을 행사하자 바로 경찰이 등장해 사측 책임자를 잡아가는 후반부 사이엔 뛰어넘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한다. 법과 상식의 세계가 아니라 그 너머의 쓰디쓴 현실을 다루던 드라마가, 갑자기 ‘법을 지키며 투쟁한 이는 승리하고 법을 어기며 투쟁을 막으려 한 이는 잡혀갔다’는 준법정신 넘치는 결말로 끝난 건 어색한 일이다.

그럼에도 제작진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송곳>은 우리에게 부조리와 불의를 당할 때 고개 숙이지 말고 뭉쳐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이젠 좀 싸움을 쉬고 싶다던 이수인(지현우)에게 푸르미 인재교육센터 유일의 노조원(심희섭)을 붙여준 것도, 고객이나 거래처와 직접 부딪힐 일 없는 한직이라 문제가 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인재교육센터에조차 노조가 싸워야 할 법한 일을 마련해 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드라마 안에서 20일간의 점거투쟁과 511일의 파업은 다루지 못할지언정, 주전파를 운동권 방언만 중얼거리는 앵무새로 묘사하고 준법투쟁이란 희한한 결말로 후퇴할지언정, 적어도 불의에 굴종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던지는 것만큼은 해낸 것이다. 그것 하나를 분명히 해둠으로써, 드라마판 <송곳>은 간신히 최규석의 원작과 까르푸-이랜드 투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



어디 <응답하라 1988>과 <송곳>만의 일이랴. 세상의 정의에 대해 논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가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썩은 고려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는 이들의 이야기 SBS <육룡이 나르샤>, 서바이벌 TV쇼로 거대한 불평등과 모순을 가린 제국 ‘판엠’을 뒤집어엎고 공화정을 회복하는 혁명서사 <헝거게임> 4부작, 대한민국의 정치와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들을 향한 복수극 <내부자들>…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정의를 이야기한 작품 수는 더 늘어난다. 사람을 해치고도 재력과 권력으로 처벌을 피해가려는 재벌 3세를 때려잡는 이야기 <베테랑>, 제국주의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악질 친일파를 암살하려는 이들의 투쟁기 <암살>의 메시지가 ‘정의 추구’ 아니었나. 심지어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한 중앙일보 권석천 기자의 칼럼집 제목 또한 <정의를 부탁해>다. 응당 지켜져야 할 정의를 갈구하고, 빼앗긴 제 몫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이런 콘텐츠의 인기와는 별개로, 오늘 여기의 투쟁은 좀처럼 사람들의 지지를 사지 못한다. 간접고용과 노조탄압이란 모순 앞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베테랑> 속 배기사(정웅인)의 싸움을 지지한 이들이 1,341만명이고,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암살> 속 독립투사들에게 박수를 보낸 이들이 1,270만명인데도, 오늘날 정의를 추구하며 거리로 행진하는 이들에 대해선 여전히 냉소와 적개심으로 뒤범벅된 댓글과 기사가 따라붙는다.



시위를 하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짐짓 점잖은 충고를 던지는 이들, 사람이 다쳤는데 그 이의 이력을 읊으며 원래 시위꾼이 아니냐고 사상검증을 시도하는 이들의 훈계가 담론의 공간을 채운다. 2008년 촛불집회 때는 집회가 평화로워서 물대포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왜곡이 등장하는가 하면, 팔짱을 끼고 집회의 미감이 촌스러워서 함께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고개를 든다. 현실을 위협하지 않는 가상의, 혹은 과거의 싸움은 편안하게 관람하고 박수를 치면서, 현실 속의 싸움에는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가득한 것이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당대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곤 했다. IMF 시절 <칭찬합시다>나 <느낌표>와 같은 ‘착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예능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2000년대 후반 <슈퍼스타K>를 시작으로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해 ‘공정한 경쟁’을 강조했던 것도 결국 그 시기 대중이 간절히 필요로 했던 가치들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리충족이 본질을 바꾸진 못한다. <칭찬합시다>와 <느낌표>가 실제로 ‘착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공정한 경쟁’의 시대를 개막하지 못한 것처럼.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욕망들을 마냥 관람하는 것으로 대리충족하는 것에 그친다면, 시대의 갈증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화면 위에 정의를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수놓아지고 있는 것은, 작품을 통해 찰나의 위안을 받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나가서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 옆에 서라는 신호일 것이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tvN,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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