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도시’, 누가 이들을 게임 폐인이라 하는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조작된 도시>는 <웰컴 투 동막골>을 연출했던 박광현 감독이 12년 만에 내놓은 액션물이다. 드라마 <힐러> 등으로 얼굴을 알린 지창욱의 스크린 데뷔작이자, 오정세, 심은경, 김상호, 안재홍 등이 의기투합하여 호연을 펼친다. 영화에서 인터넷 게임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단지 인물들을 모이게 하는 설정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질감으로 활용된다. 영화는 게임처럼 휘몰아치는 전개와 리얼리티를 뛰어넘는 호방한 서사를 보여주며, 게임처럼 짜릿한 시각적 쾌감을 안긴다. 또한 게임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정서와 문제의식이 깊이 침윤되어 있다.

◆ 게임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진실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영화 <조작된 도시>는 권유(지창욱)의 나레이션으로 천상병 시인의 시<나무>를 들려주며 시작된다. 영화는 마지막에 다시 이 나레이션으로 들려준다. 즉 이 시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데, 사람들에게 썩은 나무로 취급되는 어떤 존재의 싱싱한 잠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무의 잠재성은 꿈속에서 발현되는데, 여기서 꿈은 게임을 뜻한다. 즉 현실에서는 루저로 취급되지만, 게임 속에서 생생한 능력자로 발현되는 ‘게임 폐인’의 잠재성에 대해 영화가 말하는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로 등장하는 전쟁액션 장면은 인물들이 플레이하는 게임 속의 세계이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이중의 정체성을 갖는다. 게임에서 팀원들을 이끌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권대장(지창욱)은 현실에서는 ‘PC방 죽돌이’다. 게임에서 허허실실 민폐캐릭터인 털보형님은 현실에서 대인기피증이 있는 여성해커 여울(심은경)이다. 데몰리션, 용도사, 여백의 미 등도 게임 속 캐릭터와 실제모습이 사뭇 다르다. 이들은 모두 게임 속에서 멋진 활약을 펼치지만, 현실에서는 부적응자이거나 낙후된 인물들이다.



악역 역시 두 개의 정체성을 갖는다. 후줄근한 용모와 어눌한 말투로 ‘약자를 보호한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 의외의 능력과 사악함을 드러낸다. 그는 현실을 재료로 삼은 자신만의 게임에 빠져 산다. 세상에 널려있는 온갖 정보들을 들여다보고 취합하고 선별하여,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사건을 조작해낸다. 그는 현실을 게임처럼 플레이한다. 그가 세상을 들썩이게 만드는데서 최고의 쾌감을 얻는다며 히죽거리는 모습은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

영화 <조작된 도시>는 현실과 게임을 오가는 이중의 캐릭터들을 배치하며, 스타일리시한 화면으로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시킨다. 비밀공간에서 빅데이터를 주무르는 장면이나 꿈속에서 엄마의 영혼을 만나는 장면과 어둠속의 액션 장면 등은 대단히 세련되고 참신하다.



◆ 최고의 마력을 지닌 경차의 질주

권유는 낯선 이의 대수롭지 않은 부탁을 들어준 뒤, 파렴치범의 누명을 쓴다. 영화는 이 과정을 일사천리로 담는다. 감옥에 간 그가 괴롭힘을 당하고,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가 어머니마저 잃고 망연해지는 과정도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서사는 다소 과장되어 있지만, 흉악범 수용소에 대한 시각적 묘사와 더불어 살짝 비현실적인 톤이 잘 조화되어 있다.

권유가 탈옥한 뒤 털보형님의 부름을 받고, 게임 팀원들과 함께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은 추리극의 쾌감을 담는다. 루저들이 의기투합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판세를 뒤집는 과정은 유쾌하면서도 쫄깃하다. 영화는 주제와 서사와 재현방식이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가령 영화가 공들여 찍은 자동차 추격신을 떠올려보자. ‘아우디 엔진을 단 마티즈’가 고급차량들을 요리조리 따돌리고, 골목길을 잽싸게 빠져나오거나 때로는 급정거를 하거나 급하게 방향을 틀어 자유자제로 후진한다. 최고의 마력을 뽐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렵한 액션을 선보이는 경차라니! 여기서 경차는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이지만, 상당한 실력을 갖춘 주인공들을 상징한다. 또한 이는 소수자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기득권자들의 위선적인 세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조작된 도시>의 주제는 명백하다. 정보화 사회에 인터넷의 바다에 널린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할 능력을 지닌 이들이 증거와 이미지와 상징을 조작하여 얼마든지 사건을 은폐하고 여론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권력에 도취된 기득권자들이 개망나니처럼 범죄를 저지르고, 그 범죄를 약자들의 소행으로 조작한다. 게임에 빠진 백수가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하고 흉악범죄를 저질렀다고 덮어씌우거나, 집착과 망상에 사로잡힌 성매매 여성이 저지른 사이코 범죄로 만드는 식이다. (CCTV 영상을 삭제하고, 수사를 하기도 전에 언론에 먼저 발표가 나고, 방송사 컴퓨터에서 파일이 사라지는 일은 최근 현실의 사건들에서 보았던 바이다.) 사건을 은폐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데에 언론, 범죄심리학, 시민단체 등이 이용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법과 인권을 다루는 변호사이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공고한 피라미드가 형성되어 있고, 언론, 전문가집단, 시민단체 등이 조작에 기여하며, 법이 모든 것을 총괄한 상태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백수, 비정규직, 성매매 여성 등이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추악함을 들키지 않은 채, 사이버 감시와 법의 형벌을 계속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력을 높인다. 이 공고한 피라미드에 틈을 내는 것이 가능할까.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피라미드에 틈을 내는 자들이 있다. 권유는 어머니의 단단한 믿음을 받아 누명을 벗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는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였던 강한 체력과 팀 게임을 이끌어온 리더십을 발휘한다. 여울은 경찰의 발표에 의심을 품고 해킹과 정보 분석을 통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전자상가에서 AS를 해주던 기술자는 정탐용 드론을 만들고, 특수효과 맨은 영화에서나 볼법한 폭발물을 현실에서 터뜨린다.



마지막에 인터넷 방송인들이 지상파 회선에 접속하여 TV화면으로 난입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현실에서 이들은 모두 루저지만, 사이버 세계의 정체성에 의해 모이고 힘을 발휘한다. 이들의 힘은 오히려 현실과 사이버 세계로 분리된 채 발현되는 정체성에서 나온다. 가장 극적인 예가 여울인데, 그는 사이버 상으로는 중년남성의 자아를 지닌 채, 익명의 ‘네티즌 수사대’로 살아간다. 그가 음성변조로 남성의 욕설을 퍼붓는 장면은 얼마나 섬뜩하던지.

게임으로 뭉친 이들이 다시 발군의 실력으로, 기득권자들이 독점하고 조작하는 정보를 훔치고 공개하는 방식을 통해 정보조작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을 구제하고 정의를 실현한다. 이 서사는 흡사 활빈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16세기 봉건시대의 활빈당이 부자의 곳간을 털어 수탈당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면,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활빈당은 자본과 국가에 의해 독점된 정보를 캐내고 공개하여 정의와 공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지금 누군가 인터넷에서 정보를 캐내 ‘네티즌 수사대’로 사건의 의혹을 제기하거나, 게임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조작된 도시>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