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함께 보는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정국


제16강. 필리버스터 (filibuster)


[명사] [영]
1. 다수당의 일방적인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장시간 발언으로 국회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
2. 지금 이 순간, 드라마보다 예능보다 더 흥미진진한 정치.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이번 편은 QnA 형식을 빌었기에 특별히 경어로 찾아 뵈었습니다.)

Q. 요즘 필리버스터 필리버스터 하는데, 대체 그게 뭔가요?

A. 의회에서 법안을 처리하거나 표결을 할 때, 충분히 토론이 되었고 어느 정도 양보나 합의에 도달한 사안은 바로 표결에 들어가도 되겠지요. 하지만 다수당이 원내 과반 이상을 차지한 경우엔 다수당이 소수당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게 됩니다. 토론이나 협의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일방적인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의원들이 장시간 발언을 신청해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필리버스터’라고 합니다. 한국에선 유신 체제 이후인 1973년 의원의 발언 시간을 제한하는 조항이 만들어져서 사라졌다가, 2012년 국회법 개정과 함께 가능해진 전략이지요. 의외로 역사가 오래 된 전략입니다. 로마의 정치인 카토 또한 줄리우스 시저에 맞서 원로원에서 필리버스터를 시도, 성공한 기록을 남기고 있거든요.

드라마 팬 분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전략일 것입니다. 미국 NBC의 기념비적인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의 2번째 시즌 17화 ‘스택하우스 필리버스터’(2001)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바로 필리버스터니까요. 민주 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아 건강보험안을 통과시키려는 백악관 참모 조쉬(브래들리 윗포드)는 78세 고령의 상원의원 스택하우스(조지 코)로부터 자폐증 관련 연구 예산을 포함해주지 않으면 필리버스터에 나서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조쉬는 설마 그 나이에 몇 시간이나 연설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마음에 그냥 법안을 상원으로 올려 보내지만, 스택하우스 의원은 작정을 하고 8시간 넘게 연설을 합니다.

의제와 관련이 있는 발언만 해야 하는 영국이나 한국과 달리, 미 상원 필리버스터에는 발언 주제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택하우스는 마술에 관한 책이나 새우 요리책을 한참 읽습니다. 스택하우스 의원의 필리버스터 때문에 금요일 밤 발목이 묶인 백악관 스태프들과 기자단에게 대변인 C.J. 크렉(앨리슨 재니)은 말합니다. “여러분 미안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여러분은 지금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걸 보고 계신 겁니다. 아름답죠?”



한국 드라마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지요? KBS <어셈블리>(2015) 12화에는 부정부패 의혹을 산 국무총리 후보자의 임명을 막기 위해 진상필(정재영) 의원 혼자 25시간 넘는 시간 동안 발언을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다들 왕따 괴짜 여당 의원의 원맨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발언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헌법 전문과 국민들이 보낸 엽서를 읽으며 진심을 전달하자 모두들 그의 필리버스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방영될 때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소수파가 말과 논리로 싸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필리버스터가 불가능해진 이후, 한국 의회에서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주도해 법안을 통과시키려 할 때 우리가 보아왔던 광경이란 뻔한 거였으니까요. 먼저 본회의장에 진입해 상대 당이 못 들어오도록 문을 용접하거나 쇠사슬을 감는 의원들, 그걸 뚫고 들어가기 위해 전기톱이나 슬레지해머를 들고 오는 의원들, 저래서 전직 운동선수들을 영입하는 건가 싶은 격투기의 광경 말이죠. 그런데 마치 드라마에서처럼, 헌법 정신을 주지시키기 위해 헌법 전문을 읽는 국회의원을 우리 의회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Q. 왜 야당은 나라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거죠? 뽑아 놓았으면 일을 하게 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

A.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KBS 대하사극 <정도전>(2014) 43화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태조 이성계(유동근)는 개경 민심이 새로 개국한 조선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천도 의사를 밝히지만, 이윽고 신하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힙니다. 태조와 신하들의 극한 대립 속에, 명에 사신으로 갔던 정도전(조재현)이 돌아와 왕을 알현합니다. 다른 신하들을 물린 자리, 태조가 묻습니다.

“대궐 안에 난장이 제대로 섰는데, 봤수까?”

“네, 아주 흐뭇한 광경이었사옵니다. 전하,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천하가 모두 간쟁(국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에 대해 고치도록 비판하던 일)에 나서는 겁니다. 국론은 나라의 원기와도 같은 것이오니, 나랏일로 궐 안팎이 떠들썩한 것은 이 나라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좌. 노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구만, 역시 삼봉도 신하들 편이라 그런 거요? 저들은 말이요. 과인이 하는 일은 사사건건 토를 달고 반대만 하는 자들이오.”

“그것이 바로 신하의 소임이옵니다. 군왕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는 밥버러지일 뿐, 제대로 된 신하라 할 수 없사옵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삼봉이 꿈꾸던 사회는 일종의 입헌군주제와 같은 모델이었습니다. 군주에게 아무 견제 없이 혼자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어주는 것은 나쁜 결정으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일입니다. 세종처럼 어질고 현명한 군주가 보위에 오른다면 한글 창제나 과학기술 융성처럼 긍정적인 위업을 쌓을 수 있겠지만, 모든 군주가 다 세종처럼 어질고 현명할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세종이 있으면 연산이나 인조가 있는 법이지요.

삼봉은 과거 제도를 통해 학식과 덕망을 검증 받아 올라온 인재를 재상으로 삼아 그에게 재량권을 주고 신하들이 임금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를 꿈꿨습니다. 그가 남긴 문집인 <삼봉집>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지요.

“또 인주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총재는 인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인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 [且人主之材 有昏明強弱之不同 順其美而匡其惡獻其可而替其否 以納於大中之域] (<삼봉집> 권7, 조선경국전 치전편, 김동주 역, 한국고전번역원)

700여년 전 출발한 봉건국가 조선도 그 뿌리가 된 개국 철학이 그랬을 진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행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입법부가 제동을 걸고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2014년 <정도전>을 보며 환호했던 분들이라면 ‘천하가 모두 간쟁에 나서’ 시끄러워 ‘난장’이 된 광경은 흐뭇하게 보셔야 할 일일 겁니다. 물론 국가 수반의 입장에선 “사사건건 토를 달고 반대만 하는 자들”로 보이겠지만, 삼봉이 일갈했듯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는 밥버러지일 뿐”이니까요.



Q. 테러방지법에서 야당이 문제 삼는 부분은 국가정보원에 영장 없는 도감청 및 데이터 감시 등에 대한 권한을 준다는 건데, 비록 과도한 권력 집중이라 하더라도 테러 용의자들만을 그 대상으로 운용하면 될 일입니다. 찔릴 일 없는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 이 법안에 반대할 이유가 뭔가요?

A. 어느 한 곳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이들이 선한 의지를 지혜롭게 사용한다면 큰 문제가 안 되겠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언제나 선한 사람이 권력을 쥘 것이란 보장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앉든 제 멋대로 할 수 없도록 제도로 안전장치를 걸어두는 게 중요하지요. 제도와 법령을 통한 법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권력의 오남용을 막는 최소한의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기관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감시하려면 최소한 영장 청구를 통해 그래야 하는 이유를 사법부에 설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부당한 결정이 이뤄지진 않는지를 관리 감독 받아야 합니다. 지금 국회에 올라온 법안은 그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지요. 게다가 테러행위의 정의가 너무 포괄적이라 집행 주체의 자의적인 법 해석이 가능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다시 정도전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이번엔 <정도전>이 아니라 SBS <육룡이 나르샤>(2015~ ) 18화입니다. 홍인방(전노민)과 대화를 나누고 토굴로 돌아온 정도전(김명민)은 그의 대업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서로 서로 견제하는 그림을 그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홍인방의 말이 맞아. 사대부들이란 것들은 주도권을 빼앗길까 무서워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고 질투하고 이기려 하는 그런 족속들인지 모른다. (중략) 그런데 맹자는 그런 족속들에게 나라를 맡겼어. 왜 그랬을까, 맹자는 모르셨던 걸까? 아니! 맹자는 그걸 알기에 인(仁)을 강조한 것이다. 허나 난 인(仁)만으론 못 믿겠다. 해서 사대부들의 의심을 체계로 만들 것이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이기려 하고 깎아 내리려 하는 사대부의 본성 그것을 체계로 만들 것이다. 항상 의심하는 사헌부를 만들 것이고, 항상 질책하는 사간원을 만들 것이며, 늘 떠들어대는 홍문관을 만들 것이다. 사대부는 왕을, 왕은 사대부를, 또 사대부들끼리 서로 의심하여 견제하도록, 하여 어쩔 수 없이 부패와 비리를 저지를 수 없도록. 그런 관료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 대사에서 ‘사대부’란 단어에 ‘권력’을 넣으면 아마 권력 자체의 속성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될 것입니다. 어느 자리든 권력이 모이면 주도권을 쥐고 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고, 권력을 그만큼 쥐지 못한 이들은 권력을 쥔 이들을 의심하고 견제하기 마련이니까요. 정도전이 꿈꿨던 조선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군주조차 신하들의 견제를 받고, 신하들끼리는 서로를 견제하고 의심하는 통에 그 누구도 절대적인 힘을 쥐고 부패할 엄두를 못 내는 나라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정부 체제의 삼권분립과도 닮아 있지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나뉘어져 서로 감시하고 견제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이루는 국가.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정보원 또한 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응당 감시와 견제 없는 과도한 권력을 허락하는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운영 원리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KBS,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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