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봉준호의 전작 ‘괴물’·‘설국열차’와 비교해보니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옥자>는 단순하고 명쾌한 영화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10년 간 키우던 슈퍼돼지 옥자를 빼앗아가려는 초국적 회사에 맞서는 소녀의 모험극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슈퍼돼지의 모습과 움직임이 실물을 보는 듯 경이롭고, 강원도에서 서울과 뉴욕으로 이어지는 이동선이 흥미로우며, 소녀와 그를 돕는 동물해방연대의 활약이 진진하다. 또한 영화 면면에 녹아있는 초국적 자본과 대량육식문화에 대한 비판이 서늘하다.

물론 영화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로 미학적 차원의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변희봉과 틸다 스윈튼이 함께 나오는 영화’로 대변되는 굉장한 이질성을 품은 이 영화가 그 이질성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미자(안서현)를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이 기능적으로만 배치된 것은 실망스럽다. 동물해방연대의 인물들의 면면이 살아나지 못한 것이나,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할 등 연기력 좋은 배우가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묘사가 캐리커처로 보이는 것은 불만이다. 평면적인 인물묘사는 영화를 풍부하게 해석할 여지를 줄이고 단지 프로파겐다로 읽히게 할 우려를 남긴다.



◆ 옥자는 누구인가?

영화의 주인공은 미자지만, 제목은 옥자다. 이는 <괴물>의 제목이 강두가 아니라 ‘괴물’인 것과 같다. 즉 두 영화의 문제의식이 ‘괴물’과 ‘옥자’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옥자는 누구인가? 초국적 자본이 유전자조작기술을 통해 만든 식용 슈퍼돼지이다. 옥자는 자연의 산물이 아닌 자본의 산물이고, 반려동물이 아닌 식육동물이다. 흔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그린 영화에서, 동물은 반려동물(<벤지>)이거나 야생동물(<프리윌리>)이다. 인간은 동물을 대할 때 목적에 따라 매우 다른 태도를 지닌다. 반려동물은 가족처럼 사랑하고, 야생동물은 경외하고 보호하려 애쓰지만, 식용동물은 그냥 먹는다.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은 채 먹는다. 식용동물이 어떻게 길러져 식탁에 오게 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단지 목장에 누워있는 가축을 상상하며 죄의식 없이 맛을 음미한다.

하지만 식용동물의 대다수는 목장이 아닌 공장에서 온다. 인공 임신과 출산을 반복시켜 새끼를 뽑아내고, 꼼짝할 수 없는 스툴에 갇혀 빠르게 살이 찌는 사료를 먹고 6개월 안에 도축된다.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해 부위별로 분해, 포장, 유통되어 식탁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육종교배, 유전자조작사료, 항생제등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온갖 인공적인 기술이 개입된다. 유전자조작기술로 만들어진 슈퍼돼지 옥자는 SF적 상상물이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공장식 축산의 상징적 재현물이다.



그런 옥자가 미자와 10년 동안 강원도 산골에서 가족처럼 살게 된 것은 공장식 축산의 진실을 가리고 ‘친환경 축산’이라는 가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미자는 초국적 기업 미란도가 홍보한대로 옥자가 자연에서 왔으며, 10년간 옥자를 잘 기르는 것이 친환경 축산과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즉 옥자와 미자의 관계 역시 초국적 자본이 기획한 상징조작의 일부였던 셈이다. 옥자는 공장식 축산의 진실과 위선을 이중으로 두른 상징물이다.

하지만 옥자를 기르는 10년 동안 미자에게 옥자는 반려동물이자 가족이었다. 이는 반려동물과 식용동물이라는 구분이 임의적이며, 식용동물이라 할지라도 감정이 교류되는 존엄한 생명체임을 말해준다. 영화 초반에 미자가 위험에 빠졌을 때, 옥자는 벼랑에서 몸을 날린다. 상당히 공들여 찍은 이 장면은 옥자를 구하기 위한 미자의 모험이 시혜적인 동물 사랑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교감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 <괴물>의 소담하고 글로벌한 판본

어쩌면 <옥자>는 <괴물>의 다른 판본으로 읽힌다.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실존하지 않은 동물,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낮은 자들의 결기, 사랑하는 가족과 가치를 지켜낸 사람의 소박한 저녁식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를테면 영화 <괴물>을 보고 잠든 소녀의 꿈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한 소담한 판본이다. 풍자와 냉소의 함량을 줄이고, 희망의 순도를 높였다.

또한 이것은 <괴물>의 문제의식을 글로벌 판본으로 옮겼을 때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폐수에 의해 한강에 살게 된 괴물’이라는 남한사회의 지역성은 ‘초국적 회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유전자조작 축산업’으로 얼마든지 옮겨올 수 있다. 자본에 의한 생명의 침탈과 오염이라는 모티브가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은 글로벌 자본이라는 본질로 환원되고, 사람에 대한 착취에 국한되었던 모순은 성-종-계급체계를 통한 생태계 착취로 확장된다. 여기에 딸을 잃은 하층민 가족의 투쟁에 노숙자가 연대하는 저항의 구도는 반려동물을 잃은 소녀의 투쟁에 동물해방연대가 함께 싸우는 구도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



<괴물>에서 화염병 좀 던져봤던 삼촌이나 우스꽝스럽게 춤추는 풍선으로 환유된 환경단체는 <옥자>에 와서 동물해방연대의 직접행동적인 투쟁방식으로 전유된다. 전자의 ‘운동권’이 과거의 유물이거나 극복되어야 할 무기력이라면, 후자의 대항세력은 동시대적 활력과 미래로 이어지는 희망의 단초로 긍정성을 획득한다.

<옥자>가 <괴물>의 문제의식을 확장시키고 긍정적 전유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괴물>의 소녀는 노숙자 소년을 품고 희생되지만, <옥자>의 소녀는 옥자와 어린 슈퍼돼지를 구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에게 닥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집을 떠나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겪으며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전형적인 모험담의 서사이다. 여기서 성인남성이나 소년이 아닌 소녀가 모험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서사에서 소녀는 성인남자가 움직이게 하는 희생물이거나, 소년의 동기를 촉발하고 성공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옥자>에서 소녀가 희생물이나 동기유발의 매개물이 아니라 영웅이라는 점은 <옥자>가 <괴물>에 비해 젠더적으로 진보한 영화임을 알려준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에서 당시까지 남아있던 세계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다. 모두 절멸하고 흑인 소년과 아시안 소녀 한 쌍만 남아서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써나가도록 한 <설국열차>의 결말에는 도저한 파국의 정서와 끈질긴 희망의 정서가 공존한다. 이러한 전작을 경유한 뒤, 봉준호가 <괴물>의 다른 판본이라 할 수 있는 <옥자>의 결말을 통해 보여주는 의미는 곱씹을만하다. <괴물>에서 소녀는 희생물이고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가 영웅적인 서사를 펼친다. 가난하고 못 배운 아버지는 계급적 약자이다. 그는 민중성을 상징하며, 싸움의 과정을 통해 마취가 되지 않는 몸과 “노 바이러스”를 알아듣는 영민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의 각성을 머리색의 변화와 졸지 않고 부릅뜬 눈을 통해 직접 가리킨다.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노골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민중의 각성이 결국 소녀를 희생물로 삼은 남성영웅의 각성이라는 점에서 젠더적인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봉준호 감독은 남성영웅의 서사로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담아낼 수 없으며, 소녀 영웅의 서사를 통해 성-종-계급체계의 모순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희망의 단초를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 돌진하는 소녀영웅과 자본의 균열

영화 <옥자>는 소녀영웅의 서사를 다만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다. 실제로 소녀의 액션을 대단히 활력 있게 묘사한다. 미자는 산골에서 할아버지, 옥자와만 살아 온 소녀이지만, 집에 온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질렌할)를 단번에 알아보고, 옥자를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안다. 유튜브 등 인터넷 콘텐츠를 검색하여 정보를 얻는데 장애가 없으며,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직관적으로 복잡한 상황을 알아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돌진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초국적 기업의 서울 사무소에서 그가 몸을 날리는 모습을 보라. 처음엔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으며, 충돌의 순간에는 실제로 꿈쩍도 하지 않던 유리가 곧 엄청난 진동과 함께 공명에 의해 와르르 무너진다. 흔히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하지만, 진동과 공명의 주파수가 맞을 경우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것도 붕괴된다.



이처럼 명쾌하게 돌진하는 미자와 달리, 자본은 대단히 균열되어 있다. 루시는 교양 있는 외모를 띄고 있지만 히스테리 적이다. 그것은 그가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틸다 스윈튼이 굳이 루시와 낸시 쌍둥이 자매로 출연하는 것은 자본의 야누스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루시가 낸시와 달리 온갖 친환경적이고 아름다운 수사를 곁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허구적 이미지일 뿐이다. 유전자조작과 공장식 축산을 통해 수많은 고기들이 어디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는 모두 은폐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 세계로 보내서 친환경적으로 자라는 슈퍼돼지 새끼들의 모습이 홍보로 이용된다. 동물해방연대와 미자의 활극으로 인해 자신들의 위선이 드러날 위기가 오자, 그들은 다시 미자를 홍보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태세전환을 한다. 자신에 대한 저항마저도 자본의 미화수단으로 흡수해버리는 자본의 놀라운 굴신성.

영화에서 가장 처량한 존재는 동물학자 죠니이다. 그는 정말로 동물을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명성이 자본에 복무하게 되자, 그는 동물 착취의 첨병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하는 일 사이에서 분열을 느끼며 술에 빠져든다. 자신의 전문성을 자본에 저당 잡힌 사람의 비극성 보다는 못하지만, 자신의 성실성을 자본에 저당 잡힌 사람도 안 되긴 마찬가지이다. 박문도(윤제문)는 자본을 위해 헌신하는 맹목성을 보여주며, 김군(최우식)의 불성실을 개탄한다. 그러나 영화는 쿠키영상 속 김군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길을 보여준다.



◆ 욕망의 포기와 새로운 관계 맺기

미자가 낸시와 대면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은 일견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주제가 담겨있다. 미자가 금돼지를 던져 옥자를 사겠다고 선언하자, 낸시는 선선히 거래에 응한다. 루시가 아닌 낸시에게 미자와 옥자가 일으킨 이미지 흠집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실리가 중요하다. 루시에게 금을 던지는 미자는 그저 고객님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자의 결단이다. 살아있는 옥자를 죽은 금과 바꾸는 행위, 즉 살아있는 생명의 가치와 죽은 화폐의 가치를 교환하는 행위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대게의 경우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금을 포기하지 못한다. 미자의 할아버지가 그러했고, 글로벌 경제의 부속이 되어 이를 돌아가게 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그러하다. 마지막에 글로벌 자본의 정점에 놓인 낸시 역시 생명체가 아닌 금돼지를 택한다. 미자만이 금돼지를 던지고 옥자를 데려온다. 옥자를 구하기 위한 직접행동과 자본주의적 욕망의 포기를 통해, 미자는 옥자와 함께 하는 소박한 일상을 되찾는다.

애초에 옥자는 자본의 산물이다. 그러나 자본과 맞서는 싸움을 통해 살처분 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새끼 돼지와 더불어 구출되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괴물>에서 미군의 폐수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각성된 민중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할 존재로 그려졌던 것과 다르다. 옥자는 자본의 산물이었고, 자본이 맺어준 관계에 의해 미자는 옥자를 만났다. 자본의 기획대로 미자가 옥자를 키우고 다시 돌려보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위선적인 홍보문구였던 ‘친환경 축산’의 본질에 미자가 진정으로 도달함으로써, 옥자와 미자 사이에는 자본이 설계한 것과 전혀 다른 감정과 관계가 싹텄다. 자본이 강요한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 저항의 단초가 들어있다.



사실 옥자만 자본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며느리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즉 우리 모두는 성-종-계급체계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억압적인 체제의 산물들이 체제가 허락한 관계를 벗어나 다른 종류의 교감과 관계를 맺어나갈 때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다. 체제가 허구적으로 말하는 그 환상의 궁극을 지렛대 삼아 싸울 수 있다. 미자가 옥자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행복을 지켰듯이, 체제가 강요하는 욕망과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이 믿는 진정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옥자>는 미자가 전 세계 공장식 축산을 없애는 것을 보여주지 않지만, 어떤 방식의 싸움을 통해 없앨 수 있는지 그 단초를 암시한다. 캐리커처화 된 우화처럼 보이지만, <괴물>과 <설국열차>를 통해 달려온 봉준호 감독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 <옥자>를 통해 한결 따뜻하게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옥자><괴물><설국열차>스틸컷,메이킹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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