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업 수직계열화, 수명 다 했다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1. “대표적인 시스템업체인 우리나라의 TV 제조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TV를 만드는 데 필요한 대표적인 부품인 디스플레이를 전부 내부 관계사에서만 받아서 쓰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디스플레이 회사들끼리 글로벌하게 경쟁을 시켜야 합니다. 대만 것도 갖다 써야 디스플레이 부문도 계속해서 경쟁력을 키우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계속 안정적으로 관계사에만 납품하면서 안주하다가는 주력상품 하나가 흔들리면 관련 회사들이 모두 줄줄이 흔들리게 됩니다.” (김형준 재료공학부 교수)

#2. “예를 들어 자동차와 제철을 한 회사가 운영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회사의 자동차 부문은 계열사인 제철회사에서 만든 철강재를 가져다가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다른 나라는 차량을 경량화하기 위해 알루미늄 등 경량소재를 쓰는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이 자동차회사는 계열사가 만든 철강재를 쓰느라 새로 개발된 새로운 소재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동차회사의 경쟁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철강회사도 혁신에 소홀해지게 됩니다.” (주종남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중소기업의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 산업구조 혁신의 길로 여러 서울공대 교수가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수직계열 구조를 풀어놓는 일이다. 한국 산업의 미래를 위한 서울공대 교수 26인의 제언을 묶은 책 <축적의 시간>에서 김형준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아직도 20세기형 수직계열화된 사업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기업들이 정신 차리고 고쳐나가야 할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라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이래서는 시스템업체도 소재부품업체도 모두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김 교수는 “애플은 물론 심지어 샤오미까지도 전 세계 회사들을 상대로 가격경쟁력 있는 양질의 부품을 납품받아 상품을 제조한다”며 “우리만 계열사들 사이의 배타적인 공급망 속에서 안주하면 조만간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지 않겠나?”라고 묻는다.

김 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반도체 분야에서도 독립적인 파운드리 전문회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스마트폰 제조업체 A사는 자사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를 직접 생산한다. A사는 물량 확보를 위해 아이폰에 들어가는 AP도 생산·공급한다. 그러나 애플 입장에서 보면 A사가 아닌 파운드리 회사가 자신에게 AP를 공급할 수 있다면 A사 대신 그 파운드리 회사에 생산을 의뢰하게 된다. 왜냐하면 A사는 스마트폰도 제조하는 애플이 경쟁사라서 기술 유출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사육된 협력업체, 약골 체질

A사가 AP 제조를 A파운드리로 독립시켜 다른 파운드리 업체들과 경쟁하도록 하면 A파운드리는 이전처럼 A사에 물량을 독점적으로 공급하지 못하고 외부 업체와 경쟁해야 한다. 대신 애플에서도 경쟁해서 물량을 받아올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돼야 “서로 경쟁하면서 가격이 내려가고 기술도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과 같이 사업부 형태로 내부 고객에게만 공급하게 되면 완전히 포획된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셈”이라고 비유한다. 사육된다는 말이다.

이창희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국내 대기업-중소기업 생태계를 ‘동물원’이라고 표현한다고 전하고 “중소기업은 그 동물원 울타리 안의 각자에게 주어진 영역 안에서 성장해왔다”고 설명한다. 이 교수는 “그런데 이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더 클 수 없다”며 “그 틀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세계 시장에 나가야 하는데 대기업의 통제가 여전하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어느 수준에서 정체하다가 기술이 빠르게 변해서 시장이 달라지면 대응하지 못하고 사라진다고 그는 말한다. 또는 대기업의 해당 상품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곧바로 퇴출 위기로 몰린다고 전한다.

이 교수는 국내 부품·소재 제조업체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이제부터는 대기업과 이어진 탯줄을 끊고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종남 교수는 부품·소재 공급에서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데에는 대기업 책임이 크다고 비판한다. 주 교수는 대기업들이 복수 납품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고 또 웬만한 부품은 자기 계열사에서 만들어버리니 건강한 산업구조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부품 경쟁력이 떨어지고 완성 제품의 경쟁력도 떨어지게 된다.

그는 대기업이 수직계열화를 통해 자사가 쓰는 부품을 계열사가 만들도록 하는 방식이 압축 성장에는 효율적이었지만 이와 같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어 “우리나라가 질적으로 차별성 있는 쪽으로 가려면 부품회사들이 기술을 개발해서 여러 회사에 기술적으로 차별성 있는 부품을 납품하면서 함께 커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산학연 협력으로 중기 기술력 강화 가능

부품·소재 중소기업이 독립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기술력이다. 이에 대해 서울공대 교수들은 앞으로 중소기업 기술력을 향상시킬 여지가 넓다고 말한다. 주 교수는 자신을 찾아온 한 중소기업에 도움을 준 경험을 들려준다.

그 중소기업은 파이프 배관을 받치는 브래킷을 만들어 판매했다. 이 브래킷을 현장에서 조립해야 하는데 무거운 파이프를 올려놓으니까 미끄러지면서 찢어지는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주 교수는 “볼트 모양만 조금 바꿔도 해결되는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 회사에서는 옛날부터 만들어온 틀 안에서만 개선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관점을 바꾸어 다른 시각에서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올 수 있다”며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나올 만한 높은 수준의 지식이 아니더라도 기업이 간단한 부분에서 놓치는 것들을 골프의 원포인트 레슨처럼 학교에서 잡아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축적의 시간>은 한국 산업이 추격자에서 선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연구·개발(R&D)과 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중소기업을 기술력이 있는 강한 기업으로 키우는 방안도 곳곳에서 다룬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국내에도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 같은 역할을 할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우리나라 정부 출연 연구소와 달리 60여 개로 나뉘어 전문 분야별로 대학들 옆에 붙어 있다. 이렇게 대학 중심으로 국가 출연 연구소들을 포진시키고 이들이 기업과 대학의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한다. 차상균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실력을 인정받은 교수가 프라운호퍼 지역연구소장을 하기도 하고, 실력이 출중한 지역연구소장이 대학교수를 겸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전한다.

차국현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프라운호퍼 산하 연구소들은 철저히 중견·중소기업을 돕기 위한 산업 응용 연구를 하는 체계”라며 예를 들어 “프라운호퍼가 100억 원짜리 장비를 설치해놓고 중견기업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도 돕는다”고 말한다. 그는 “베를린 인근에 있는 디스플레이 관련 프라운호퍼 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시스템이 참 잘 운영되고 있더군요”라고 들려준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지난해 5월 ‘한국형 프라운호퍼연구소’가 포함된 ‘정부 R&D 혁신방안’을 마련해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산업지원연구소 6곳을 민간수탁 실적과 연계해 지원함으로써 한국형 프라운호퍼연구소로 개편하겠다고 설명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LG디스플레이, 현대제철,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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