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분노가 아닌 치유와 회복을 지향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귀향>이 개봉 5일 만에 100만 명의 관객을 넘어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흥행이다. 상영관이 한정된 데다, 일본군 ‘위안부’의 실화를 재현한 영화라는 점이 관객들에게 심리적 부담이 되리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지난 연말 일본과의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에, 최근에 반복된 일본의 강제연행 부인, 그리고 잇단 ‘위안부’ 할머니 두 분의 별세는 <귀향>을 봐야 할 당위와 의무감을 안겼다.

하지만 영화를 의무감으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만듦새가 좋지 못한 경우, ‘봐야 하는 영화’라는 수식은 오히려 반감으로 작용한다. 더구나 소녀들의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잔혹한 장면들을 직접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관람에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귀향>이 흥행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단 의무감으로 보는 영화 이상으로 상당한 작품성을 지닌다. 고통스러운 장면의 재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넘어서는 치유의 기능을 갖기 때문에 피학적인 관람체험으로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고발하면서도, 영화를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었는지 짚어볼 일이다.



◆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귀향’이란 제목은 그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아니다. 귀신 ‘귀’자를 쓰기 때문에, 귀신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옴을 뜻이다.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단순한 르포르타주의 방식이 아니라, 판타지의 기법을 활용하여 풀어낸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겹쳐 놓는다. ‘위안부’ 할머니의 현재와, ‘위안부’ 소녀의 과거를 오가지만,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니다. ‘위안부’ 소녀는 ‘불귀의 객’이 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다른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영매를 통해 친구의 넋을 만난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세 소녀가 등장한다. 과거 장면에서 주인공 소녀인 정민(강하나), 할머니가 된 소녀 영옥(서미지), 그리고 이들을 만나게 하는 영매 은경(최리)이다. 왜 이런 구도를 짰을까.

가장 큰 이유는 ‘위안부’에 대한 논의를 국내에 등록된 238명의 ‘위안부’ 할머니, 혹은 현재 생존해 계신 44명의 ‘위안부’ 할머니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며 약 20만 명으로 추산한다. 그 중 상당수의 피해자들이 전장에서 폭행이나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퇴각 시 학살되거나 버려졌다. 끌려간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부일 뿐이며, 그중 한반도 남쪽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더욱 소수이다. 이들 중에서 종전 후 46년이 지난 뒤 스스로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힌 사람들이 238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통 ‘위안부’ 피해자라 하면 현재 살아계신 44명이나, 등록된 238명으로 논의가 축소되기 일쑤이다. 1990년대에 아시아여성기금이 논의 될 때도 그렇고, 지난 연말 굴욕협상의 대가로 운운되는 10억 엔의 용처를 말할 때에도 대상자는 이들에 한정된다. 전장에서 죽거나 버려진 약 20만 명의 희생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귀향>은 주인공 소녀를 전장에서 죽은 희생자로 설정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감독은 14년 전 ‘나눔의 집’에서 만난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소녀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을 결심하였다고 말한다. 전장에서 ‘불귀의 객’이 된 그들을 혼백의 상태로라도 고향으로 돌아오게끔 하겠다는 것이 <귀향>의 취지이다. 이런 이유로 영화는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단선적인 회고담이 아니라, 산자와 죽은 자가 진도 씻김굿을 통해 만나는 판타지의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 젠더폭력과 여성들끼리의 연대

전장에서 죽은 정민은 영매 은경의 몸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은경은 성폭행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상처를 안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암시한다. ‘위안부’ 문제를 조선 대 일본이라는 민족주의의 구도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전쟁시 여성에게 가해진 남성화된 국가폭력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아래에는 제국주의와 계급문제가 깔려 있다. 영화에서 은경은 집에 온 탈주범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이를 목격한 아버지가 탈주범에게 달려들다 죽임을 당한다. 딸을 지키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는 식민지 조국에 대한 유비이다. 즉 영화에서 식민지 조선의 소녀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위안부’로 고통당한 역사는 무도한 침입자에 의해 딸은 성폭행을 당하고 아버지는 죽임을 당한 사건과 비슷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즉 젠더폭력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다.



영화 <귀향>은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으로 사유하며, 그 안에서 피해자 여성들끼리 서로를 보듬는 연대를 보여준다. 정민은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차 안에서 고열에 시달리는 영옥에게 자신의 괴불노리개를 쥐어주며 위로한다. 지옥 같은 ‘위안소’에서 잠시 평화로운 순간은 소녀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목욕하는 장면이다. 얼굴과 몸에 온통 멍투성이이지만, 이들은 또래 소녀들이 그러하듯이 해맑고 명랑하다. 조선 8도에서 끌려 온 소녀들이 모인 그곳에 중국인 소녀도 섞여 있다. 그 중 리더십이 있는 소녀는 일본병사와 약간의 협상을 하기도 한다. 정신 착란에 빠진 소녀를 다른 소녀들이 보호하려고 애쓰고, 죽음을 앞 둔 순간 정신착란의 소녀가 오히려 다른 소녀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은 눈물겹다.

전장에서 고통당하는 소녀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마지막 순간 생사를 기로에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나, 현재 장면에서도 무녀 할머니와 영옥(손숙)이 서로를 살피는 우정, 무녀 할머니의 집에 머물게 된 은경과 애리의 자매애 등은 모두 여성들 간의 연대를 보여준다. 영옥의 양아들과 손주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며, 영옥의 고향 길에 동행하는 사람은 은경이다. 정민의 엄마가 만들어준 괴불 노리개를 매개로 정민과 영옥과 은경의 영혼이 교감한다. 영화 전체가 여성들끼리 보살피고 위로하고 씻김굿을 해주는 자매애적 공동체의 기운을 내뿜는다.



◆ 거짓 논점들을 비껴가기

영화 <귀향> 조금은 논쟁적일 수 있는 요소를 품으며, <제국의 위안부> 등이 힘주어 말하는 문제들이 전혀 본질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논파해낸다. 영화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장면은 ‘위안부’ 소녀들 중 한 명이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는 평양 권번 출신으로, 다른 소녀들보다 나이가 많다.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를 비롯하여 일본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위안부’는 매춘부 였다”는 주장과 이를 둘러싸고 “‘위안부’를 창녀라고 하다니, 명예훼손이다”라는 항변이 처해 있는 논점이탈을 보여준다.

‘위안부’들 중에는 강제 연행 된 순결한 십대 소녀들도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지만 취업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성매매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았던 권번출신 성인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설사 성매매임을 알았던 권번 출신의 성인이라 할지라도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끔찍한 국가폭력을 겪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상당수가 순결한 십대 소녀였다는 사실은 사태의 극악함을 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그들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이 얼마나 가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이었는지가 관건이다. 영화는 초경도 시작되기 전의 순결한 14세 소녀 정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그곳의 다양한 여성들의 존재를 통해 논지가 고착되는 것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정민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의 소녀로, 어느 날 집으로 찾아 온 일본군에 의해 부모가 보는 앞에서 강제로 끌려간다. 부모에게 빚이나, 형벌, 징용 등에 관한 협박이 선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장면을 강제연행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쟁적이다. 강제연행을 극구 부인하는 일본극우의 입장이라면, 이 장면은 강제연행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부모의 승인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길가나 들판에서 강제로 끌고 간 것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단편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서운 할머니의 예에서 보듯이, 가족에 대한 협박도 강제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강제성을 물리적인 개념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위안소’를 운영하는 조선인 업자가 등장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업자’의 존재를 강조하며, ‘위안소’ 운영의 책임이 일본군이 아닌 이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이 ‘위안소’를 운영하는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것은 사태의 본질과 아무 관계가 없다. ‘위안부’ 소녀들을 전장까지 수송한 것도 일본군이요, 부대 내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을 맡긴 것도 일본군이다. ‘위안부’들의 신체를 검진하는 것도 일본군 군의관이고 부대원들의 이용 규칙을 정하는 것도 일본군이다. 영화는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상당히 디테일하게 ‘위안소’의 질서를 그린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인 업자가 ‘위안소’를 위탁관리하고 있었다할지라도, ‘위안부’ 제도의 운영에 관한 총체적인 권한과 책임은 일본군에게 있다는 점이다.

또한 영화에는 ‘위안부’ 소녀와 병사 간에 잠시 품는 애틋한 마음도 묘사되어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소’가 폭력적이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면서 병사와의 로맨스를 상세하게 거론한다. 영화는 어쩌면 그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로맨스가 ‘위안부’로서 겪는 끔찍한 폭력과 죽음의 공포를 상쇄하지 못하며, ‘위안부’가 처한 상황을 설명함에 있어서 전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 ‘위안부’ 문제의 현재성에 관하여

영화 <귀향>은 TV 속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서 출발한다.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뉴스와 함께 김학순 할머니의 인터뷰 장면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과거 경험을 말하는 것의 수치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 인터뷰어가 묻는다. “지금도 부끄러우세요?” 할머니는 “지금은 부끄럽지 않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영화는 할머니들을 단지 ‘피해자’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수치스럽지 않다”고 각성하게 되는 지점을 그린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TV에서 증언을 본 영옥 할머니가 결심을 하고 동사무소에 간 장면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나?”라는 무심한 직원의 말에 쭈뼛거리던 영옥은 격분하여 소리친다. “내가 그 미친 사람” 이라고. 이 장면은 ‘위안부’ 문제가 일본과 조선이라는 민족주의의 문제가 아님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해방 후 46년 동안 왜 ‘위안부’ 문제는 공론화 될 수 없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해방 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한국의 가부장 문화도 그들을 억압했던 남성적 권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여전히 남아있는 군사 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와 청산되지 못한 친일권력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옥죈다. 영화는 마지막 해원의 굿판이 벌어진 가운데, 구경꾼으로 태평양전쟁 시절 일본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것은 ‘위안부’ 문제의 현재성을 짚어 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한미일 동맹의 강화를 위해, 한일관계의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를 제거하려고 한 한국정부의 모습에서 보듯이, ‘위안부’의 넋을 온전히 불러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척력이 지금 우리 안에 있다.



◆ 고발을 수행하면서도, 치유를 지향하다.

영화 <귀향>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참혹한 실상을 재현한다. 영화는 2.35대 1의 화면 비를 유지하다가 ‘위안소’를 부감 숏으로 찍은 장면에서만 유독 1.85대 1의 화면비율로 바뀐다. 그 만큼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장면은 ‘위안소’의 각 방마다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복도에 늘어선 일본군들의 모습에서 보듯이 이러한 폭행이 가해자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임을 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이러한 부감 숏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린 어린이용 그림책 <꽃 할머니>를 만든 권윤덕 화백을 다룬 다큐멘터리 <그리고 싶은 것>에도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혹자는 부감 숏을 비롯한 몇몇 장면들을 거론하며, “<귀향>이 역사적 고발을 빌미삼아 관음증을 충족시킨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물론 세상에는 역사적 고발을 빌미로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가령 <어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나 <이승연 위안부 누드 사진집>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귀향>에 그러한 혐의를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 몇몇 장면들의 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 증언에 비하면 표현이 훨씬 약화된 것이다. 증언 그대로 재현하면, 차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가 미성년자였음을 감안하면 더 섬세한 연출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인 ‘위안부’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단편 영화, 애니메이션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편극영화를 찍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추상적인 느낌으로 용서와 사과를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리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지나친 고통을 안기지 않는 수준에서 역사적 사실을 체험시키는 데 성공한다. 나아가 단순히 고발에 머물지 않고, 영적 소통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향한 염원을 보여준다. 굉장히 보기 힘든 영화일 것이라는 걱정을 품고 상영관에 간 사람들이 순연한 씻김굿을 보고 상영관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봐야만 하는 영화’가 아니라, ‘볼 것을 권하고픈’ 영화가 되어, <귀향>에 대한 입소문이 번지고 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귀향>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