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마술사’,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호방한 상상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조선마술사>는 <혈의 누>, <후궁> 등 현대적인 감각의 사극을 연출했던 김대승 감독의 신작 사극이다. 영화는 이원태·김탁환의 소설 <조선마술사>를 원작으로 삼지만, 추리극의 성격이 짙었던 원작과는 달리, 멜로 라인에 집중한다. 하지만 멜로물로서 영화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진부하고 사랑을 쌓아가는 과정이 밋밋하여, 서사가 부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으로서 영화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아름다운 풍광이나, 다채로운 의상, 화려한 세트 등 영화미술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며, 세련된 음악의 사용도 칭찬할만하다. 영화는 기계장치를 활용한 액션과 신선한 결말을 보여주는데,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호방한 상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 마술사와 가짜 공주라는 신선한 착상

조선시대에도 마술사가 존재했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착안이다. 이는 순전한 상상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에서도 마술공연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홍대용 박지원 등의 실학자들의 저서에 환술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속 <환희기>에 청나라 열하의 장터에서 본 요술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마술사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남사당패의 공연 종목 중에서 현재의 여섯 종목이외에 지금은 사라진 ‘얼른(마술)’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소설 <조선마술사>는 조선후기에 마술공연이 큰 인기를 끌었을 거라는 상상에 입각하여 쓰였다. ‘환희’(유승호)라는 스타마술사 캐릭터나, (파리의 카바레 물랑루즈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물랑루’라는 공연장은 원작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여주인공의 신분이나 두 사람의 첫 만남 등 멜로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는 영화화의 과정에서 온 것이다. 원작에서 여주인공은 진짜 공주로 물랑루의 관객으로 환희와 처음 만난다. 그러나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몰락한 종친의 딸로 청나라 왕실에 신부로 끌려가기 위해 갑자기 공주가 된 여성이다. 이러한 여주인공의 신분은 역사의 기록에서 온 것이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 왕자의 후궁으로 조선의 공주를 보내라고 하자, 조선 왕실은 몰락한 종친 이개음의 딸에게 ‘의순공주’라는 작위를 내리고 청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영화 속 청명(고아라)은 ‘의순공주’를 모델로 한 것이다.



요컨대 영화에서 청명은 몰락한 집안의 딸로 정략결혼에 팔려가는 억압된 존재로 허울만 좋은 귀족 여성이다. 반면 남자는 미천한 신분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이다. 여성이 투신하려는 것을 발견한 남성이 말리는 상황을 통해 두 사람이 만난다. 이러한 설정이나 모티브는 <타이타닉>을 연상시킨다. 뒤늦게 여자의 신분을 알게 된 남성이 함께 도망칠 것을 제안한다거나 남성이 여성의 예물 중 하나인 보물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영화는 <타이타닉>과 같은 결말을 향해 치닫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은 당시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로서 상상하기 힘든 지평을 보여준다. 그러나 느닷없는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스캔들><조선명탐정> 등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서 흔한 도피적 결말은 ‘답답한 조선을 떠나 청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마술사>에서 청나라로 가는 것은 이미 청명에게 주어진 억압의 길이기 때문에,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더 먼 곳으로 가야 한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영화의 결말은 환희의 특이한 용모와 영화의 공간에 의해 암시된 것이다. 한쪽 눈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질성은 그가 조선에 속해있으면서도 다른 곳을 향해있다는 뜻이고, 영화가 공들여 보여준 의주라는 국경지대의 혼종성은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 기계장치를 활용한 환상적인 액션

영화의 설정과 결말이 상당히 좋은 반면, 중간과정이 부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인물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는데, 가령 환희 캐릭터는 유승호의 매력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단정한 용모가 돋보이는 유승호가 시종 더벅머리로 출연하는 것은 ‘오드아이’를 가리기 위함이라는 이유로도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며, 초반에 방탕하고 껄렁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모습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청명의 캐릭터도 더 활력을 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두 사람이 사랑을 쌓아가는 과정이 너무 단조롭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첫사랑이라고는 하나, 과년한 남녀의 연애가 그리 유아적이기만 했을지도 의문이다.

악역인 귀몰(곽도원)도 너무 평면적이고 기능적인 인물로만 묘사되어 그가 벌이는 복수극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멜로물로서 이러한 점들은 분명한 흠결이며,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이러한 인물과 서사에 대한 아쉬움을 영화미술과 영화음악으로 상쇄한다. 화순 적벽이나 세량지 등 로케이션 장소의 아름다운 풍광이나 2천여 벌에 달하는 의상과 직접 지은 세트는 휘황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화의 백미는 후반부의 기계장치를 이용한 액션이다. 마술극장 ‘물랑루’의 무대가 지니는 극적 환시 장치들과 마술무대의 뒤편에 숨겨진 복잡한 기계장치는 꿈을 꾸는 듯한 환상과 숨바꼭질의 액션을 펼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이러한 긴장을 극대화한 작품이 <오페라의 유령>인데, <조선마술사>는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유사한 감흥을 느끼게 한다.

김대승 감독은 전작인 <혈의 누>를 통해서도 기계장치를 활용한 액션의 묘미를 보여준 적이 있다. 전작에서는 조선후기 과학기술의 한계와 폐쇄적인 외딴 섬이라는 제약에 의해 풍부하게 시도되지 못하였는데, <조선마술사>에서는 국경지대의 마술무대라는 상상적 공간을 통해 훨씬 풍부한 방식으로 재현해낸다.

<조선마술사>는 멜로물로서 다소 흠결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각색을 통해 원작소설이 담지 못한 역사적인 의미를 폭넓게 살려내고,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열린 상상을 통해 더 넓은 지평을 사유하게 한다. 이는 감독의 전작 <혈의 누>와 <후궁>을 관통했던 주제의식이 <조선마술사>를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역사에 대한 더 다양한 상상과 더 다채로운 사극이 필요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조선마술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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