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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에서 만난 외유내강의 한국 여성 ‘감동’
기사입력 :[ 2011-08-17 14:04 ]


“그럴 것 없습니더. 이제 나도 당신 볼 일 없으니. 동윤이가 갔소. 어린 것이 잠도 못 자고, 죽도 못 넘기고 온 몸이 불덩이라. 의원은 왕진 가서 기약이 없고. 그래, 잘난 당신한테 사람을 보냈더니 그 독립운동인가 뭔가 한다고 못 온다 했다믄서요. 독립? 그게 뭐니껴? 그게 우리 동윤이 목심만큼이나 중한 거니껴? 동윤이 가는 길에 낯짝 한번 못 뵈줄 만큼 대단한 거니껴? 이제 알겠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암 것도 아닌 사내란 말이요.”

- MBC 광복절 특집극 <절정>에서 이육사(김동완 분)의 아내의 포한 맺힌 절규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여학생 적에 공책에 써보고 또 써보던 이육사 선생의 시 ‘광야’의 마지막 구절이다. 광야라는 두근거리는 미지의 공간, 그리고 초인이라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인물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슴 벅차 하며 자주 이 구절을 읊조렸던 것 같다. 이처럼 가슴 절절한 시를 토해내는 시인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지, 그 시절 막연한 상상에 젖었던 기억이 떠올라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선생의 이야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선생의 이야기 <절정> 속에서 복사꽃 같이 고운, 외유내강의 전형인 한국의 여성을 만났다. 바로 선생의 부인 안일양(서현진 분) 여사다. 광복절 특집극 <절정>에는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항거한 시인 이육사(김동완 분) 선생의 삶도 있지만 선택권이라곤 없이 운명에 순응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한 여성의 피눈물어린 인생도 있는 것이다.

1904년에 태어나 1944년, 해방 바로 한 해전 북경에서 고문사하기까지 무려 열일곱 차례나 투옥을 당하셨다는 이육사 선생. 처음 수감되었을 당시 수인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정하셨다는 선생의 뒤에는 지아비를 하늘같이 섬기는 아내가 있었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내자에게 고향집과 부모님을 맡겨놓고 일본으로, 중국으로 떠돌며 독립운동에 전념한 사이, 내 집 드나들 듯 감옥을 드나드는 사이 아들 동윤이 태어났지만 선생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시절 경성유학이며 일본유학을 했던 지식인의 고향처가 대부분 그랬듯 남편 주위를 맴도는 신여성 때문에 맘고생도 꽤 했지 싶다.

18세 때에 혼인하고 얼마 안 있어 일본으로 떠나셨다니, 그리고 한 해만에 돌아왔지만 이내 북경으로 건너가 의열단 활동을 시작하셨다니 생과부와 다름없는 나날이 아니었겠는가. 게다가 말이 쉽지, 번번이 잡혀 들어가는 결핵으로 몸도 성치 않은 남편을 위해 옥바라지로 솜옷을 누벼야하는 심정이 오죽 답답했을까.

그러나 지아비의 뜻을 거스를 줄 모르던 그녀는 그나마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금쪽같은 어린 아들을 잃고 나자 비로소 투옥 중인 남편에게 달려와 ‘대체 독립이 무엇이냐, 내 아들 목숨보다 더 중한 것이냐’며 처음으로 항변다운 항변을 해본다. 가슴에 맺힌 말을 쏟아낸 후 쌩하니 떨치고 일어서는 그녀를 보고 드디어 이젠 끝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진 남편이 출옥하여 돌아오자 다시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기다림의 시간들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만다. 끝내 평생의 소망인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머나먼 중국 땅에서 숨을 거둔 선생도 안타깝지만 그 후 한 점 혈육인 딸 하나를 데리고 6.25 전쟁을 비롯한 온갖 고난을 넘겼을 선생의 부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수많은 인사들이 변절을 일삼는 사이 쇠약해진 몸으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신 이육사 선생.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이르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안일양 여사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서글프기 짝이 없다. 하기야 그렇게 스러진 이름 모를 여성들이 이 땅에 얼마나 허다하니 많았겠는가.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비 한방을 내리잖는 그때에도/오히려 꽃을 빨갛게 피지 않는가’ 혹독한 시대 상황을 이겨내고 독립의 날이 오길 기다리는 선생의 시 ‘꽃’에 나오는 ‘빨갛게 핀 꽃’은 안일양 여사라고 믿고 싶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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