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약 30년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생긴 일이다.

국어 수업시간.

“아무개!”

“네”

이리 나와.

“‘소주’를 한자로 써봐.”

아무개는 고교 수업시간 내내 잠으로 일관해 ‘잠통령’으로 불렸다. 그는 왜 수업시간에 잠을 잤나. 방과후에 술을 즐겨 마신 탓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는 “그냥 졸렸다, 대학 때도 그랬다”고 말했다.

진로(進路)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진로(眞露)엔 눈이 번쩍 뜨이고 입맛을 쩝쩝 다시는 아무개였다. 게다가 그는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와 한자 실력은 탄탄했다. 소주를 한자로 쓰는 일은 그에게 ‘누워서 떡먹기’, 아니 ‘소주 한 잔’에 불과했다. 일필휘지.

소주(燒酎)

“엎드렷!”

아무개는 엉덩이를 열 대 맞았다.

선생은 왜 아무개에게 냅다 ‘빳다’를 날렸을까. 소주를 가까이 한 아무개에게 ‘소주’의 한자는 소줏병 라벨에 쓰인 글자로 각인됐다. 요즘 소줏병 라벨에도 소주는 燒酎로 표기된다. 그러나 사전에 표제어로 오른 소주는 燒酒다.

선생은 아무개가 술독에 빠져 지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주를 마시며 燒酒를 燒酎로 배웠으리라 짐작했다. 술마시는 아무개의 음주를 직접 꾸짖기보다는 은유로 때린 것이다.

며칠 전 동네 슈퍼에서 산 45도짜리 안동소주 병에도 燒酎라고 적혀 있었다. 소주 회사는 그럼 왜 燒酒를 燒酎로 바꿔 쓰나. 酎는 ‘군물을 타지 않은 진국의 술’을 뜻한다. 술을 빚은 뒤 증류해서 알코올을 뽑아낸 소주는 따라서 燒酒이자 燒酎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희석식소주는 燒酒이지 燒酎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희석식소주는 계속 제가 燒酎라고 우긴다. 하하. 그 모습이 우스워 또 한 잔 마신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이코노미스트 전문기자> cobalt@joongang.co.kr


자료: 장승욱, '술통'
사진 :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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