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한 이세돌의 복기, 복기, 또 복기···벼르고 벼른 5국 가장 아쉬워해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우리는 달에 도착했다.” 알파고가 예상을 뒤엎고 첫 판에 이세돌을 깨자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딥마인드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알파고에게 정복된 ‘달’ 이세돌의 심경에는 충격, 당황, 참담, 열패감, 수치, 자책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들끓고 있었으리라.

대국이 끝나고 30분쯤 지난 뒤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장은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6층, 대국장 옆에 마련된 내신기자실이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해하더니 불계패라니. 이세돌이 무슨 말을 할지 관심이 집중됐다.

이세돌은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국제바둑연맹 이하진 사무국장이 대국장으로 찾아갔다. 이세돌은 혼자 앉아 복기를 하고 있었다. 이 국장한테 이끌려 기자회견장에 오면서도 계속 “거기서 한 칸을 뛰어야 했나?” “날일자가 안 좋았지?”라며 의견을 물었다.

◆ 3국 앞두곤 새벽 6시까지 분석

이 국장은 두 번째 대국 때부터는 이세돌과 함께 복기할 프로기사들을 모았다. 박정상 9단, 홍민표 9단, 이다혜 4단 등이 하나둘 호텔방에 모였다. 호텔방에 들어서는 이다혜 4단을 보고 이세돌이 한 말은 인사가 아니었다. 대뜸 “중간에 그 수 이상하지 않았어?”라고 물었다.

연구는 새벽 6시까지 이어졌다. 3국은 하루 쉬고 열릴 예정이었다.

이다혜 4단은 나중에 저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세돌이 오빠 멘탈이 진짜 말도 안 돼. 나 같았으면 바둑 진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을 텐데, 그것보다는 실수한 수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더라. 그 사람은 정말 바둑 기사야. 진짜 대단한 것 같아.”

이세돌은 알파고를 모른 채 만만하게 봤다가 허탈하게 첫 판을 내줬고, 두 번째 판에서 완패했다. 세 번째 판에는 물러설 수 없었다. 3국도 지면 남은 두 판과 무관하게 패배가 확정된다. 이세돌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초반에 바둑 내용을 복잡하게 만들고 불리해지면 패를 이용해 승부수를 던진다는 전략을 짰다.

그러나 3국에서도 알파고는 약점을 보이지 않으며 불계승을 거뒀다. 알파고는 패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패 신동’이었다. 이세돌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무력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류가 패배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3국에서 패배한 직후에도 이세돌은 복기를 했다. 대국장에서 양건 9단, 한종진 9단과 기자회견이 열릴 때까지 복기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세 사람은 다시 호텔방에서 만나 대국을 분석했다. 셋은 밥을 먹고 맥주도 한잔했다.

한종진 9단은 이세돌이 대국 이야기만 했다고 전했다.

“특히 2국이 우세할 수 있었는데 안일했고, 만약 2국을 이겼으면 많이 달라졌을 거라며 아쉬워하더라고요. 또 알파고는 분명히 약점이 있을 터라며 알파고의 허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요. (이세돌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 이세돌의 복기를 우리 삶에 적용하면?

패배가 확정된 뒤 이세돌은 4국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날은 박정상 9단과 백홍석 9단이 왔다. 셋은 저녁을 룸서비스로 대충 해결하고 포석을 논의했다. 밤 10시 10분, 두 기사는 호텔을 나왔다. 박 9단은 11시 뉴스 출연을 위해 여의도 KBS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옷을 호텔방에 두고 왔다. 그는 11시 50분쯤 호텔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자 이세돌 9단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바둑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때 마주친 이세돌의 눈빛이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이세돌은 5국을 특히 아쉬워했다.

“3국까지는 알파고를 몰라서 제대로 붙어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4국부터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5국은 진짜 제대로 붙어보고 싶어서 준비를 가장 많이 했어요. 초반까지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마지막 판을 복기하는 술자리는 12시가 다 돼서야 마무리됐다.

이쯤에서 저자를 소개해야겠다. 아마 5단으로 중앙일보에서 바둑 기사를 쓰는 저자는 초등학교 때 바둑을 배웠고 프로기사를 꿈꾸기도 했다. 집이 지방에 있어 전국대회에 참가할 때면 상경했다. 대회가 끝나면 종일 소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알려드려야 했다. 중간에 떨어진 날에는 전화를 걸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한참을 공중전화기 앞에서 서성거렸다. 저자는 “그때부터인가, 패배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프로기사를 가슴 깊이 존경하게 됐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가 잠시 경험한 승부의 세계와 그가 전한, 패배에 임하는 이세돌의 자세에 감동받았다. 그리고 이세돌의 자세를 삶에 적용한다면 ‘복기’보다는 ‘대비’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미 망가진 일을 붙들고 있는 건 소모적이다. 반대로 성과를 반추하는 작업은 퇴영적이다. 그보다는 앞으로 닥칠 일을 과거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미리 치러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책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의문을 제기하고 답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이세돌에 앞서 알파고와 겨룬 판후이 2단을 이메일로 인터뷰하는데, 판후이 2단은 알파고의 장단점과 특징 등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다”고만 말하며 말을 극도로 아꼈다. 판후이 2단이 말문을 닫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 아자황은 왜 화장실도 가지 않았나

무표정한 얼굴로 다섯 차례 대국에서 알파고 대신 돌을 놓은 아자황 구글딥마인드 연구원은 “그 사람이 알파고야?”라는 말을 들었다. 아자황은 아마 6단으로 사내에서 최고수다. 그는 대국 내내 화장실에 한 번도 가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알파고를 도왔다. 이세돌 어머니 박양례 씨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아자황 연구원에 대해 “우리 세돌이가 긴장하지 않도록 한 번쯤 웃어주고 바둑알을 놓으면 좋을 텐데 화장실도 가지 않고 목석처럼 바둑 두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아자황 연구원은 이세돌 앞에 앉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히 영광스럽다고 말했다고 이하진 국장은 전했다. 아자황이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킨 건 왜였을까. 존경하는 이세돌 앞 자리에서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사람은 충돌하고 교류하면서 발전한다. 판후이도 알파고와 대국한 뒤 전과 판이하게 바둑에 접근하게 됐다. 그는 “바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비유하고 “알파고와의 대결을 계기로 바둑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바둑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세돌은 과연 알파고와 대국한 이후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그는 지난 10일 원성진 9단에게 불계승을 거두고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다섯 번째로 우승했다. 이세돌은 “상대적으로 알파고 대국 이후 기세를 타 결과가 좋게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찍힌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이를 예언한 바 있다.

“그는 이제 훨씬 강력한 ‘알파 이세돌’로 거듭났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한국기원]

[책 정보]
《이세돌의 일주일》, 정아람 지음, 231쪽, 동아시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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