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의 흥행은 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터널>이 6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하고 있다. 물론 폭염으로 인한 피서 관객이 더해져 평소에 비해 2-30%의 늘어난 숫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흥행이다.

<터널>은 터널 붕괴로 매몰된 생존자의 구조를 둘러싼 영화이다. 재난물이긴 하지만 <해운대>같은 스펙터클이 존재하지 않으며, 1인극이라는 설정과 공간의 제한으로 인해 피서영화로는 적당해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을 이어가는 데는 영화가 특별한 감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재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는 감동을 일깨운다. 특히 <더 테러 라이브>에 이어 1인극을 밀고 나가는 하정우의 뚝심은 상찬할만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감흥의 한계 역시 명확해 보인다. 영화가 필연적으로 연상시키는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터널>의 흥행이 세월호 참사 해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온건한 한계를 증명한다.

◆ 최소한의 리얼리티 속의 어떤 위로

<터널>은 원작소설이 존재하는 영화이다. 소설 <터널>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나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재난과 구조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을 무섭게 짚어냈다. 들끓었던 국민적 관심이 차츰 피해자에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마치 예언서처럼 그려내었는데, 1년 후 세월호 참사에서 소설 속 상황이 더욱 강렬하고 대규모로 벌어지는 현실을 전국민이 목도하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재난이 그저 자연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이고 지극히 사회적인 문제임을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적으로 각인시켰다. 그 결과 이제 한국인이라면 <해운대>처럼 단순하게 접근한 재난영화를 상상하거나 즐기기 어렵다. 싫든 좋든 거기에는 무능한 정부와 하이에나 같은 언론, 냉혹한 자본의 논리 등 기본적인 사회학을 첨부할 수밖에 없다.

<터널>은 바로 그러한 담론지형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영화이다. <터널>은 우리가 모두 겪었던 그 트라우마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판타지를 구사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흥행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흥행이 아무런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



가령 <도가니>가 46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하였을 때, 실제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요구되고 법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을 떠올려보자. <터널>의 관객수가 600만에 육박하지만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의 강제종료에 항의하거나, 단식투쟁 중인 유가족들을 응원하는 여론으로 옮겨 붙진 않는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도가니>의 경우 관객은 사태를 몰랐거나 책임이 없는 자로서 분노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었지만, <터널>의 경우 사태를 다 알고 있었으며 책임을 일부 나눠진 자로서 오히려 위로받고 면죄 받고 싶은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터널>은 그러한 위치에 놓인 관객의 무의식에 봉사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재난을 다루되 면밀하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견딜만한 것’으로 다룬다. 물론 여기서 ‘견디다’의 주체는 관객이다. 가령 무너진 터널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눈 뜬 이정수(하정우)가 가까스로 휴대폰을 들어 119에 전화를 걸었을 때, 한갓지게 전화를 받은 구조센터의 목소리와 그 와중에 전화기를 걸어 인터뷰를 시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진심으로 재난스럽지만 영화는 이 느낌을 지긋이 밀고나가지 않는다. 곧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구조대장(오달수)를 등장시킨다. 그가 아주 전문성을 풍기지는 않지만, 기자를 제지하고 이정수와의 짧은 통화를 통해 주의사항을 말해주는 대목은 상당한 신뢰감을 안긴다.



영화는 이후 구조대의 허둥지둥, 의전 챙기기, 선정적인 언론의 행태를 짚어내지만, 그것을 묵직한 시선으로 비판하거나 이면을 성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짧게 스케치하거나 블랙코미디적인 유머로 퉁치고 지나간다. 17일 동안 국민의 응원을 받으며 파들어 갔던 지점이 엉뚱한 장소였다는 서사의 중대 고비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 에프엠대로 짓는 공사가 어딨나?”는 한 두 마디로 넘어간다. 구조작업 중의 대원의 죽음도 우연한 사고로 묘사하고 넘어간다.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다 아시죠?’ 하고 지나가는 셈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영화 속 상황의 인과관계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상세한 판본의 내용을 전 국민이 이미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피곤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를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 가장 이상적인 피해자와 구조자

영화를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조치는 인물의 설정에 있다. 영화는 시작 후 5분 동안 이정수가 어떤 인물인지 스케치해서 보여준다. 그는 자동차 판매원으로 영업사원 특유의 강한 멘탈과 친절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능청스러울 정도의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 영화는 주인공을 이렇게 설정한 뒤, 그가 처한 상황의 극한의 괴로움을 희석시킨다. 즉 그가 느끼는 갈증과 허기와 추위와 고독과 절망에 집중하기보다, 하정우 특유의 느낌으로 살려낸 긍정적인 성격에 기대어 어떻게든 그가 이 고난을 극복해내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에게 부여한 성격은 또 다른 희생자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영화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또 다른 매몰자 미나를 등장시키는데, 극히 편의적인 발상으로 이 캐릭터를 활용한다. 영화에서 미나의 존재는 이정수가 미나의 개를 발견한 뒤 등장한다. CCTV나 실종신고 등을 통해 미나의 존재가 터널 밖에서 확인될 만도 하지만, 미나의 부재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미나의 사회적 존재감은 이정수에 비해 너무 낮다. 미나는 자신이 중상을 입은 줄도 모른 채 갇혀 있다가 이정수에 의해 외부에 알려지고 부모와 통화한다. 그는 취업준비생으로 부모의 차를 끌고 나와 사고를 당했다며,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정수에게도 연거푸 미안하다 말하며 물을 달라고 한다.



영화가 미나를 묘사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터널 밖에서 그는 한 사람의 희생자로 기려지지 않는다. 터널 밖 세상은 오직 이정수의 생환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미나 부모의 목소리는 등장하지 않으며, 터널 밖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터널 안에서 미나는 생존의 의지를 발현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이정수에게 미안해하며 물을 얻어먹는 존재이다. 그의 부모는 모자란 통화시간에 굳이 이정수를 바꿔달라고 해서 미나를 부탁한다. 그러니까 미나는 자율적인 생존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정수에게 부과된 어떤 존재’로 등장한다. 예컨대 미나는 이정수가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험지이다.

영화는 미나를 통해, 이정수가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나가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이정수는 생명과도 같은 남은 물을 준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윤리적 고민에 집중하기보다는 이정수에게 주어진 설정값, 즉 그는 매우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그 설정값에 의거해 쉽게 결정하게 한다. 물론 그의 숭고한 행위는 관객의 입장에서 지극히 위안이 된다. 이정수라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존재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호의는 재난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위로를 던지는 법이니까.

구조대장 캐릭터 역시 관객을 향한 위로에 복무한다. 그는 오줌을 먹어볼 정도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뛰어난 자이고, 발언권도 없는 토론회장에서 “거기엔 사람이 있다”며 뼈아픈 말을 던지는 사람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면 너무 비겁하잖아”라는 말을 남기며 구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월호의 국면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해경의 구조를 상상적으로 대리한다. 현실의 빈 구멍을 메우는 판타지로 관객을 위무하는 존재인 것이다.



◆ 그는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

요컨대 영화 <터널>은 터널 안과 밖의 재난을 ‘견딜만한 것’으로 그리는데, 이러한 ‘의도적인 안일함’은 영화의 결말부에 두드러진다. 이정수는 35일째 구조된다.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뒤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그가 27일 째 살아있음이 확인되고, 그로부터 중단되었던 구조작업이 재개되어 8일이 지난 뒤 발견된 그가 살아있었다는 말이다. 그의 생존 드라마에서 정말로 중요했을 그 마지막 8일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않고, 구조재개와 생존확인을 곧바로 이어 붙인다.

이정수가 구조대의 말을 믿고 성실히 기다렸던 17일보다 훨씬 더 큰 의지가 필요했던 그 마지막 8일, 그러니까 그토록 낙천적인 그가 “숨을 쉴 수가 없다. 이제 정말로 못하겠다.”고 낙담한 뒤, 휴대폰마저 끊기고, 라디오방송을 통해 아내의 목소리로 구조를 중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빈사상태에 놓여있던 그가 경음기를 울리고 다시 빈사상태에 놓인 채 기다려야 했던 그 시간들을 영화는 공백의 형태로 건너뛴다.

그 시간들을 과연 이정수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어떻게 버텼기에 구조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영화는 답을 마련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답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며, 상상을 통해서도 메울 수 없는 공백이고, 영화 속 TV프로그램의 대사처럼 “어떤 통계보다 희망을 믿고 싶다”는 말로 대리되는 ‘워너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정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하지 않는데, 이는 곧 이정수는 살아야 하니까 살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요컨대 이정수의 생존은 서사의 필연성이나 현실성을 떠나서 관객에게 ‘위무’를 던져야하는 영화의 당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영화의 결말은 반드시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이는 영화가 사망자 미나와 생존자 이정수를 다르게 취급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재난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인 것은 관습적이다. 문제는 영화의 해피엔딩이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 질문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던지는 중대한 질문은 이것이다. 터널 안의 한 사람, 그것도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며,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있을 확률이 떨어지는 한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사회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가. 구조작업의 비용도 문제지만, 제2터널 공사가 늦춰짐으로 인해 생기는 경제적 손실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된다. 한 사람의 목숨 값과 경제적 이익을 견주는 것은 선뜻 답을 내기 어렵다. 영화 속에서도 토론회가 벌어진다.

그런데 마침 구조작업에 참여한 사람이 사망한다. 이제 매몰자 한사람의 목숨과 구조인부 한사람의 목숨이 비교된다. 여기에 살아있을 확률이 다시 문제가 된다. 그 결과 “네 남편 시체 꺼내겠다고, 내 아들의 생목숨을 바쳐야 했나?”로 질문이 이동한다. 여론은 급물살을 탄다. 구조중단에 찬성하는 여론이 60%를 넘어선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하게, 아니 더 잔혹한 형태로 현실에서도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어쩌면 현실은 여전히 이 대목에 결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영화는 쉽고, 현실은 어렵다

<터널>은 이 상황에서 손쉬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정수의 생존이 확인된 것이다. 그 즉시 구조작업이 재개된다. 물론 지금부터 파들어 갔을 때, 여전히 이정수가 살아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작업은 계속된다. 그런데 만약 이정수가 살아있지 않았다면, 혹은 구조작업을 서두르다 또 다른 사고가 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흙더미에서 엎어진 채 발견된 이정수가 죽어있었다면 이후 터널 밖의 여론은 어떻게 돌아갔을까.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싫고 고통스러운 어떤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 현실에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정수의 아내(배두나)에게 구조대원 어머니가 비난을 퍼붓는 장면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구조 중단을 알리고 돌아서는 그에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장면은 인상 깊지만, 그것은 현실 속의 우리가 지금도 계속 가하고 있는 사회적 폭력의 일부일 뿐이다.

영화는 이러한 현실을 대면할 용기는 차마 내지 못하고, 고통의 시간을 잠시 경유하여 해피엔딩이라는 모든 갈등이 봉합되는 낙원, 즉 판타지의 동산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정수는 살아서 나온다. 오직 그래야만 그간의 모든 갈등과 윤리적 문제들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반면 미나의 시신에 영화는 눈길한번 주지 않는다. 죽은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으로 치부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무책임한 장관은 “누구? 왜? 나?”라는 깜찍한 소리를 뱉으며 사라진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를 닮은 누군가는 계속 헛소리를 이어간다. 영화 속 이정수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터널을 통과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아무도 살아오지 못했고, 가족들은 트라우마 속에 내동댕이쳐진 채, 광야에서 밥을 굶으며 울부짖고 있다. 영화는 너무 쉽고, 현실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무더위에 극장으로 피서를 가서 ‘견딜만한 것’으로 윤색된 사회의 난맥상과 클래식 음악에 조예를 넓힌 시간으로 재난의 트라우마를 가뿐하게 넘어선 주인공을 보고, 세월호 참사로 얻은 ‘나의 트라우마’를 위로받고 나온다. 정작 진짜 트라우마를 입은 유족들은 아직 광장에 있는데. 해결되지 않은 윤리적 난제들이 아직 우리 앞에. 꽉 막힌 돌 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터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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