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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크러쉬’ 열풍, ‘센 언니’ 개념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사입력 :[ 2016-03-15 16:40 ]


‘걸크러쉬’ 열풍에서 주목할 점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곧 우리나라에도 출간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 <체체파리의 비법>에 수록된 단편 ‘접속된 소녀’엔 기형적인 몸을 갖고 태어났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몸에 접속해서 스타가 되는 여자 이야기가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책을 읽어보면 될 일이고. 하여간 이 아름다운 소녀 델피는 성을 초월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는데, 여기서 작가는 과거의 섹시 스타 진 할로를 예로 들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배우 진 할로 기억해? 확실히 섹시스타지. 하지만 게리와 멤피스에 사는 가정밖에 모르는 주부들이 금발에 미치광이 같은 눈썹을 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여신이 ‘자신들의 귀여운 아기’라는 걸 어떻게 안 걸까? 그리고 왜 진에게 자기들 남편은 그녀에게 충분하지 못하다는 경고를 담은 편지를 쓴 걸까? 왜?”

글쎄다. 하여간 여기서 흥미로운 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몇 년 뒤 여성인 앨리스 셸든임이 밝혀지면서 이 문장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어느 정도 자기고백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 연예인들에 대한 여성 팬들의 역사는 길고 깊으며 폭도 넓다. 요새 한국에서 유행하는 걸크러쉬라는 개념에 신경이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외래 개념이나 단어들이 종종 그렇듯, 걸크러쉬도 의미가 축소되고 단순화되었다. 대부분 연예계 사람들은 이 개념을 ‘쎈 언니’ 정도로 사용하려 하는데, 이건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여성 팬들이 여성 연예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걸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끌어모았던 팬들을 몽땅 날려버린 한심한 예가 키썸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걸크러쉬라는 개념이 가졌던 문제점에 대해서도 일단은 넘기겠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여성팬들을 가진 여성 연예인들이 남성 연예인의 대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만 계산하면 가지고 있는 밑천도 뽑지 못한다.

걸크러쉬 열풍에서 주목할 점은 여성 팬들의 존재가 드러났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중요한 존재였던 이들이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무시되었다는 데에 있다. 1930~40년대 무렵에 유행했던 할리우드의 여성 영화의 관객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에 출연했던 베티 데이비스, 그레타 가르보, 캐서린 헵번, 마를레네 디트리히, 조운 크로포드와 같은 여자배우들을 지지하는 절대적인 세력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섹시 스타 진 할로 같은 배우도 마찬가지. 진 할로에 열광하고 그 스타일을 따라했던 여성팬들 중엔 노마 진 베이커라는 소녀가 있었고 그 소녀가 나중에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는 게 좋겠다. 그리고 먼로의 여성팬 비중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 그 중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조이스 캐롤 오츠 같은 쟁쟁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의 예로는 <캐롤>의 두 주연배우인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최근에 한국에서 거의 컬트적인 인기를 끌며 여성팬들을 모으고 있는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이, 동성애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1940년대 여성영화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캐롤>을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1940년대 여성영화의 두 여자주인공이 만나 연애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인 캐롤과 테레즈, 그리고 그들을 연기하는 두 배우의 꼼꼼한 디테일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객들은 당시에도 그랬던 것처럼 여자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들이 가진 매력은 그들이 여성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팬들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여자연예인이건, 남자연예인이건, 충성스럽고 오래가는 팬들은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출연 영화의 시사회가 열릴 때마다 꾸준히 선물을 들고 극장을 찾는 성유리의 여성팬들이 떠오른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밑천을 최대한으로 뽑고 오래가려면 이들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고 그 결과물은 ‘쎈 언니’ 이상이 나와야 할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제발 ‘쎈 언니’란 말도 쓰지 말자. 이 표현의 부정적이고 유치한 의미를 아직도 모르는 걸까?

얼마 전 아이즈 인터뷰에서 걸그룹 여자친구의 소속사 대표가 이런 말을 한 걸 기억한다. “직원들이 여성 팬덤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국 여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길게 봤을 때 대중적으로는 알려져도 팬은 못 모은다고 이야기했었다. 여성 팬들을 많이 얻고 싶었기 때문에 ‘시간을 달려서’로 꼭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있다.”

참 배우신 분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KBS, 영화 <7년만의 외출><캐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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