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분위기’, 원나잇 스탠드의 감정과 윤리를 사유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그날의 분위기>는 문채원, 유연석이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선남선녀의 여정을 따라가는 로드무비란 점에서는 신선할 것이 없지만, 원나잇 스탠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신선하다. 영화는 원나잇 스탠드를 흥미위주로 소비하지 않으며, 원나잇 스탠드가 품고 있는 감정과 윤리의 문제를 고찰한다. 또한 주연 배우 문채원과 유연석의 케미스트리가 상당히 좋은데, 두 배우의 매력이 다소 밋밋한 전개로 늘어지는 영화의 느낌을 대부분 상쇄한다.

◆ 원나잇 스탠드에 대한 여성 중심의 서사

영화 <그날의 분위기>는 시작과 더불어 몇 장면 안에 두 주인공의 성격을 요약한다. 조깅을 하는 재현(유연석)에게 아는 여자가 따라붙는다. 여자가 자신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말하자 재현은 쿨 하게 “애인이랑 끝나면 연락해”라고 말한다. 재현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관계에 집착하지 않으며, 양다리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다. 수정(문채원)은 갑자기 꺼지는 낡은 노트북을 버리지 않는다. “고쳐 쓰면 된다, 의리가 있지”라 말하는 수정은 오래된 관계를 의리로 유지하는 여자다.

이 두 사람이 우연히 출장길에 부산행 KTX의 옆자리에 앉는다. 재현은 눈에 쏙 들어온 수정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제안을 한다. 수정은 당혹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쾌하다거나 폭력적으로 느끼지는 않는다. 이는 물론 재현이 말쑥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안이 무척 솔직하다는 것도 신선하다. 모호한 감정을 내세우며 애매하게 지분거리는 게 아니라, “오늘 밤 같이 자자”는 명쾌한 요구와 함께 분명한 동의를 구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저 애인 있거든요.”라며 거절하던 수정은 재현의 끈질긴 구애에 차츰 마음이 열린다. 십년이나 만난 애인과는 함께 한 세월과 의리 때문에 못 헤어지는 상태였다. 재현의 제안으로 수정은 이를 자각한다. 영화는 수정이 방어적이던 자세에서 점차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남자에게 마침내 마음을 연다. 이러한 서사에서 관건은 수정의 심경변화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영화 <그날의 분위기>는 아주 치밀하지는 않지만, 수정의 심리변화를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영화는 평범한 성의식을 지닌 여성이 오래 사귄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나잇 스탠드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부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가 여성중심의 서사를 취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만약 영화가 남성중심의 서사를 구사했다면, 남자의 작업에 여성이 넘어 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게임처럼 다루거나,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응하는 여성을 ‘할 것 다 하는 내숭녀’로 규정하거나, 수정을 재현의 수많은 여성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재연의 뒷담화를 후기로 달았을 것이다. 예컨대 ‘여행길 원나잇 스탠드’를 소재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 때, 쿨 한 관계를 즐기는 남자를 주어로 놓고 서사를 전개시키면, 여성은 또다시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에 갇히는 운명에 놓인다.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재현이 아닌 수정을 주어에 놓으면서, 낯선 남자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고, 이를 통해 정체되었던 자신을 딛고 새롭게 도약하는 여성의 성장을 보여준다. 영화는 용기를 낸 수정이 호텔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수정이 꼭 해보고 싶었던 덩크슛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오래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의 뒷담화가 아니라, 여자의 뒷담화를 보여준다.



◆ 이상적인 매너남을 제시하다

영화 <그날의 분위기>는 수정에 비해 재현을 평면적으로 묘사하지만, 재현을 통해 원나잇 스탠드가 지닌 감정과 윤리의 문제를 보여준다. 재현은 늘 그랬듯 가볍게 하룻밤을 제안하지만, 수정이 응하자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들이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마침내 성관계에 이르는 것을 중요한 뼈대로 삼는다. 마치 성관계가 궁극의 목표라도 된다는 듯.

심지어 국내 로맨틱 코미디 중에서는 키스조차 끊임없이 방해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인들 간의 만남에서 섹스는 별다른 금기도 아니고 절대적 행위도 아니다. 잘 수도 있고, 안 잘 수도 있다. 문제는 ‘잔다/안잔다’가 아니라, ‘그때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감정인가’ 하는 것이다. 원나잇 스탠드는 좋지도 나쁘지 않다. 여전히 따라붙는 감정의 문제를 어떻게 소화할지가 중요할 뿐이다.

영화는 시종 쿨 한 카사노바와 같은 태도를 취하던 재현이 막상 호텔방에서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는 모습을 중요하게 담는다. 이후 재현의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오늘 하루만 생각해요”라고 말하던 재현은 “그날이 매일이 되길...”이라는 쪽지를 남긴다. 감정과 관계의 지속을 원하는 것이다. 재현은 수정의 뒷담화 속에서 “의미 없는 원나잇”일 뿐이었다는 말을 엿듣고 상처 받는다. 영화는 수정과 재현이 하룻밤의 감정을 어떻게 소화하고 다시 만나는지를 성의 있게 담는다. 원나잇 스탠드가 단지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 섬세한 감정의 문제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을 대하는 방식에 연애의 윤리가 놓여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날의 분위기>는 재현을 통해 연애의 윤리를 제시한다. 재현은 “쉽게 만나는 것 같지만, 한 여자에게 집중”한다. 힐을 신은 여자의 발 마사지를 해주고, 여자가 승낙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를 존중한다. 동전 던지기 등 장기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며, 콘돔을 잘 챙긴다. 또한 성관계만 원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교류를 중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잘 피력할 수 있는 농구장에 데려가고, 수정의 구차한 연애편력을 경청한다. 심지어 여자의 사회생활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이러한 재현의 모습은 매우 이상적이다. 영화는 다소 도발적인 재현의 제안이 매끄러운 연애로 이어지는 것이 대단히 드문 일임을 의식한다. 그래서 에필로그를 통해 재현의 제안을 따라했을 때 벌어지는 결과를 코믹하게 보여준다. 맞다. 영화는 어떤 이상적인 판타지를 그리고 있으며, 그 판타지의 대부분은 재현의 캐릭터에서 나온다. 이는 단지 재현의 잘생긴 용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쿨 하면서도 사려 깊은 태도와 여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대상화시키지 않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이 단순한 희롱으로 들리거나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남녀 모두에게 축복이 될 그날이 오면

이를테면 영화 <그날의 분위기>는 현실의 남자들이 재현과 같은 태도를 갖추고 있으며, 여성들이 낯선 남자와의 만남에 불필요한 피해의식을 떨쳐버린 근미래 사회에서 일어날 연애의 전범을 보여준다. 현실은 아직 에필로그 장면에 머물러 있지만, 사회전체의 성정치학적 분위기가 달라진다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일들이다.

남녀 모두에게 축복이 될 그날이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들은 우선 ‘소라넷’을 끊고, 동의를 구하는 매너를 익히고, 여자에게 내숭녀니 쌍년이니 뒷담화를 까지 않아야 한다. 여자들은 뺨부터 때릴 게 아니라, 그가 무엇을 원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날이 오면, 분위기에 따라 원나잇 스탠드와 썸과 연애가 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유연석·문채원 같은 선남선녀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그날의 분위기>스틸컷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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