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씽’, 모성과 여성의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을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는 실종수사극의 외피를 쓰고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한다. <미씽-사라진 여자>는 아이를 잃어버린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 여성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두 여성의 삶을 포개놓는다. 이주노동자와 중산층 지식노동자라는 계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은 놀랍게도 비슷하다.

◆ 두 여성이 겪는 억압과 차별

싱글맘 지선(엄지원)의 집에서 보모일을 하는 중국인 여성 한매(공효진)가 아기를 데리고 사라진다. 이혼 소송 중인 지선은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길까봐 신고도 하지 못하고 혼자서 한매를 찾아다닌다. 보이스 피싱으로 돈을 날린 후에야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지선의 말을 믿지 않는다. 경찰을 비롯해 남편과 시댁, 심지어 지선의 변호사마저 지선이 양육권을 잃지 않으려 자작극을 벌이는 것으로 오인한다. 오히려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 지선은 한매가 일했던 곳을 중심으로 수소문한다.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는 지수의 추적과정을 따라가면서, 결혼이주여성으로 한국에 온 한매가 가부장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온몸으로 겪어왔음을 보여준다. 한매의 남편과 시모는 한매를 돈을 주고 사온 노예로 취급하였다. 물리적 폭력을 가하고, 한국어가 유창해지면 도망을 간다며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빨리 아들을 낳으라고 요구하던 그들은 한매가 임신을 하자 잠시 구박을 멈추었다가 딸을 낳자 다시 학대하였다. 심지어 아픈 아기를 딸이라는 이유로 치료하지 않았다. 한매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집을 나와 돈을 벌었다. 안마방에서 일하다 심지어 장기까지 팔았다. 하지만 아이를 지킬 수 없었다. 첫째는 돈이 없고, 둘째는 아이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병원 직원들은 매일 병실에 와 아이를 돌보는 한매보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한국인 아버지의 동의서를 더 중시한다.



한매의 삶은 극단적인 여성 억압의 한 예이다. 영화 속 다른 이주 여성이 보여주듯이, 결혼이주여성이라고 모두 한매와 같은 학대를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매가 겪는 가부장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도와 양태가 다를 뿐 대다수 여성들이 겪는 일이다. <미씽-사라진 여자>는 한매의 삶에 지선의 삶을 겹쳐놓는다. 중산층 지식노동자인 지선 역시 가부장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겪는다. 남편은 뻔뻔하게 불륜을 저지르고, 아이의 양육에 대해서 무책임하다.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어머니와 이야기하라’며 떠밀 뿐이다. 시어머니 역시 한매의 시모처럼 무식하진 않지만, 며느리를 도구로 사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법으로 대표되는 사회 시스템은 온통 이들 편이다.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울부짖는 지선의 말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여성’의 증상으로 취급되고, 이제 직장으로 들어가 보겠다는 남편의 말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될 직업인의 말로 취급된다. 아이의 돌봄을 책임지면서 생계노동을 하는 여성의 삶은 비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수입의 절반 이상을 보모의 월급으로 지불하며 허둥지둥 살아가는 지선은 ‘모성이 부족한 엄마’ 라는 비난과 ‘프로답지 못한 직업인’ 이라는 멸시를 동시에 견뎌야 한다.

지선이 겪는 억압과 차별은 한매가 겪은 것에 비해 가벼워 보인다. 아마 남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기에 무슨 차별이 있나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매일 그 정도의 차별을 기본 값으로 겪는 여성들이 보았을 때 지선의 상황은 한마디만 들어도 백 마디가 다 이해될 정도로 공감된다. 그런데 지선이 겪는 차별 역시 가부장제의 억압과 자본의 착취가 구조화된 것이다. 즉 정도와 양태가 다를 뿐, 본질에 있어서는 한매가 겪은 것과 같다.



◆ 보이지 않는 노동, 돌봄의 외주화

‘사라진 여자’라는 영화의 부제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물론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 한매를 직접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비가시적인 여성노동자들이 잔뜩 나온다. 영화에서 아이를 찾는 포스터가 병원에 붙자, 간병인은 “의사들은 몰라도 간호사나 간병인들은 알 것이다.”라고 말한다. 의사나 병원 행정직원이 바라보는 세계와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돌봄노동의 세계가 있다. 안마방의 칸칸마다 들어차 있는 유사 성노동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름도 출신도 알 수 없고, 그들이 속했던 곳으로부터는 이미 ‘사라진 여자’들이다. 아파트 칸칸이 들어차 있는 ‘이모’라는 이름의 육아/가사 도우미들은 또 어떤가. 이들에 의해 일상의 돌봄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육아, 가사, 간병을 비롯한 돌봄 노동과 유사성노동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정 안에서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만 전가되는 불평등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가정 밖으로 외주화 된다. 심지어 세계화를 거치면서 국경과 인종을 가로지르는 외주화가 일어난다. 돌봄 노동에 남성을 참여시켜 성 평등을 이루는 방식이 아니라, 돌봄 노동을 친/외할머니나 ‘이모’라 불리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전가시켜오다 아예 이주여성들에게 전가시키는 형국이다.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는 육아라는 고리를 통해 만나게 된 한국의 중산층 여성과 이주여성을 맞붙여 놓으며, 이들 사이에 어떤 감정이 흐르는지 주목한다. 겉으로 보기엔 우정,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적대의 긴장이 흐른다. 한매와 지선은 유괴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이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지킬 수 없었던 한매의 눈에, 의사 부인이었던 지선의 삶은 유복하고 완벽해 보였을 것이다. 복수의 마음을 품고 접근한 한매에게 지선은 월급을 주고 선물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삶도 균열되어 있다. 한매가 품은 복수의 칼날은 다시 광기의 모성으로 수렴된다. 또한 한매의 삶을 알게 된 지선이 한매에게 공감의 손을 뻗음으로써 연대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 모성의 이름으로, 여성의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두고, 혹자는 이주여성에 대한 중산층 여성의 공포를 부추긴다고 말하기도 한다. 마치 <요람을 흔드는 손>의 한국 버전으로 읽는 식이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시각으로 읽을 만한 영화가 존재한다. 가령 <숨바꼭질>은 노숙자, 빈민, 하우스 푸어를 ‘미친년’으로 타자화 함으로써, 중산층 가족이 느끼는 공포를 극대화하였다. 하지만 <미씽>은 한매를 타자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매에게 감정을 이입시키면서 ‘사라진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 타자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미씽>과 비견될 만한 영화는 <화차>와 <마돈나>일 것이다. 사라진 약혼녀를 쫓는 남자의 시선을 통해 빚에 몰려 살인자가 되고 남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삶을 조명하거나, 장기이식 간호조무사가 행려병자의 삶을 추적하면서 모성의 이름으로 상상적 연대를 이루는 서사와 친연성을 지닌다. <미씽>은 <화차>와 <마돈나>에 비해 보편적인 인물과 상황을 내세워 감정이입이 훨씬 잘되고, 수사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플롯을 단순화함으로써 훨씬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어서 대중적이다. 다만 영화가 결말을 통해 제시하는 연대의 가능성이 과연 납득되는지는 관객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계층과 처지가 다르더라도, 적대적 긴장관계에 놓여있더라도 모성의 이름으로, 여성의 이름으로 연대는 가능한가?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미씽-사라진 여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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