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 윤상과 함께 화려한 전성기를 다시 소환하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엄정화의 음악이 보여주는 그림은 생각보다 넓다. 물론 대중들에게 엄정화는 1990년대 중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이돌 1세대인 H.O.T, 젝키, 핑클, S.E.S와 같은 시절인기를 누린 그녀는 10대의 우상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트클럽에서는 ‘배반의 장미’나 ‘포이즌’ 같은 댄스뮤직이 노래방에서는 여기에 더해 ‘후애’나 ‘하늘만 허락한 사랑’ 같은 발라드까지 전천후로 사랑받는 스타였다.

그 시절 엄정화의 앨범을 살펴보면 두 개의 스타일로 음악들을 나눌 수 있다. 한 쪽은 당시 유행하던 댄스음악의 마이더스인 주영훈, 윤일상, 김창완 등의 곡들이다. 다만 이 마이더스들이 만들어낸 댄스음악과 엄정화의 댄스곡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아마 엄정화 특유의 극적인 분위기일 터였다.

‘배반의 장미’에서 폭발한 그녀의 댄스 음악에는 항상 여주인공의 드라마가 있다. 연인의 배신에 분노한 여주인공, 다른 여자의 남자를 빼앗은 여자의 비극적인 이별의 순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엄정화의 목소리도 한 몫 한다. 엄정화는 걸출한 가창력을 뽐낸다기보다 그 특유의 음색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근육질의 백댄서들과 함께 그녀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더해지면서 TV속의 ‘배반의 장미’나 ‘포이즌’, ‘몰라’ 등은 당시에는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독보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세기말에 이정현이 머리를 풀고, 비녀를 꽂고, 부채를 흔들고 관절을 꺾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든 채 나타나기 전까지는.



한편 엄정화의 음색은 발라드에서는 더더욱 슬픈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건 음악적인 기교라기보다 그녀의 풍부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후 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준 배우 엄정화의 연기가 대개 그렇듯이.

그런데 그녀의 다섯 번째 앨범에 실린 다섯 번째 트랙 ‘마지막 기회’는 꽤 이질적인 곡이었다. 미디엄템포와 댄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 곡은 기존의 엄정화의 곡과는 많이 달랐다. 과거에도 엄정화는 신해철의 ‘눈동자’나 박진영의 ‘초대’ 등을 통해 미디엄템포의 곡에서 그녀 특유의 섹시함을 보여주었다. 엄정화의 목소리는 사실 감정이 격한 댄스뮤직이나 발라드보다 미디엄템포에 더욱 섹스어필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는 그 섹스어필마저 덜어낸 세련된 담백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이별을 말하는 노래에는 엄정화 댄스곡 특유의 앙칼진 독기도 없었다. 하지만 음악 자체가 품고 있는 우아하면서도 멜랑콜리한 리듬감과 어울리면서 엄정화 음색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이 작업을 도와준 이는 당대의 유명 작곡가인 윤상이었다.



윤상과 엄정화의 첫 번째 작업은 아마도 엄정화가 꿈꾸던 다음 단계의 음악에 대한 이정표가 아니었을까 싶다. 윤상 역시 엄정화와의 작업을 통해 강수지의 음색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어둡고 나른하고 섹시한 느낌을 그의 사운드를 통해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밀레니엄 이후 엄정화는 대중과는 다소 멀어졌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음악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엄정화의 욕심이 한껏 담긴 2004년 8집 앨범 ‘Self Control’에서 다시 한 번 윤상과 조우한다.

당시 한국 가요계에는 친숙하지 않던 일레트로닉 사운드의 향연인 이 앨범은 아마 후대에 엄정화의 명반으로 손꼽히지 않을까 싶은 앨범이다. 특히 더블앨범으로 만들어진 앨범 중 ‘Self’는 대중성과 상관없이 그녀가 하고 싶던 사운드로 가득 채워진 곡들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윤상과 엄정화, 그리고 정재형이 작사로 참여한 ‘지금도 널 바라보며’는 하지만 다른 일레트로닉 곡과는 결을 달리한다. 다른 곡들은 엄정화에게 모험과도 같은 시도였다. 하지만 떠나간 사람을 그리는 이 곡에는 여행 같은 편안함이 있다. 엄정화의 음색과 그 음색에 잘 어울리는 일레트로닉 사운드를 아는 작곡가가 선물해준 것 같은 편안함 말이다. 그리고 이 곡에서 엄정화는 부드럽게 유영하듯 노래 속에서 감정을 끌어낸다.



이처럼 윤상의 곡들은 엄정화의 앨범에서 늘 보석처럼 감춰져 있던 곡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새 앨범 ‘The Cloud Dream of the Nine’에서 엄정화는 윤상이 이끄는 작곡팀 원피스가 만들어준 ‘Dreamer’를 타이틀곡으로 들고 나온다. 더블 타이틀곡 ‘Watch Me Move’가 지금의 클럽 트렌드에 맞춰진 곡이라면 윤상의 ‘Dreamer’는 조금 다르다.

복고풍의 댄스곡인 ‘Dreamer’는 바로 1990년대 화려했던 엄정화의 전성기를 다시 리바이벌한다. 하지만 낡고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품위 있고 매력적이다. 멜로디라인은 엄정화가 즐겨 부르던 댄스곡에 가깝지만 그 사운드의 질감은 정갈하면서도 오밀조밀하기 때문이다. 윤상 특유의 사운드가 전성기 시절의 화려한 엄정화의 사운드를 구름처럼 포근하게 안고 있는 느낌이다. 더구나 이 사랑스러운 사운드에 예쁜 남자를 한 번 품에 안은 뒤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담담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니. 역시나 엄정화 다운 매력적인 신곡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미스틱엔터테인먼트,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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