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벨 위페르 주연, 영어 대사, 주요 영화제로부터 러브 콜 잇따라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영화일기] 홍상수 감독은 언제나 화제다. 그래도 예전엔 작품을 만들고 나서, 그것이 공개되고 나서야 화제였다. 사람들은 사실 그가 영화를 만들고 있었는지, 또 언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아직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북촌방향>만 해도 그렇다. 이 영화는 지난 5월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올라 화제가 됐고 8월 중순 열릴 시네마디지털서울필름페스티벌, 곧 CINDI의 개막작으로 선보일 터다.

해외영화제를 돌아 국내영화제에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북촌방향>은 그렇다 치고, 요즘 홍상수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아직 제목이 알려지지 않은 신작에 대한 것이다. 홍상수는 이번 작품을 포함해 무려 13편의 영화를 찍었고, 지난 2009년부터는 거의 한해 두 편씩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홍상수에게는 요즘이야말로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이후 다시 한번 맞는 질풍노도의 시기인 셈이다.

제목이 미정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되기 전부터 이렇게 홍상수의 신작이 화제를 모으는 데는 세가지 쯤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자벨 위페르 때문이다. 위페르는 유럽의 ‘여신’ 격 배우로 불리며 명실공히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연기자다. 그런 이자벨 위페르가 이번 홍상수의 신작에 전격 출연했다. 카메오나 단역, 혹은 조역으로 홍상수 감독을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다. 위페르는 이를 위해 최근까지 국내에 체류하면서 총 18회 차의 촬영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신작의 내용은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옴니버스 3부작으로 이자벨 위페르는 매 에피소드마다 다른 캐릭터로 출연한다. 국내 배우로는 중견배우인 윤여정 씨를 비롯해,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인 김상경, 류준상, 문소리 등이 캐스팅됐으며 새로운 배우로는 권해효가 발탁됐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의 모든 대사가 영어로 처리됐다는 점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영어 대사만으로 채워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국내 영화로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이를 위해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의 영어 대사 등급을 최상-상-중-하-최하 등으로 분류하고 배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어를 잘 하기로 유명한 윤여정 씨는 최상 등급의 영어 대사를 배정받아 이자벨 위페르와 연기 대결을 벌였다. 촬영 과정에서 들려 온 소문에 따르면 오랜만에 구사하게 된 생활 영어 탓에 윤여정 씨조차 다소 애를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신작이 벌써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세 번째 이유는 이 영화가 어떤 영화제로 갈 것이냐의 향방을 놓고 관심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 관계자들은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은 만큼 내년 칸영화제의 초청은 떼 놓은 당상이 아니냐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내년 칸영화제까지는 거의 10개월이 남은 상태여서 홍상수 감독의 요즘과 같은 활발한 행보를 고려하면 오히려 포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그보다는 매년 2월 열리는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생각해 봄직하지만 전문가들은, 2007년 작인 <밤과 낮>이 경쟁부문 후보에 올랐음에도 수상을 하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면 홍 감독이 선뜻 선택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베를린이든 칸이든 홍상수 감독이 별로 내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이번 신작 외에도 또 한편을 준비 중이기 때문인데, 그는 차기작을 가지고 두 영화제에 대해 저울질을 할 공산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 신작이 착지할 최종 목적지는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지 않겠느냐는 것이 영화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어떤 영화제에, 어떤 대우를 받고 가든 홍상수 감독은 이제 새로운 경지에 접어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영화는 보다 더 미니멀해졌으며 보다 더 노련하게 인간의 위악성을 드러내지만, 예전 작품에 비해 오히려 따뜻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탈(脫)정치적 성향을 전면에 내세우며 현대사회가 정치와 경제, 사회 시스템에 의해 점점 더 구조화되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사회를 보다 좋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 스스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갈수록 미소 띤 구도자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성기게 수염을 기른 외모마저 그렇다. 그래서인지 대중들도 이제 그를 좀더 친근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가 점점 더 화제를 모으고, 인기를 모으며, 토론과 논쟁보다는 입소문의 영화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사진=영화제작전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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