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전쟁 세력에 맞서는 여성영웅, 그 탄생에서 현재까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원더우먼>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여성 캐릭터인 원더우먼을 주인공으로 한 슈퍼히어로 물이다. 판타지와 현실의 시공간을 오가는 웅장한 스케일로 만들어진 영화는 원더우먼 캐릭터를 사랑하는 전 세계 팬들의 환대를 받고 있다.

누구나 원더우먼을 알고 있지만, 그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늘에서 나타났나 원더우먼, 땅에서 솟아났나 원더우먼~”) 1970년대 TV로 접한 원더우먼의 섹시함만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영화 <원더우먼>의 이야기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원더우먼은 그리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만화주인공으로 탄생한 원더우먼은 20세기 페미니즘 운동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영화 <원더우먼>은 배경을 1차 세계대전으로 옮김으로써, 원작의 의미를 더 깊게 드러낸다.



◆ 아마존의 여전사

영화 <원더우먼>이 시작되면 신화적인 공간과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등장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쟁의 신 아레스에 맞서기 위해 제우스가 숨겨놓은 종족이라 믿는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폐쇄적인 부족공동체의 공주 다이애나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전사로 자라난다. 다이애나는 특별한 힘을 지니는데, 다이애나가 그 힘을 알게 되었을 때 세계의 결계가 열리듯 인간세계와의 접촉이 일어난다. 비행기가 추락하자 다이애나는 마치 인어공주처럼 조종석의 남자를 구한다. 그러나 남자를 뒤쫓아 온 인간들에 의해 부족은 전투에 휩싸인다. 다이애나는 전쟁의 신에 맞서겠다는 사명에 의해, 최초로 본 남자 트레버를 따라 전쟁이 한창인 인간세계로 온다.

남성들과 떨어져 사는 아마존의 여전사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전설이다. 19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여성시인 사포의 시가 많이 읽히면서 아마존의 여전사 전설은 널리 알려졌다. 19세기 후반에는 가부장제가 부상하기 전 고대 모계사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아마존의 여전사 종족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1848년 미국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인권 대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소신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후 점화된 여성참정권 운동은 20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급진적인 서프러제트 중에는 여가장제와 모계사회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10년대에 대학에 진학하는 신여성들을 ‘아마존’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새롭게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에서 ‘아마존의 여전사’가 일종의 아이콘처럼 쓰였음을 말해준다. <원더우먼>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데미스키라 섬의 모습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 기원을 둔다.



◆ 전쟁광과 싸우는 페미니스트 투사

아마존 여전사 원더우먼이 인간세계로 와서 독일군과 맞선다는 영화의 설정은 1941년 DC 코믹스를 통해 발표된 원작에서 온 것이다. 질 르포어의 <원더우먼 허스토리>는 만화의 원작자 윌리엄 몰튼 마스턴의 삶과 원더우먼의 탄생간의 관계를 잘 알려준다. 마스턴은 1911년에 급진적인 서프러제트 운동의 대모였던 팽크허스트의 연설에 감화 받아 서프러제트 운동을 지지하는 하버드 남성연맹에 가입했다.

그는 페미니스트로서 남성이 망친 세계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남성보다 감정이 몇 배나 발달되어 있고, 뛰어난 사랑의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급진적인 서프러제트들 사이에 공유되던 신념이기도 했다. 마스턴은 거짓말 탐지기의 발명가이자,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두 명의 여성과 가정을 이룬 독특한 인물이었다. 부인이었던 엘리자베스 할러웨이와 애인이었던 올리브 번은 각각 여성참정권 운동과 산아제한 운동 등 당시 페미니즘의 전위그룹에 속했던 인물들로, 두 사람은 마스턴의 아이를 낳아 함께 키웠으며 마스턴 사후에도 계속 함께 살았다.

원더우먼은 마스턴과 두 명의 배우자로 구성된 독특한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마스턴은 강인하고 자유롭고 용감한 여성 슈퍼히어로가 세계 평화를 위해 나치와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소녀들에게 자신감을 고취시키길 원했다. 1938년 슈퍼맨, 1939년 배트맨에 이어 세 번째로 탄생한 슈퍼히어로인 원더우먼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 만화의 폭력성이 사회문제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여성 캐릭터를 통한 폭력성의 중화가 요구되기도 했고, 남성들의 징집으로 인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요구되기도 했는데, 원더우먼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캐릭터였다.



원더우먼이 성조기 무늬의 노출이 패션을 하고 다니는 것은 애국주의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마스턴은 이러한 대중적 타협이 강하고 용감한 여전사로 대변되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헤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원더우먼은 팔찌로 총알을 막고, 진실의 밧줄을 통해 자백을 얻어낸다. 진실의 밧줄은 마스턴이 발명한 거짓말 탐지기를 연상시킨다. 만화에는 악당에게 잡혀 결박된 원더우먼이 스스로 탈출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서프러제트들이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고 시위를 벌였던 것의 재현이자, 억압당하는 여성이 스스로 족쇄를 풀고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장면들로 읽힌다. 하지만 원더우먼의 복장이나 잦은 결박장면은 SM 본디지 성애자이자 복장도착 페티시즘을 갖고 있던 ‘배운 변태’ 마스턴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로 읽히기도 한다.

1940년대 원더우먼은 마스턴의 의도에 충실하게 강한 여성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아마존의 여전사로 투명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온 다이애나는 평소에는 미국정보국 본부에서 번역과 문서수발 업무를 하는 비서로 살아가다 위기 상황에서 원더우먼으로 변신한다. 원더우먼은 파시스트 3인방(히틀러, 무솔리니, 히로이토)의 머리가 달린 사이코박사와 성차별주의적 발언을 쏟아내는 악당에 맞서 싸운다. 에피소드 막간에는 <역사속의 원더우먼들> 코너가 삽입되어,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전기를 짤막하게 소개하였다.



◆ 원더우먼 이미지의 변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고, 1947년에 마스턴이 사망한 뒤에도 원더우먼 시리즈는 계속 만들어졌다. 그러나 원더우먼 캐릭터는 변질되어 갔다. 전후 복구기간 중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반동의 기류가 몰려오고, 마스턴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로 편집자가 바뀜에 따라 원더우먼을 탄생시킨 페미니즘의 지향성은 망각되었다. 1950년대에 원더우먼은 베이비시터로, 패션모델로, 영화배우로 바뀌었다. 결혼하고 싶어 했으며, 연애 칼럼을 쓰면서 독자들의 연애상담을 해주었다. <역사속의 원더우먼들> 코너는 <최신유행결혼식>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변질되어가던 원더우먼의 페미니즘적 의미를 다시 환기시킨 것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었다. 1972년에 스타이넘이 창간한 여성잡지 <미즈>의 창간호 표지는 원더우먼으로 장식되었다. 스타이넘은 어린 시절 읽었던 원더우먼이 소녀로서의 자아정체감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1975년에는 린다 카터 주연의 TV시리즈가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도 1977년부터 방영되어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국내 관객들의 뇌리에 남은 원더우먼의 이미지는 이에 빚지고 있다. 평소에는 군병원의 간호사인 다이애나가 몇 바퀴를 회전하면 원더우먼으로 변신한다. 강한 육체적인 힘으로 정의를 위해 악당들을 제압하는 슈퍼히어로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만, 민망한 노출패션에 채찍, 올가미 등의 아이템이 품고 있는 성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해 충돌을 일으켰다. “힘센 미녀 원더우먼”은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캐릭터로 받아들여졌다.



◆ 1차 세계 대전이라는 배경

여성 감독인 패티 젠킨스는 원작이 탄생한지 76년 만에 극장판 실사영화를 찍기로 하면서, 애초 마스턴이 목표했던 의도를 충실하게 살려낸다. 원작의 배경인 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으로 옮긴 것도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출발한 20세기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원형적으로 복원시키는데 더 나은 선택으로 보인다. 데미스키라의 용맹한 여전사들이나 그들이 품고 있던 세계관은 현실세계에서 감히 꿈꾸지 못했던 발상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데미스키라에서 전사로 길러진 다이애나가 20세기 초 유럽에 와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은 관객들에게 강력한 소격효과를 안긴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며, 공적인 자리에 나가 발언할 권리를 얻지 못했던 20세기초 유럽의 여성들의 삶과 데미스키라에서 활달하게 말을 달리던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다른가. 그런데 20세기초는 인류문명사에서 최초로 남성중심의 도그마에 균열이 발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백화점에서 200벌의 옷을 입어본 끝에 찾아낸 밀리터리 의상과 비서직을 맡은 여성이 언급하는 서브러제트 운동이 이러한 균열의 징표이다.



1차 세계대전은 평화를 위해 전쟁의 신과 싸운다는 자의식을 지닌 원더우먼의 고민을 숙성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배경이다. 만약 원작대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그렸더라면 흔하고 식상한 텍스트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문제의식도 희미해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의미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모호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별로 재현된 적이 없었던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전쟁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과 동맹에 의해 명분도 없는 전쟁에 전 세계가 빨려 들어간 사건이었다. 또한 총력전체제와 전후방이 따로 없는 모호한 전선, 그리고 현대적 무기의 사용으로 전투인력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살상되는 최초의 현대전이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죽이고 세계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순수한 신념을 지닌 다이애나는 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환멸을 느낀다. 무고한 어린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전장을 뛰어다니던 다이애나는 생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독일장군을 죽이면 전쟁이 멎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군을 죽여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아레스는 오히려 영국의 원로 정치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다이애나에게 인류의 호전성으로 전쟁이 끝날 수 없음을 설파한다. 이 대목이 무척 중요하다. 독일군과 싸우는 미군, 파시즘과 싸우는 미군, 소련과 싸우는 미군, 외계인과 싸우는 미군,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미군으로 옮겨가며 자신의 선함을 절대시하고 상대의 악마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세력이 무엇이고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이 무엇인지 근원적인 성찰을 해보는 것이다.



◆ 인간에 대한 믿음

다이애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또한 자신이 데미스키라의 여전사가 아니라, 신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자아 찾기에 성공한 그가 이제 인간을 위해 싸워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는 인류를 지키는 슈퍼히어로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다. 전쟁을 막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인간을 통해, 인간이 선한 존재일 수 있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에게 이런 믿음을 심어준 트레버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트레버 일행은 트레버가 균열을 지닌 존재임을 보여준다. 살인자이자 사기꾼이자 밀수꾼이라는 이들의 정체는 트레버의 것이기도 하다. 트레버는 스파이라는 이중의 정체성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낸 백인이라는 원죄를 지닌다. 그는 자신도 전쟁을 일으킨 세력의 일원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흠 없는 존재의 희생이 아니라, 연루된 존재의 책임완수이기에 인간적인 숭고함을 지닌다. 신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던 다이애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심오한 각성을 품은 슈퍼히어로 역할을 맡은 배우가 하필 갤 가돗이라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한 경험도 있는 갤 가돗은 2014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폭격할 때, 자신의 딸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며 이스라엘의 폭격을 적극 지지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군이 대피소로 사용되던 UN 학교건물까지 폭격하고, 국제법상 사용이 금지된 백린탄을 사용한 것이 알려져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2,000여명의 사망자가 났으며, 그 중 538명이 어린이였다. 당시 이스라엘 인들이 마치 불꽃놀이를 즐기듯 맥주를 마시며 폭격을 관람하는 사진은 공개되어 인류적 공분이 들끓었다.

<배트맨과 수퍼맨 :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2016)에서 갤 가돗의 원더우먼이 등장하자, 갤 가돗을 주연으로 한 원더우먼 시리즈의 제작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캐스팅은 강행됐다. 갤 가돗 주연의 <원더우먼>이 개봉하자, 이스라엘은 발 빠르게 갤 가돗의 캐스팅을 적극 응원하면서 자신들의 군사행동을 미화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영화에는 실제로 마을 건물에 독가스 포탄을 쏘아 민간인들이 몰살하는 장면과 이를 관람하기 위한 의자가 설치된 모습이 등장한다.



끔찍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원더우먼을 연기하면서 갤 가돗이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입장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려주는 기사는 찾을 수 없다. 다만 1982년에 이스라엘의 난민촌 침공과 내전개입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레바논이 갤 가돗 출연을 이유로 영화 상영을 거부했다는 기사가 있을 뿐이다. 맨(인간/남성)이 일으킨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양측 참호 사이의 공간인 ‘노 맨스 랜드’를 홀로 당당하게 걸어가던 원더우먼의 숭고한 발걸음을 왜 하필 극렬 시오니스트이자 아레스의 추종자인 배우의 몸을 통해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게 최선이었을 리 없지 않은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원더우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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