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저항하니까 인간이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이토록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1920년대 도쿄에서 만난 박열과 후미코는 사상적 동지로서 서로 사랑하였고, 함께 투쟁하였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았다. 영화<박열>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빛나는 개인이자, 민족을 넘어 세계의 모순과 대면했던 독특한 존재들을 담백하게 조명한다.

◆ 일본 왕세자를 폭살하려한 대역죄인

영화 <박열>은 시작과 함께 인력거를 끄는 박열(이제훈)의 모습과 <개새끼>라는 시를 읊는 후미코(최희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박열이 잡지에 발표한 시를 읽고 매료된 후미코는 박열을 찾아와 대뜸 “배우자가 있어요?” 묻더니, “동거하자”고 제안한다. 범상치 않다. 계급적, 민족적, 사상적 소수자인 박열의 존재선언 같은 시에 반해 다짜고짜 동거를 제안하는 일본 여성이라니.

이들은 낭만주의자인가? 조금은 그래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낭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과 싸우기 위해 예술보다 폭탄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아나키스트. 박열은 몇 명의 불령선인들과 함께 불령회를 조직하고 제국의 심장을 뒤흔들 의열 투쟁을 준비 중이다. 후미코는 “나도 아나키스트”라며, 박열과 동지적으로 결합한다.



영화는 폭탄을 구하는 문제로 조직 안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는 조짐을 보여주고, 곧바로 결정적 사건인 간토대지진을 보여준다. 간토대지진은 자연재해이다. 그러나 대재난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 된다. 일본 내각은 재난 대응에 설왕설래하다가, 재난구조보다 민심 돌리기에 주력하는 미즈노(김인우) 내무대신에 의해 장악된다. 그는 조선인들을 향한 악의적 소문에 편승해 일본인들의 증오를 부추긴다. 일본의 민병대는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에 나선다.

불령선인에 대한 검문검속이 벌어지자, 박열과 동지들은 학살의 광풍을 피하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간다. 마침 일본정부는 야만적인 조선인 학살이 외신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작사건이 필요했다. 학살의 명분이 될 만한 조선인 폭동 예비음모사건이 필요한 것이다. 불령회의 동지 한명이 폭탄반입 시도에 대해 진술하자, 일본당국은 박열을 대형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만들어 여론을 돌리고자 한다.



박열은 자신이 조작사건의 희생자가 될 운명임을 예감하지만,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희생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굉장한 의거를 계획 중인 테러리스트가 되어 싸움의 의미와 구도를 뒤집는다. 후미코 역시 자신이 박열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자신이 박열을 사주했다고 자백한다. 박열과 후미코는 왕세자에게 폭탄을 투척할 계획이었다며 대역죄를 뒤집어쓴다. 이들의 행보가 그저 자기 파괴적인 영웅심의 발로는 아니다.

이들은 일본 사법체계 안에서 대역죄와 천황제를 충돌시키며 사상투쟁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폭탄을 구하지 못해 번번이 좌절했지만, 이제 상징의 폭탄을 통해 천황제를 폭파시키려는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놀랍도록 의연하다. 상황은 비장하나, 인물들은 유쾌하다. 이것이 지금껏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자유로운 개인 간의 연대를 꿈꾸는 아나키스트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 아나키스트의 투쟁

영화는 박열과 후미코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일본 권력에 반감이 있는 것이지, 민중들과는 친밀하다”는 박열의 대사를 들려준다. 영화에서 전선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 놓이지 않는다. 일본은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가 아니다. 일본 안에 지배 권력과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지배 권력도 분열되어 있다. 내각 안에는 무조건 일본을 지켜야한다는 극우 강경파와 문명국가로서 법과 제도를 지켜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온건파가 존재한다. 지배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도 균질하지 않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 반대하며 천황제의 모순을 설파하는 후미코, 이들의 법정투쟁을 돕는 인권변호사, 이들을 면회하며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청년학도 등 다양하다. 그중 가장 미묘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은 다테마스 예심판사(김준한)이다. 그는 박열과 후미코를 심문하며 법과 양심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는 공무원으로서 신분상의 제약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근원적인 의제에 존재를 걸고 싸우는 박열과 후미코의 열정에 점점 빠져든다.



박열과 후미코는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로운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서는 개인들로 동지적 결합을 이룬다. 이들의 조직은 위계와 강제성을 최소화하며, 각자의 자율적 판단을 최대한 존중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더라도 국가는 개인을 억압할 것이기에, 계급혁명을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삼는 사회주의자들과 노선을 달리한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체현하는 일본 법정을 조롱하며, 자유와 저항을 본령으로 삼는 인간정신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예심판사에게 “국가권력의 개!”라고 일갈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며, 스스로 도덕적 인양 대견해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법의 수호자이자 일말의 양심을 지닌 예심판사는 야생의 에너지를 내뿜는 이들의 형형한 눈빛에 점점 빠져든다.

박열과 후미코는 예심판사를 자신들의 투쟁에 비서처럼 활용한다. 조작사건을 만들려다 목숨을 지렛대 삼아 되치기를 감행한 이들에 의해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일본정부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은 굉장한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재판정을 무대삼아 정치 활극을 보여주던 박열과 후미코는 마침내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만세”를 부르며, 재판장에게 “그동안 수고 했네”라 말한다. 자본과 국가권력은 물론이고, 죽음 앞에서까지 자유로운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가.



◆ 후미코, 가장 근대적인 여성

정신감정을 해봐야겠다는 예심판사에게 박열은 “나는 정상이지만, 후미코는 한번 해보시오. 필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소”라며 가볍게 웃는다. 영화가 뿜어내는 매력의 방점은 박열보다 후미코에게 있다. 박열에게 동거를 제안하며, 동거서약서를 내미는 후미코는 당대의 누구보다 근대적인 정신의 소유자이다. 후미코는 박열이 작전에 대해 숨겼음을 알았을 때, 가차 없이 뺨을 후려친다. 그는 가부장제의 아내로 순종하지 않고, 낭만적 사랑의 연인으로 보호받으려 하지 않는다. 대등한 사상의 동지로,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고자 한다.

취조실에 끌려온 후미코는 박열이 자신의 주체성을 존중하여 스스로 책임정도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을 알고 기뻐한다. 그는 박열이 폭탄 반입을 인정한 것을 알고, 자신도 공범임을 적극 피력한다. 심지어 천황을 욕보이는 사상투쟁을 벌이며 대역 죄인이 되고자 몸부림친다. 법과 국가 권력에 직접 대면하는 주체가 되려는 것이다.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수 있다면, 연단에도 오를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의 뒤집힘처럼, 후미코는 자신이 사적 존재로 간주되는 여성이 아니라, 정치적 사상적 주체임을 선언하기 위해 교수대로 향하는 길을 택한다.



1920년대 불우한 가정사와 가난으로 고통 받던 소녀가 자신이 처한 모순이 자본주의와 국가권력, 그리고 가부장제의 산물임을 깨닫고, 그 정점에 놓인 천황제와 싸우기로 한다. 사생아로 민적이 없어 제때 학교교육을 받기도 힘들었지만, 꾸준히 공부하여 책을 읽고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어떻게 그는 자본주의와 국가권력, 그리고 가부장제의 끈덕진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조선에서 3.1 운동을 접하면서, 민족적 자의식에 빠지지 않고 탄압받는 조선민중들과 계급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자신의 미모와 영민함을 자원삼아, 부자남자와 단란한 가정을 꿈꾸거나, 돈벌이 등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선 역시, 후미코를 단지 박열이라는 조선 청년에게 이끌려 부창부수하다가 심지어 같이 죽으려는 순애보적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앞둔 두 사람이 사고무친한 후미코의 시신수습을 위해 혼인신고를 하거나, 예심판사의 배려 속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무척 아름답지만, 신파나 지나친 로맨티시즘을 담지 않는다. 투쟁의 일환으로 사모관대를 입은 박열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후미코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영화는 이들에게 민족의식이나 혼인의 의미 등을 굳이 끼얹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후미코를 그리면서, 그의 사상을 존중하고 그를 근대적 자아를 지닌 오롯한 단독자로 묘사해내기 때문이다.



◆ 일제강점기 전기 영화의 모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당대의 흥미로운 근대성을 온전히 재현하면서 민족주의적 선악의 구도에서 벗어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실존인물을 역사적인 왜곡 없이 그리면서, 당대의 시대상과 오늘날의 시각에서 곱씹을 만한 의미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구현해낸 작품은 극히 드물다.

가령 민족주의를 벗어난 시각으로 근대적 여성주체를 그리고자 했던 <청연>은 실패했다. 영화는 박경원을 헌신적인 남성의 사랑을 받는 로맨티시즘의 수혜자로 그리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고문장면까지 넣어가며 민족주의 앞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힘없이 추락했다. <덕혜옹주>는 더 끔찍하다. 아무런 주체성도 없이 살다간 덕혜옹주가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지원한 양 민족주의적 미화를 덧씌우고, 당대의 시각에서 보아도 뒤떨어진 왕정복고적인 시선으로 온갖 연민과 감상주의를 덧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박열>은 다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역사적인 왜곡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긴장감 넘치는 실존인물을 통해 당대의 공기를 포착해낸다. 박열과 후미코는 철저하게 근대적인 주체이자, 민족을 넘어 세계의 모순과 대면한 존재이다. 그들은 법정에서 왕세자 암살을 통해 억압받는 일본 민중을 각성시켜 진정한 혁명을 이루고자 한다는 선언을 하여, 법정을 패닉에 빠뜨린다. 이보다 극적인 통쾌함이 어디 있으랴. 일본 정부는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여, 이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환호와 오열 속에서 죽는 영광 대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하며 서서히 잊히는 굴욕을 선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후미코는 천황의 감형서를 박박 찢고, 1년 만에 옥사한다.

자본과 국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개새끼’에 불과하더라도, ‘내 머리에 오줌을 갈기는 권력자의 다리에 나 역시 오줌을 갈기겠다’는 패기와, ‘내 몸이야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 하겠느냐’는 기개로 산다면, 인간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저항하니까 인간이다. 박열처럼! 후미코처럼!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박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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