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형래, 정말 한국 SF에 지대한 공헌을 했나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심형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지금 떠도는 이야기들의 절반만 사실이더라고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단 당사자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입장 발표가 나온다고 해도, 내가 참견할 문제인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주말 모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에서 심형래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한국 SF에 지대한 공헌을 한...’이라는 멘트가 나왔을 때, 나는 그만 울컥해버렸다. 과연 심형래가 ‘한국 SF’에 무슨 기여를 했는가? 그는 그런 거 한 적 없다.

꼼꼼하게 따져 보자. 그의 감독 작품 중 SF라고 불릴만한 작품이 몇이나 되는가. [디-워]는 SF가 아니라 예언과 마법, 전설 속의 괴물들로 구성된 판타지다. [드래곤 투카]와 [용가리]에는 외계인들이 언급되지만, 이 역시 스토리 전개 방식은 판타지. 중생대에 공룡과 원시인이 공존했다는 아이디어에 바탕을 둔 [티라노의 발톱]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은 [우뢰매] 시리즈 시절의 심형래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우뢰매] 시리즈를 만든 건 김청기다.

SF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의가 있다. 그를 모두 언급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아무리 정의를 유연하게 잡아도 어딘가에 ‘과학’은 들어가야 한다. SF,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장르이다. 심형래의 영화들에 그런 것이 있는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서 이 작품들을 모두 SF라고 인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요새는 [해리 포터] 소설도 휴고상을 타는 시대니까. 하지만 그가 이 영화들을 통해 SF 장르의 내러티브와 아이디어 면에서 어떤 공헌을 했냐고 묻는다면 한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옛날 특촬물에 어울리는 소박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변주해가며 비슷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 영화들에는 나름대로 팬들과 관객들이 있다. 존재 이유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공헌’인가? 우리가 SF 장르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감독들을 생각해보라. 제임스 카메론, 스티븐 스필버그, 리들리 스코트, 스탠리 큐브릭, 조지 팔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서 일단 특수효과를 지워보고 내러티브와 아이디어, 주제의식을 보자. 어느 누구도 내용면에서 심형래처럼 정체되어 있거나 퇴행적이지는 않다.

많이 양보해서 심형래가 SFX 영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는 있다. 그의 영화에서 스태프들로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 충무로 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의 몰락 이후에도 영향은 어느 정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특수효과를 잔뜩 썼다고 해서 SF가 되는 건 아니다. 요새 히트하고 있는 [최종병기 활]에도 만만치 않은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 분장과 기타 기계효과들이 들어갔지만, 그 영화를 SF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오히려 나는 심형래가 SF 장르에 끼친 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가 영화를 만들고 옹호하면서 한 발언들은 모두 심각한 수준이었다. 어떻게 된 게, 그는 오직 거꾸로만 움직였다. 진정한 장르 애호가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장르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심형래는 자신이 SF라고 믿는 장르가 얼마나 시시하고 유치한지 증명하려 했다. 그런 식으로 장르를 낮춘 다음에 자신을 거기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그 발언 중 수많은 진짜 장르 걸작들이 별것도 아닌 시시한 영화들로 폄하되는데, 아마 장르 내 그의 적들 중 상당수는 그 때 생겼을 것이다. 물론 그의 영향력과 이미지와 발언 때문에 SF가 유치한 애들 장르라고 믿어버리고 투자자들이 포기해버리는 일도 생긴다. 이것은 결코 기여가 아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 동안 진짜로 한국 SF에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심형래의 이름 밑에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봉준호는 아직도 세계 최고 괴물 영화, 또는 세계 최고 SF 영화 리스트에 당당하게 오르는 SF 영화 [괴물]을 만들었다. 그는 지금 또 다른 SF 영화 [설국열차]를 기획 중이다. 이 영화의 완성도가 [괴물] 정도만 되어도 그는 리들리 스코트와 동률이다. 반대편에서는 심형래의 하루 용돈도 안 되는 돈으로 흥미진진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에일리언 비키니]의 키노 망고스틴 일당들과 [불청객]의 이응일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 SF에 지대한 기여를 한 건 이들이다. 심형래 대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라.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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